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문체부 서울사무소에서 박보균 장관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김성희 신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장관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박보균 장관은 왜 역량평가를 생략한 것일까.
지난 1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임명 사실을 발표한 뒤 18일 취임한 김성희(65) 국립현대미술관 신임관장의 인선과정은 이런 의문을 남기면서 입길에 올랐다. 임명 시점 자체가 미묘했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이 대통령실에 사의를 표명한 다음 날(13일) 유인촌 장관 후보자 지명 직후 전격적인 통보와 임명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장관이 사실상 공석인 상황에서 이뤄진 임명은 이례적이다. 그뿐만 아니다. 과거 관장 공모 과정에서 최종 후보들이 필수적으로 거쳐 갔던 역량평가 여부를 후보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생략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 배경을 놓고 의문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역량평가는 지난 2006년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도입되면서 시행됐다. 과장급 공무원이나 민간인이 고위공무원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업무 수행능력 검증 절차다. 공공기관 업무에 해당하는 가상 상황에서 평가 대상자들이 어떤 판단과 대응조치를 하는지 심사단이 관찰·평가한다. 행정 기구나 부서 수장으로서 원만하고 합리적인 통솔력과 판단력을 지녔는지 파악하려는 취지다.
지난 6월부터 진행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공모의 경우 문체부는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였다. 지난달 20일 면접 전형을 거쳐 김 신임관장과 김찬동 전 수원시립미술관장, 심상용 서울대 미대 교수를 최종후보로 선정, 통보한 뒤에도 역량평가 진행 여부나 일정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 슬그머니 역량평가를 건너뛰고 김 관장 임명을 확정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후보는 “관심사였던 역량평가 시점에 대한 공지가 없어 문체부 쪽에 평가를 언제 하느냐고 문의했더니 ‘결정된 바 없다. 곧 알려드리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하지만 관장 발표 때까지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와 관련해 문체부 운영지원과 쪽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고위공무원단 규정상 공모한 관장 후보들은 (장관이)역량평가 면제 요건에 해당한다고 보고 인사혁신처에 요청해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무슨 말일까. 인사혁신처는 지난 6월 관장 공모를 시작했다. 7월 중순 세 명의 최종후보를 확정할 시점까지 관장 인선 절차를 규정한 혁신처의 고위공무원단 규정에는 역량평가를 원칙으로 하되 이를 면제하고 임용하려면 일정한 전제 조건을 두었다. 역량평가를 다룬 규정 9조의 4번째 항목에 ‘고위공무원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어 소속 장관이 처장과 협의하는 경우’라고 명시했다. 이런 맥락에서 경쟁 공모를 신청한 후보들이 역량평가를 면제받을 만큼 전문성을 인정받았는지는 의문이라는 것이 미술계의 중론이었다.
김 신임관장은 다른 두 후보와 달리 미술관장을 맡아 운영한 행정경험이 전무하다. 상업갤러리 기획자를 거쳐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 캔파운데이션 등 소장작가들 중심의 대안적 공간 운영에 관여해왔으나 국내외 미술관 영역의 활동은 존재감을 찾기 어렵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지난 7월 중순 최종후보로 확정된 직후부터 그는 윤석열 대통령 측근인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의 대학 후배이자 지인이란 점이 부각되면서 관장으로 가장 유력하다는 설이 파다했다.
한겨레가 취재한 결과 정부는 지난달 30일 대통령령으로 기존 고위공무원단 규정을 개정해 장관에게 역량평가를 자의로 면제할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 인사규정 9조의 4번째 항목을 대폭 수정해서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한)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직위에 임기제 또는 별정직 공무원으로 신규채용하는 경우 소속 장관이 인사혁신처장에게 역량평가를 실시하지 않도록 요청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따라야 한다고 바꾼 것이다. 이로써 대통령실 등 정권 상부와 교감하는 장관의 판단에 따라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관장 후보들의 역량평가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기획자 출신인 김홍희, 윤범모, 이용우씨가 최종후보로 경쟁했던 지난 2018년 20대 관장 공모 과정 당시엔 역량평가 여부를 놓고 미술계에 격한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문체부는 인사혁신처에 “후보들이 직무능력을 검증받은 인사들이니 역량평가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특정 인사에 특혜를 준다’는 지적이 나오자 결국 실시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지난해 21대 관장 공모에서도 평가는 진행됐다.
역량평가가 정착되는 곡절을 지켜봤던 미술계는 이번 22대 관장 임명 직전에 평가 규정이 돌연 바뀐 데 대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역량평가 여부를 후보들에게 공지하지도 않고 생략해버린 건 행정 경험이 일천한 특정 후보를 미는 의도가 아니었느냐는 의혹까지 살 수 있는 대목이다. 역대 전임 관장들 가운데 누구도 장관이 사의를 표명한 뒤 임명된 전례가 없었다는 점도 그렇다.
지금은 사라진 상업화랑 서미갤러리의 홍송원 전 대표 아래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던 김 관장의 과거 경력도 공공미술관 수장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미갤러리가 1990년대 이래로 삼성 등 대기업 가문의 국외 고가미술품 수집과정에서 불법 비자금으로 작품을 조달하는 실무 창구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