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패널 한명이 등장하는 <알쓸인잡>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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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대학의 출발점이라 불리는 볼로냐대학이 세워진 건 1088년이었다. 그리고 그 볼로냐대학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강단에 선 건 1732년의 일이었다. 볼로냐대학 설립부터 유럽 최초의 여성 교수인 라우라 바시가 등장할 때까지 644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필요했던 이유는 자명하다. 여성들은 애초에 대학 입학에 필요한 중등 교육에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가로막혀 있던 시기, 중등 교육은 사치재로 여겨졌다. 당연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진 여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변호사 아버지를 둔 부유층 출신 바시조차도, 중등 교육 과정은 모두 가정 교사의 수업으로 대체한 탓에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었다. 볼로냐 대주교 프로스페로 람베르티니가 바시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해주는 일이 없었다면, 바시 또한 대학 학위를 딸 수 없었을 것이다.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 ‘지식’
인류의 역사에서 지식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세월 지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이 중등 교육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역사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유수의 대학들도 굳이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하버드대가 처음으로 여성을 학생으로 받은 게 1920년이었고, 예일대와 프린스턴대는 1969년에야 여성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이와 같은 남성의 지식 독점은 단순히 왜곡된 사회 구조의 산물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남성들은 여성이 지식을 획득하는 걸 아주 적극적으로 방해했는데, 이를테면 독일 라이프치히대의 신경생리학 교수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뇌 무게가 가벼운데, 이렇게 연약한 뇌를 지닌 여성이 지적 작업에 몰두하게 되면 몸이 상해서 끝내 정신의 균형이 깨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이 어마어마한 요설을 담은 뫼비우스 교수의 저작명은 글쎄, <계집들의 정신박약>(1900)이었단다.
티브이엔(tvN)의 지식 예능 시리즈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의 여섯번째 작품 <알쓸인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이 방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여성 패널의 수를 확인한 것이다. <알쓸신잡> 시리즈는 여성이 한명도 없이 방영되었던 첫 두 시즌 이후, 꾸준히 한명의 여성 패널을 끼워 넣는 것으로 비판을 피해왔다. 시즌3의 도시계획학 박사 김진애, <알쓸범잡>(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시즌1의 범죄심리학자 박지선 교수, <알쓸범잡> 시즌2의 서혜진 변호사. 진행자를 포함한 성비로 보면 5분의 1에 불과한데, 그나마 2개 이상의 시즌을 근속한 패널은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이번 시즌은 좀 다를까? 달라지긴 했다. 여성 패널은 여전히 천문학자 심채경 한명인 반면, 진행자는 방탄소년단의 알엠(RM)과 영화감독 장항준 두명으로 늘었다. 여성이 차지한 파이가 전체의 6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알쓸신잡> 시즌2 제작발표회 당시, 시리즈의 남성 편중을 지적하는 비판에 제작진은 “남녀를 막론하고 일단 섭외가 쉽지 않다. 여성 박사를 섭외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건 아닌데 아직 섭외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그럴 수 있다. 방송에 출연한다는 건 나름의 결심이 필요한 일이고, 선뜻 출연하겠노라 한 사람이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해명을 믿는다 하더라도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시리즈에 출연한 여성 패널만 모아도 여성 패널로만 한 시즌을 꾸릴 수 있을 만큼 인력풀이 충분해지지 않았나. 마음만 먹는다면, 김진애가 인간이 세운 도시 시스템을 고찰하고 박지선이 인간의 심리를 논하며 서혜진이 인간이 만든 사법 체계를 설명하며 심채경이 우주 속의 인간을 논하는 시즌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관점을 반영할 여성 패널을 한명만 섭외했다는 건 마땅히 수치스러워야 할 일이다.
<알쓸신잡> 제작진은 시리즈의 남성 편중을 지적하는 비판을 받아왔다. 티브이엔 제공
물론 제작진이 뫼비우스 교수처럼 여성은 지적 대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악의적인 편견에 차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섣부른 추측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제작진을 믿고 선뜻 시즌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역대 여성 패널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할 테니까. 스크린 너머에서 완성된 작품을 시청하기만 하는 나로서는 알지 못할, 제작진만 알고 있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아직 첫 방송이 방영되기도 전에 굳이 불필요한 악담을 퍼부을 생각도 없다. 다만, 제작진이 자꾸만 오른쪽으로 꺾이는 핸들을 보정할 생각 없이 관성대로 차를 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는 있다.
‘두 날개’로 반듯하게 날 순 없을까
“이 세상이 재현되는 방식은, 세상 자체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묘사해놓고 그것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착각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처럼, 남성들은 남성 중심의 고등 교육 제도를 만든 뒤 그에 맞춰 여성의 지적 능력을 폄하하거나 적극적으로 억압해왔다. 그렇기에 오늘날 세상과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억눌려왔던 나머지 절반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다. 역사 속에서 여성의 관점, 여성의 지식, 나아가 여성 그 자체는 제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억눌려왔다. 그 억눌린 목소리에 더 많은 무게를 싣는 보정 작업 없이 그저 인간의 삶과 세계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결과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절반만 바라보는 오랜 관성과 편향의 반복으로 이어질 것이다.
난 여전히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여성을 차별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와 ‘차별을 시정한다’는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평등, 우리에게 익숙해서 관성이 되어버린 차별은,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더 힘을 싣는 일 없이는 고쳐지지 않는다. 핸들이 자꾸 오른쪽으로 꺾이는 차에 탄 채 달리고 있다면, 꾸준히 왼쪽 방향으로 핸들에 힘을 주어야 똑바로 나아갈 것 아닌가? 세상에 관해,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업은 분명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