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환경단체 ‘채식미래’ 활동가들이 지난 13일 스페인 바르셀로나박물관 이집트실을 찾아가 고대 미라 관의 진열장에 핏빛 주스를 끼얹고 있다. 트위터 갈무리
왜 애먼 작품들을 희생양 삼는가?
최근 서구 미술관들에서 잇따르는 환경단체 운동가들의 명작 훼손 시위를 보며 미술인들은 이런 질문들을 꺼내 들었다. 지난 5월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에서 벌어진 해프닝이 발단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모나리자>에 할머니로 변장한 젊은 남성이 다가가 케이크를 집어 던진 뒤 “지구를 생각하라!”고 외치면서 끌려나간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이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독일 바르베리니미술관,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미술관에 젊은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찾아가 고흐, 고야, 페르메이르, 컨스터블 등의 작품에 식료품이나 액체를 던지고 자신들의 몸을 접착제로 붙이는 행위를 하면서 기후변화와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시위 행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술품만 골라 훼손 시위를 벌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언론과 대중한테서 단시간에 가장 많은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영국 브리티시박물관, 미국 구겐하임미술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 뮤지엄 92곳의 관장들이 지난 15일 성명을 냈다. 이들은 “세계유산으로 보존되어야 마땅할 명화의 훼손으로 뮤지엄 사람들은 큰 충격과 좌절감에 빠졌다”며 “소장된 작품들이 대체 불가능하고 훼손에 취약하다는 점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구 환경운동가들은 거리끼지 않는 기세다. 지난 7~20일 이집트에서 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열리는 것을 겨냥해 13~18일 화석연료 반대를 내세우며 대대적인 작품 훼손 시위 공세를 펼쳤다. 13일 스페인 환경단체 ‘채색미래’ 활동가들은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외치면서 바르셀로나박물관에 소장한 고대 이집트 미라 관 진열장 위에 핏빛 띤 주스를 뿌렸다. 18일엔 다국적 환경운동가들이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밀라노,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공공설치작품 훼손 행동에 돌입했다. 파리의 경우 예술애호가들의 새로운 순례 코스로 자리잡은 수집가 프랑수아 피노의 컬렉션 전당인 옛 주식거래소 건물 앞 찰스 레이의 스테인리스 스틸 말 조각상에 주황색 페인트를 마구 덧칠했다. 밀라노에선 문화공간에 전시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1979년 작 베엠베(BMW) 아트카에다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미술관에서 유리판에 보호된 채 내걸린 명작 그림에 이어 고대 유물, 공공조형물이 바로 훼손 행위의 목표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18일(현지시각) 이탈리아 밀라노의 ‘파브리카 델 바포레’에 전시된 앤디 워홀의 아트카가 기후활동가들이 뿌린 밀가루로 뒤덮여 있다. 연합뉴스
유럽 환경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훼손 시위가 예술품 감상 여건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상황의 절박성을 알리려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환경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맥락들이 결합된 복잡계의 사안이다. 상황이 심각하다면, 내놓는 대응도 심각한 숙고를 거쳐야 한다. 탄생 과정이 환경파괴와 아무 연관이 없거나 되레 생태보존과 밀접하게 얽힌 미술품에 일종의 테러를 가해 관심을 고취한다는 발상은 단세포적이다. 외신으로 전해지는 시위 양태를 보면, 인류의 창의성과 상상력, 자연에 대한 경의의 산물인 예술품에 대한 존중이 거의 없어 보인다.
단적인 일례가 지난 15일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박물관에서 환경단체 ‘마지막 세대 오스트리아’의 구성원들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죽음과 생명>에 기름을 연상시키는 검은 액체를 마구 뿌린 사건과 그 이틀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박물관에서 이집트 미라 관을 덮은 유리 진열장에 액체를 뿌린 사건이다. 두 사건 동영상을 보면 충격적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심연을 세기말의 감수성으로 파헤친 클림트의 대작에 패대기치듯 검은 물질을 난사하고 이집트 미라 관을 덮은 유리 진열장에 핏빛 액체를 저주의식처럼 뿌리는 장면은 섬뜩하기만 했다. 검은색과 보라색 얼룩으로 그림을 뒤발해버린 그들의 행위는 가장 전형적인 반달리즘(5세기 반달족의 로마유산 파괴에서 비롯된 문화유산 파괴 행위)의 양상과 다르지 않았다. <모나리자>나 반 고흐, 모네의 그림에 수프나 삶은 감자들을 집어 던진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서구 운동가들이 공격한 작품의 절대다수가 환경 문제가 본격화하기 전인 르네상스 바로크시대나 19세기 나온 작품들이다. 그들은 원죄가 없다. 되레 지금 파괴의 현실 앞에서 이전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성찰과 위안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환경생태운동의 문화적 지반이라고 할 수 있다. 우군 격인 문화적 지반을 파괴하는 것까지 우려되는 막장시대의 징후가 다가왔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정치 등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으로 명작들을 이용하려는 역사적 사례들은 적지 않지만, 모두 실패했다. ‘퇴폐미술’로 잘 알려진 1930년대 독일 나치스 정권의 현대 미술가 탄압과 국내 사법당국이 북한 찬양이란 억지 재갈을 씌워 30년 이상 압수하면서 신학철 작가의 최고 명작으로 등극한 <모내기>의 수난사 등이 떠오른다. 미술품은 창의성과 상상력, 자유정신의 결정체다. 만들어지면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자율성과 자기 규정성을 갖는다. 20세기 개념미술의 서막을 연 뒤샹의 변기를 그냥 폐기물로 버리지 않고 위대한 명품으로 대접하는 것은 그런 연유다. 미술품은 이용당하지 않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