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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빗댄 현실의 ‘헬조선’…‘한산’의 상큼한 민족주의

등록 2022-07-30 10:00수정 2022-07-30 22:15

[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한산

‘최종병기 활’로부터 이어지는
김한민표 조선 전쟁영화 시리즈
영화 속 겹쳐 보이는 현재 시대상
‘한산’서는 정치의 부재 은유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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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 감독의 신작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했다. 전작 <명량>이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 성적을 기록했을 때 주요 흥행 요소로 꼽혔던 건 ‘국뽕’, 즉 과도한 애국주의였다. 하지만 김한민의 작품은 애국주의 영화라기보다는 국가와는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국인이 놓여 있는 조건을 생각하고 한국인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민족 영화에 가깝다. <한산>에 이르면 그조차도 매우 담백해져서 ‘상큼한 민족주의’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다.

김한민표 민족 영화의 사회적 배경은 무엇일까?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그의 조선 전쟁영화 시리즈는 공교롭게도 보수 정권이 집권할 때마다 개봉했다. <최종병기 활>(2011)은 용산 참사와 쌍용차 사태를 지나 희망버스의 시간이 열렸던 이명박 정권 말기에, <명량>(2014)은 권위주의 정권의 부활을 알렸던 박근혜 정권 중기에 스크린에 걸렸고, <한산>(2022)은 정치력에 있어 놀라울 정도로 무능했던 진보 정권이 막을 내린 뒤 집권한 윤석열 정부 초기에 관객을 만나고 있다.

덕분에 이 시리즈가 조선 시대 정치 상황에 빗대어 현실 정치를 묘사하는 방식은 다소간 징후적으로 읽힌다. 여기서 ‘징후적’이라 함은 감독 및 제작진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작품 속에서 어떤 정치적 무의식이나 시대정신을 해석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징후적 독해, 그게 이 글이 하려는 일이다.

_______
영화 통해 읽어보는 ‘시대정신’

시리즈 첫 작품이었던 <최종병기 활>은 제 한 몸 보위하는 것에 열을 올리는 비열한 정권 아래에서 끝까지 살아남고자 했던 ‘버림받은 국민’의 삶을 그린다.

주인공인 남이(박해일)는 인조반정 때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친우인 김무선(이경영)의 집에서 신분을 숨긴 채 자란다. 역적의 자식이라 공직에 나갈 수 없는 그에게 삶의 낙은 그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궁술(활 쏘는 기술)을 갈고닦으며 동생 자인(문채원)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런데 자인이 김무선의 아들 서군(김무열)과 결혼을 하던 날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자인이 포로가 되어 청나라에 끌려간다.

형제나 다름없는 남이와 서군은 단둘이서 청나라 정예부대를 하나씩 격파하고, 누이이자 아내이며, 조선 민족이 끝까지 지켜야 하는 존엄의 상징인 자인을 구출한다. 서군과 자인은 겨우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국가는 청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때문에 포로를 국민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국경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후 영화는 “병자호란 후 나라의 송환 노력은 없었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이 그들만의 힘으로 돌아왔다”는 비장한 자막과 함께 끝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영화에서 국경이란 한없이 치졸해서, 외세에는 열려 있되 자국민에게는 닫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 너머의 조선 땅은 아름다운 최종병기로 대변되는 민족문화가 기거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국가, 통치 세력, 국민을 구분하여 평가하고, 지금/여기의 정치를 불신하면서도 민족의 역사와 문화 안에서 ‘우리’가 되는 국민의 역능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세계관이 시작됐다. 바야흐로 ‘시이오(CEO) 정권’이 신자유주의화를 끝까지 밀어붙였던 2011년이었다.

<명량>에서 정부는 국가의 명운 앞에서 매번 오판을 내리는 무도한 임금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임금은 이순신을 끌어다 고문하고 죽이려 했던 적도 있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이때 조선 수군은 이미 기세가 꺾인 상황. 영화를 끌어가는 주요 동기는 ‘명장 이순신이 단 12척의 배와 오합지졸을 이끌고 어떻게 왜군 330척과 대적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순신 역시 영웅의 풍모는 아니다. 그는 탈영병의 목을 치고, 남아 있는 병사들의 집을 모조리 불태우며 배수의 진을 친다. 임금이 다스리던 조선 땅이나 이순신이 지휘하던 진도 병영이나 어차피 지옥이라는 점에선 매한가지이고, 2014년 ‘헬조선’ 대한민국의 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순신은 어떻게 전투를 치르겠다는 것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내야 한다”는 말을 주워섬기며 국민으로 하여금 ‘용기’라는 근거 없는 광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이후는 없다고 겁박할 뿐이다.

위기는 왜군이 아니라 조선 내부로부터 온다. 이순신을 고문한 건 임금이고, 구선(거북선)을 태운 건 부하 장수들이었으며, 정작 해전에서 조선 수군에게 첫 혼란을 안겨준 것은 두려움에 정신을 놓고 배 위의 화약통을 폭파한 조선 사병이었다.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 건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했던 이름 없는 민중들이다. 이순신은 그런 민중의 마음을 “천행”이라고 말한다. 영화 개봉 2년 후인 2016년, 한국 사회는 촛불광장에서 일종의 ‘천행’을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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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임금’ 등장하지 않는 사극

<한산>에 이르면 나라와 정치가 부재한 세계가 열린다. 이 영화에는 전쟁 사극에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나라’나 ‘조선’, ‘임금’과 같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름의 정치적 사연이 펼쳐지는 왜군 쪽과 달리 조선군 쪽의 이야기는 이순신, 학익진, 구선 등 이미 민족주의 서사 안에서 그 의미가 완결되어 있는 이미지들의 배치로 구성된다. 여기서 이순신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민족의 유구한 셀레브리티로 등장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싸움입니까?” 포로로 잡혔던 준사(김성규)가 이순신(박해일)에게 물었을 때, 이순신은 “의 대 불의의 싸움”이라고 답한다. 준사가 “나라 대 나라의 싸움이 아니냐”고 다시 묻지만 이순신의 답은 마찬가지다. 더 이상 ‘나라’는 지향해야 할 확정된 가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알 수 없다. 이순신은 웬만해선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의’의 의미는 이상할 정도로 동료들과 소통하지 않는 이순신의 내면만큼이나 관객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요하는 것이고, 관객의 입맛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를 통해 2022년 한국 사회에 남은 것은 공동의 목표를 발굴하기 위해 갈등하고 협상하는 정치적 노력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진영 논리 속에서 꽃핀 밈의 정치와 대통령 (부부)의 셀레브리티 놀이라는 것을, 역시나 징후적으로 읽게 되고 마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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