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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배우 하연수는 자신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누리꾼들이 활동하는 남초 커뮤니티에 직접 가입해 댓글난에서 ‘고소할 수 있으니 허위사실 유포를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근거 없는 루머와 모욕적인 언사를 남긴 누리꾼들은, 조목조목 잘못을 따지며 준엄하게 경고하는 하연수의 댓글에 꼬리를 내리고 제 말을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아니, 그러게 일본 유학 가서 자기 하고 싶은 공부 하고,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리고, 찍고 싶은 사진 찍으며 반려 토끼와 함께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사람을 왜 건드리냐는 말이지.
하연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한국의 온라인 매체들이 선정적인 기사를 쓰자, 하연수는 개중 가장 악의적이라 여겼던 <헤럴드팝(POP)>과 <머니에스(S)>의 두 기자 실명을 콕 집어 거론하며 기사를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하연수는 언제부터 연예인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사진을 무단으로 스크랩해 과장해서 기사를 쓰는 게 언론의 권리가 되었냐고 따져 물었고, 이에 사람들은 언론의 여성 연예인 성상품화와 소셜미디어 스크랩 기사 발행 관행의 문제점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하연수의 행보를 지켜보던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하연수가 왜 자꾸 공격당하는지 알 것 같아. 엄청난 동안에 완전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겼잖아. 마냥 자기 이야기 잘 들어줄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이니 얼마나 판타지가 심하겠어. 그런데 그런 사람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자기주장도 강하지, 말투도 똑 부러지고 기까지 세니까 미쳐버릴 것 같은 거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조 꼬북좌’라거나 ‘디즈니 재질’ 같은 말을 붙여가며 마냥 귀여워하고 대상화하고 싶은데, 조금만 대상화를 했다 하면 정색을 하며 ‘그런 말은 옳지 않다’, ‘듣는 상대의 기분도 생각하고 말하라’,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를 하니 얼마나 분하겠는가. 내가 인형처럼 예뻐해주겠다는데, 감히 자기도 사람이라고 구니까.
개인의 성격이 어떻든, 젊은 여성은 자꾸 부드럽게 말하고 나긋나긋하게 웃도록 요구받는다. 자기 의견이나 욕망이 있어도 그걸 최대한 귀엽고 안 거슬리는 말투로 돌려 돌려 이야기하기를 강요당한다. 그게 ‘센스’ 있는 일이고 ‘현명한’ 대처라고 칭찬받는 동안, 그저 건조하게 있는 사실을 짚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쌀쌀맞다’, ‘싸가지 없다’, ‘잘난 척이 심하다’ 같은 비난으로 부당한 처벌을 당한다. 자기주장이 있어도 저렇게 귀엽고 센스 있게 이야기하면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데, 그렇게 세게만 이야기하면 누가 좋아해주겠냐고. 비슷한 연배의 남자 연예인들이 ‘강한 자기 소신’이나 ‘일침’ 같은 말들로 변호받는 동안 하연수는 집요하게 공격과 훈수를 받았다. 언론부터 앞장서서 ‘말투를 더 호감형으로 고쳐보는 건 어떨까’라거나 ‘말의 무게를 인식했어야’ 했다는 식의 기사를 남겼다.
누리꾼과 언론을 상대로 차분하게 싸우고 있는 하연수를 보면서, 나는 문득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을 떠올렸다. 지난 대선의 막바지, 박지현 비대위원장이 ‘추적단 불꽃’의 ‘불’이라는 가명을 벗고 나와 얼굴과 실명을 밝히고 나섰을 때만 해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등판을 반겼다. 상대 진영이 ‘이대남’ 전략으로 젠더 갈등을 부추기고 젊은 남성 표를 몰아오는 전략을 펼치려고 할 때, 엔(n)번방 사건을 치열하게 추적해온 20대 여성 활동가 박지현이 이재명 대선 후보를 지지하며 젊은 여성들에게 호소하는 그림은 썩 훌륭한 대응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만큼 이재명 후보가 상대적으로 월등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로, 박지현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대선이 끝난 뒤 여성 활동가 박지현이 비대위원장 자리 제안을 수락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상황은 미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윤석열 정부의 첫 내각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향해 ‘자녀 입시에 부모 찬스를 사용했다’는 비판이 일자, 박지현 비대위원장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다시 한번 국민들에게 사과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자신들이 떳떳해야 상대 진영을 향해 조국 전 장관에게 들이댔던 잣대만큼 엄격하게 검증하라고 힘 있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지지자들은 조국에게 사과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박지현 비대위원장에게 내부 총질을 하지 말라고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25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합동회의에 참여 중인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왼쪽). 공동취재사진
뒤이어 같은 당 최강욱 의원이 화상회의 중 다른 남성 의원을 향해 성희롱성 발언을 했다는 제보에, 박지현 비대위원장은 적당히 뭉개지 말고 예외 없이 엄격하게 진상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최강욱만큼 보수세력에 맞서 잘 싸우는 의원을 침소봉대해서 성희롱 가해자라는 오명을 씌우려 한다며 다시 박지현 비대위원장이 ‘총선을 앞에 두고 내부 총질을 한다’고 비난했다. ‘경력도 일천하고 학력도 높지 않다’ 같은 말도 안 되는 트집부터 시작해서, ‘여성의당에서 보낸 첩자 아니냐’ 같은 허무맹랑한 지적이 이어졌다. 대선 전에 당 중진들이 앞장서서 ‘차별금지법 제정’ 약속이나 ‘86그룹 2선 퇴진’ 같은 이야기를 꺼낼 때는 트집 잡지 않던 사람들이, 박지현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자 정치를 잘 모르는 젊은 여자가 당을 망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대체 배후가 누구냐고 물었다.
물론 연예계와 정계는 그 성격이 다분히 다르기에, 하연수의 사례와 박지현의 사례를 등가 비교하는 건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귀여워해주고 기특해해주려고 했는데 감히 목소리를 내다니’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냥 예쁜 ‘꼬북좌’로 귀여운 인형처럼 소비되어야 하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더불어민주당의 개혁 의지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로 선택해줬으면 웃으면서 화답해야지 감히 괘씸하게. 글쎄, 몇번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젊은 여성은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