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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돌아온 문명특급, 근사하지 않아 더 좋아

등록 2022-10-30 08:59수정 2022-10-30 09:01

[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문명특급
유튜브 화면 갈무리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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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 저 양반이 왜 <문명특급>에서 춤을 추고 있지? <에스비에스>(SBS) 뉴미디어팀 ‘스브스뉴스’가 제작하는 유튜브 프로그램 <문명특급> 라이브 방송을 보던 나는, 화면 안에서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직장인의 춤사위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두번 놀아본 솜씨가 아닌 각 잡힌 춤사위를 뽐내고 있는 사람은, 에스비에스의 경쟁사인 엠비시(MBC) <뉴스투데이>의 대중문화 섹션 ‘문화연예 플러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 정영한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올 시간도 없었던 듯 슈트에 구두 차림으로 스테이지 위에 올라간 정영한 아나운서는, 부장님께 결재 올리고 지하철 타고 급하게 달려왔다며 신들린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어째 <뉴스투데이>에서보다 춤을 더 열심히 추는 것 같다고, 시말서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정영한 아나운서는 이렇게 답했다. 한번도 시말서 써본 적이 없는데, 이참에 연습도 되고 좋을 것 같다고.

게릴라 춤판 열린 기괴한 와인바

방송사의 경계를 뛰어넘은 이 이상한 춤판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가 어딘지 알면 혼란은 더욱 커진다. 서울시 양천구 오목교 인근의 한 상가 건물 1층에 자리한 이 공간은, 불과 얼마 전까지 가정식 백반과 갈비탕을 팔던 식당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직원이 퇴사하면서 3개월간 시쳇말로 ‘펑크’가 난 이 식당을, <문명특급> 팀은 보증금·권리금 없이 ‘월세 300’으로 초단기 임대했다. 점포명은 ‘포도나무 사랑 걸렸네’, 다루는 주종은 적포도주와 백포도주, 1·2층 모임 및 회식 환영, 마음만은 60년 전통. ‘컴백 맛집’으로 유명한 채널이니 아예 진짜 맛집을 차려보자는 심산으로 시작한 이 기괴한 와인바를 스튜디오 삼아 <문명특급>은 ‘게릴라 댄스 신고식’을 열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유튜브 화면 갈무리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이 식상한 말이 가끔은 생명력을 얻어 펄떡일 때가 있다. <문명특급>이 그렇다. 2개월간의 휴지기를 가지고 돌아온 <문명특급>은 시작부터 초상집 분위기였다. 함께 일하던 프로듀서 두 사람이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면서, 피디 다섯명이 만들던 프로그램은 다시 초창기에 그랬듯 피디 세명짜리 프로그램이 됐다. 다섯명이니까 해볼 수 있는 일이라며 힘주어 진행하던 초대형 프로젝트 ‘고척돔 프로젝트’는 자연스레 엎어졌고, 거대한 프로젝트로 귀환을 알리려던 계획도 무산됐다.

쓰린 속을 뜨끈한 소머리국밥 국물에 소주 한잔으로 달래던 피디들은, 초창기에 그랬던 것처럼 가볍고 날렵한 기획으로 승부를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진짜 ‘컴백맛집 개봉맛집’을 운영할까?” 메인 피디 밍키(홍민지)의 한마디로 시작한 기획은 ‘스튜디오 활용, 비는 날엔 공간대여’라는 구체적인 플랜으로 발전했고, 그렇게 <문명특급>은 진짜 맛집을 차려버리는 과감한 모험을 질러버렸다. 레거시 미디어(지상파, 케이블 등 실제 텔레비전을 주 매개로 삼는 기존의 매체)였다면 저지르기 어려웠을 모험이지만, 뉴미디어 특유의 기동성에 어차피 다시 위기 상황이라 더 잃을 것도 없는 <문명특급> 팀의 상황이 더해지며 이 기상천외한 기획은 현실이 되었다.

‘포도나무 사랑 걸렸네’의 첫 손님으로 영국의 싱어송 라이터 앤 마리를 섭외했을 때만 해도 그냥 ‘스튜디오로 잘 활용하는구나’ 싶었다. 통역이 크게 필요 없이 영어로도 특유의 활력을 뿜어내는 진행자 재재(이은재)와 앤 마리의 호흡은 찰떡같았고, 식당 콘셉트에 맞게 김치말이국수와 복분자 소주 칵테일을 말아서 서빙하는 구성도 그럴싸했다. 하지만 이 공간을 정말 이렇게만 활용하고 말 건가 하는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맛집’이라는 공간의 특성은 그냥 콘셉트로만 활용하는 건가? 공간을 일반에 대여하면서 자연스레 콘텐츠를 뽑아낸다는 기획은 어떻게 현실화시킬 거지?

기우였다. 앤 마리의 영상이 올라옴과 동시에, <문명특급> 팀은 문제의 게릴라 댄스 신고식을 연다는 공지를 올린다. 정말 여기서 일반인이 막 놀아도 돼? 쭈뼛쭈뼛 조심스러웠을 시청자들의 망설임을, <문명특급>은 특유의 색깔로 돌파해냈다. ‘대중문화의 중심지, 케이팝의 망령’을 자처하는 <문명특급>의 색깔 속으로 일반인들을 한껏 초대하면서, 그러자 입시 스트레스에 찌든 고3들부터, 소식을 듣고 노량진에서 달려온 고시생, 지나가던 초등학생, 상암동에서 급하게 달려온 타사 아나운서까지 모두가 미친 듯 상가 건물 1층 점포 안에서 몸을 흔들어댔다. 대체 이게 뭐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뭐지? 초등학생이라면서 저 춤선은 뭐지? 정영한 아나운서는 왜 탬버린마저도 맛깔나게 잘 흔들고 있는 거지? 그 한시간은 그렇게 내내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으로만 채워졌다.

한국 유튜브 콘텐츠의 전위

분명 공간의 특성을 쇼 안에 이식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은 끝에 뽑아낸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인터넷도 제대로 연결 안 된 공간에서, 노트북 하나에 스피커를 대강 연결하고 블루투스 노래방 마이크로 진행한 방송은 척 봐도 열악해 보였다. 재재 혼자 진행도 하고 음악도 틀어야 하는 상황은 방송이 거진 다 끝나갈 때까지 계속됐는데, 보다 못한 시민이 디제이 역할을 맡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끝날 때까지 그 모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열악함은 오히려 방송 참여의 문턱을 낮춰주는 효과로 이어졌다. <문명특급> 팀이 만들고 싶었던 ‘고척돔 프로젝트’만큼 근사하지도 거대하지도 않지만, 대신 내키면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된 것이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유튜브 화면 갈무리

2018년 첫 등장 이후 <문명특급>은 언제나 한국어 유튜브 콘텐츠의 전위였다. 진행자 겸 피디 재재의 집착에 가까운 게스트 연구는 동종업계 사람들의 질투를 불러왔고, 케이팝 콘텐츠를 향한 진심은 ‘숨듣명’(숨어서 듣는 명곡), ‘컴눈명’(다시 들고 컴백해도 눈감아줄 명곡) 콘서트를 낳았다. 그렇게 유튜브계의 거물이 된 시점에 <문명특급>은 다시 초심으로, 뉴미디어 특유의 기동성을 발휘하기 좋은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왔다. 제작진은 거대 프로젝트가 무산된 게 아직 아쉽겠지만, 난 베테랑들이 가벼운 행장으로 나선 이 예측 불허의 행보가 더 기대된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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