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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무슬림 소녀 ‘슈퍼히어로’ 성장기…뭐, ‘정치적 올바름’ 묻어서 싫다고?

등록 2022-06-25 17:10수정 2022-06-26 09:29

[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미즈 마블’과 정치적 올바름
무슬림 이민자 주연…일부 “배우 탓 망할 것” 공격
국내서도 비아냥…우리 사회내 주류 우월감 작용했나
<미즈 마블>의 한 장면. 디즈니 플러스 제공
<미즈 마블>의 한 장면. 디즈니 플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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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스튜디오가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선보인 드라마 <미즈 마블>(2022)은 10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다. 미국 뉴저지주 저지시티에 사는 카말라 칸(이만 벨라니)은 어벤져스에 열광하고 캡틴 마블(브리 라슨)을 롤모델로 선망하는 평범한 10대 소녀다. 어벤져스 관련 행사인 ‘어벤져스콘’에 참여했다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된 카말라는, 제 능력을 탐구함으로써 자아를 찾는 여정에 나선다. 이렇게만 쓰면 평범한 슈퍼히어로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중인 카말라의 이야기는 그보단 더 풍성하다.

카말라는 운전면허 시험에 떨어지고, 부모님 몰래 외출을 했다 걸려 혼이 나고, 아닌 척하면서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수에 은근히 신경을 쓰는 10대다. 첫사랑도 진행 중이어서, 짝사랑 상대인 남자애와 문자를 주고받는 것만으로 오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 남자애와 썸을 타는 것은, 카말라에게는 자기 능력을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미션이다. 이 좌충우돌 성장 드라마에서 다소 특별한 게 있다면 딱 한가지, 카말라가 파키스탄 이민 2세대인 무슬림 여성이라는 점이다.

무슬림 소녀 배우? 뭐가 문제인데?

파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소녀가 슈퍼히어로 ‘미즈 마블’이 된다는 설정을 못마땅해했던 이들은,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전부터 작품이 망할 것이라고 떠들어대곤 했다. 그들은 <미즈 마블>을 두고 “마블이 ‘정치적 올바름’을 챙기려고 무리해서 만든 드라마,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데 실패하고 일부 무슬림 커뮤니티나 신좌파들에게만 어필하고 크게 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뚜껑이 열리고 난 뒤 반응은 사뭇 다르다. 평론가들과 시청자들이 직접 매긴 평점은 압도적이고, 벌써부터 “이만 벨라니는 카말라 칸을 연기하기 위해 태어난 배우” 같은 극찬이 쏟아지고 있다. 스트리밍 회차 수로는 마블의 다른 드라마들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의 한가운데 공개된 <완다비전>(2021), <팔콘 앤 윈터 솔져>(2021), 델타 변이 와중에 공개된 <로키>(2021)와 <호크아이>(2021), 오미크론 대유행 중에 공개된 <문나이트>(2022)와 등가비교를 하는 건 부적절하다. 그런 걸 고려한다면, <미즈 마블>은 근사하게 순항 중이다.

사실 원작부터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캐릭터였다. “어벤져스에 열광하는 덕후”라는 설정이나 “부모님과의 세대 차이로 고생하는 10대”라는 설정은, 모두 코믹스 팬들이 현재 겪고 있거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던 일들이 아닌가. 카말라 칸은 코믹스를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감정이입을 하기 쉬운 캐릭터였다. 무슬림 10대 여성이라는 설정도 흥미로웠는데, 무슬림 커뮤니티는 끊임없이 오해의 대상이 되곤 했던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작품이라고 환호했고, 비무슬림 커뮤니티에서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반영한 흥미로운 시도라는 반응이 있었다. 새로 등장한 캐릭터를 밀어주는 마블 코믹스 특유의 밀어주기 관행을 감안해도, 미즈 마블 캐릭터는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둔 사례였다. 그랬으니, 드라마판이 실패할 거라는 전망은 사실 전망이 아니라 근거 없는 저주에 가까웠다. 온라인에서는 ‘드라마가 망할 것’이라고 떠들어대던 팬들을 놀려먹는 밈(meme)이 유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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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 마블>의 한 장면. 디즈니 플러스 제공

그렇다면 이들은 왜 드라마가 나오기도 전에 ‘망할 것’이라고 떠들어댄 걸까? 아마 낯선 것들, 자신이 아닌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리라. 오랫동안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여성이, 성적 소수자가, 비백인 소수인종이, 장애인이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인공이 되는 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은, 할리우드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작품 안에 억지로 여성 캐릭터를, 장애인 캐릭터를, 소수인종 캐릭터를 끼워 넣느라 작품의 내적 완성도를 희생시킨다고 주장한다. 글쎄, 평론가들이 입을 모아서 좋은 작품이라고 극찬한 <스타워즈 에피소드 8: 라스트 제다이>(2017) 같은 작품마저 물어뜯기는 걸 보면, 이 비판은 작품의 내적 완성도와는 별 관계가 없는 원념의 발사가 아닐까?

국내서도 생뚱맞은 ‘미즈 마블’ 공격

미국에 사는 백인 남성이 그러는 건 ‘주류에서 밀려나는 공포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할 수 있다. 희한한 건, 국내 누리꾼들 중에도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 추구가 콘텐츠를 망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권이 주도해온 세계 질서에서, 아시아의 극동 한국인이 주류로 대접받은 적은 한번도 없는데 말이다. 특히나 아시아계 남성은 영미권에서는 그 흔한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도 여겨지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희미한 존재였다. 소수자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는 풍조가 주류로 올라올수록, 아시아인인 우리에게 허락되는 기회도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떤 한국인들은 “작품에 피시(PC, 정치적 올바름) 묻었다”는 비아냥으로 이와 같은 변화들에 저항한다. 이유가 뭘까?

한국전쟁 이후로 한국 사회에는 인종적으로 백인을 욕망하는 백인 선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즈 마블>을 향해, 혹은 다른 작품들을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 혹시, 미국 사회 내 주류 인종으로서 백인이 지니는 우월한 지위와, 한국 사회 내 주류 인종으로서 한민족이 지니는 우월한 지위를 동일시해서 감정이입을 하는 건 아닐까? 한국은 이제 명실공히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우리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인력들이 농사지은 채소를 먹고, 몽골에서 온 인부들이 지은 아파트에 입주하고, 중국에서 온 가사도우미들과 간병인들의 조력을 받으며, 미국에서 온 영어 선생에게 영어를 배운다. 미국 내 주류 인종인 백인들이 사회경제적 불안을 소수인종들에게 투사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나쁜 버릇을, 어느새 한국의 우리도 똑같이 따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시작은 콘텐츠 속 정치적 올바름 추구를 향한 공격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실제적인 폭력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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