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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헐크 잘 들어! 화를 참는 건 여자들에겐 일상이야”

등록 2022-10-15 19:45수정 2022-10-15 19:53

[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변호사 쉬헐크
<변호사 쉬헐크>.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변호사 쉬헐크>.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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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변호사 쉬헐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 <변호사 쉬헐크> 시즌1의 결말이 지나치게 난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젠 월터스(타티아나 마슬라니)는, 다시 한번 ‘제4의 벽’(픽션과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벽)을 부수고 드라마 제작진을 찾아간다. 마블이 제작하는 모든 작품에 결정권을 지닌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 ‘케빈’을 독대한 젠은, <변호사 쉬헐크>까지 뻔한 마블 공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말한다. 그러니까 음산하고 어두침침한 밤을 배경으로 한 대규모 액션신, 초인적인 힘을 갖게 해주는 혈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악당의 음모, 지금껏 나왔던 악당들이 아무 개연성도 없이 한자리에 다 모이는 클라이맥스, 다른 시리즈물의 히어로가 찬조 출연해서 마블의 다음 작품에 대한 여지를 남기는 떡밥 투척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러면 ‘젠 월터스’와 ‘쉬헐크’ 두개의 페르소나 사이에서 갈등하던 젠의 고민과 성장에 집중할 수 없지 않으냐고, 그러니까 결말을 다시 쓰자고.

뻔한 결말, 적당히 하자고!

젠의 말을 들은 케빈은 “당신은 케빈이 준비한 멋진 결말을 다 망쳤다”고 투덜대면서도 젠의 요구사항을 들어준다. 젠은 사촌 브루스 배너(마크 러펄로)의 도움 없이도 상황을 정리하고, 젠의 컴퓨터를 해킹하고 불법 동영상을 촬영해 젠을 공개적으로 모욕했던 일군의 남자들은 경찰에 잡혀간다. 젠은 일당의 우두머리를 ‘쉬헐크’ 모드로 응징하는 대신, 법조인 젠 월터스의 얼굴을 하고 단호하게 “법정에서 보자”고 말한다. 법의 개입을 기다릴 수 없는 순간에는 자경단인 ‘쉬헐크’로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에는 철저히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히어로. 그렇게, <변호사 쉬헐크>의 결말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작품들이 공유하는 세계관)가 자주 답습해오던 뻔한 공식을 피하며 시즌 전체를 젠의 성장담으로 마무리했다. 어떤 이들은 “이제 결말을 수습 못 할 거 같으면 제작진 찾아가 성질만 부리면 만사 오케이라는 건가”라며 투덜거렸지만, 마블의 반복되는 패턴에 문제의식을 느꼈던 사람들은 <변호사 쉬헐크>의 마블 비판에 키득거렸다.

뻔한 길을 걷지 않은 건 결말만이 아니었다. 매회 헐크 액션이 등장하기를 바랐던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변호사 쉬헐크>는 젠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각종 부조리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젠은 훌륭한 법조인이자 악인들을 한 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슈퍼히어로지만, 언론은 젠에게 “오늘 입은 의상은 어떤 디자이너의 작품이냐” 같은 질문에 집중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인 남자들은 젠의 성공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슈퍼파워가 갔다”, “사촌 오빠 브루스 배너 덕분에 얻은 힘이니 족벌주의다” 따위의 말로 깎아내리기에 바쁘다. 일터에서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기 모습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쉬헐크’의 페르소나를 유지할 것을 요구당하고, 남자들은 ‘쉬헐크’의 모습에 매료되어 다가왔다가 자연스러운 젠의 모습을 보여주면 어쩐지 멀어진다. 어쩌다가 좀 괜찮은 남자를 만난 거 같아 안심하고 있으면, 그놈이 휴대폰과 컴퓨터를 해킹해 사생활을 침해하고 불법 촬영을 해댄다.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맞다. <변호사 쉬헐크>는 오늘날의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흔히 당하는 공격들을 슈퍼히어로 서사를 매개로 보여준다. 마치 <팔콘과 윈터 솔져> 속 팔콘 샘 윌슨(앤서니 매키)이 ‘슈퍼히어로이기 전에 흑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젠은 슈퍼파워를 얻고도 여전히 ‘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당해야 하는 부조리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로펌에서 실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쉬헐크’이기 때문에 주목받는 것이라고 깎아내리거나, 더 심하게는 “로펌 대표와 잤을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시즌 초반, ‘헐크 선배’로서 분노를 가라앉히는 법을 가르치려던 사촌 오빠 브루스에게 젠은 단호하게 말한다. “화를 참는 건 모든 여자가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일이야.” 젠은 시즌 내내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원한 적도 없는 ‘쉬헐크’의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질시와 추측, 루머에 시달리고, 제 능력만으로 인정받고 싶은데 그럴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간신히 어색했던 페르소나에 익숙해질 때쯤 누군가 등장해 “애초에 원한 적도 없잖아?”라고 말하며 그것마저 앗아가려 든다. 브루스 배너는 통제할 수 없는 ‘헐크’ 때문에 고통을 받지만, 젠 월터스는 ‘쉬헐크’가 되었음에도 온 세상이 자신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르치려 들고 깎아내리려 들어서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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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쉬헐크>.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가장 큰 한계마저 깨부순 쉬헐크

이 블랙코미디는 실제 드라마가 당하고 있는 평점 테러와 그것마저 일찌감치 예측했던 제작진에 의해 완성된다. <변호사 쉬헐크>는 ‘로튼 토마토’나 ‘아이엠디비’(IMDB) 등의 리뷰 사이트에서 평점을 깎아내리기 위해 새로 아이디를 개설한 일군의 네티즌들에게 평점 테러를 당했다. 평론가 평점이 신선도 87%인 데 반해 관객 평점이 신선도 35%까지 떨어진 건 그런 탓이다. 여성 히어로가 여성이라서 당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들면 평점 테러를 당하는 이 웃지 못할 상황.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젠은 ‘제4의 벽’ 너머 시청자들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다들 어찌나 웡(베네딕트 웡)을 좋아하는지! 웡이 카메오로 나오면 한 일주일은 트위터에서 욕을 안 먹는 거 같아요!”

그러니 ‘제4의 벽’을 깨고 나와 자신의 서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성하려 한 젠의 활약이 더 통쾌할 수밖에 없다. 젠은 자신을 낮춰 보는 사회의 시선을 깨부수고, 제 사생활을 해킹해 자신을 ‘천박한 여자’로 낙인찍으려던 일군의 남자들을 해치우는 수준을 넘어, 창작물 속 캐릭터가 뛰어넘을 수 있는 가장 큰 한계인 ‘제4의 벽’을 거침없이 깨고 나와 이런 서사를 강요한 드라마 제작진들과 스튜디오의 수장을 찾아가 끝끝내 결말을 바꿔낸다. 굳이 자기를 지키겠다고 우주에서 날아온 사촌 오빠는 빼버리고, 액션 클라이맥스를 위해 굳이 지질한 빌런에게 슈퍼파워를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고, 깔끔한 일 처리 이후에는 근사한 파트너를 만나 즐거운 식사를 하는 산뜻한 마무리로. 벌써, 다음 시즌이 기대된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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