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일 오전 ‘월즈 오브 워즈’를 찾은 샘 휴스 초등학교 2학년들이 19세기 중국인의 미국 이주 경험을 그린 책 <페이퍼 선>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모습.
어린이청소년문학의 ‘쓸모’를 묻기 위해, <한겨레>는 오늘날 전세계 어린이청소년문학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을 찾았다. 어린이와 도서관의 가치를 중시하고 이를 전통으로 만든 미국은 현재 ‘다양성’이란 가치를 핵심으로 삼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백인·남성이 정점에 서 있는 차별과 배제의 위계 구조를 뒤흔들고 있는 와중에 미국의 어린이·청소년들은 여태 어떤 문학을 읽어왔으며, 앞으로는 어떤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 미국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 다양성이 확대되는 이야기는, 한 사회가 어린이·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대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문학적 경험을 제공해줘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여러분 자신을 비춰주는 책을 ‘거울 책’, 건너편 세상을 보여주는 책을 ‘창문 책’이라 해봅시다. 무엇이 자신의 ‘거울 책’인지, 또 어떤 책을 ‘창문 책’으로 삼을 수 있을지 한번 찾아보세요.”
지난달 2일(현지시각) 오전, 미국 애리조나대에 설치된 어린이책 도서관 ‘월즈 오브 워즈’(Worlds of Words)에선 심리학과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서의 안내에 따라, 대학생들은 ‘인디언’, ‘유럽’, ‘아시안/동아시안’, ‘라틴’ 등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에 따라 나뉜 어린이책 책꽂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에마 맥윌리엄스는 ‘아시안/동아시안’ 책꽂이를 유심히 살폈다. “엄마가 미얀마 출신”이어서 자연스럽게 미얀마의 문화를 담은 책이 있는지 궁금했다. 만약 그런 책이 있다면 ‘창문 책’일까 ‘거울 책’일까 묻자, 잠깐 고민하던 그는 “둘 다에 해당할 것 같은데,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적인 경험을 더 많이 한 내겐 ‘창문 책’에 좀 더 가까울 것 같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에서 온 부모를 둔 케리 라우는 “나 같은 이민 2세대의 경험을 묘사한 책을 ‘거울 책’으로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다. 콜롬비아에서 입양된 여동생을 두고 있다는 셸비 캔트럴은 “콜롬비아의 문화를 담은 책이 있다면, 내게 좋은 ‘창문 책’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민의 나라’ 미국은 인종적·문화적으로 다양한 정체성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백인 중심으로 형성된 ‘주류’ 문화의 영향 아래 다양한 정체성들은 차별의 그늘 아래에 머물며 오랫동안 제대로 재현·대표되지 못했다.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흑인, 동양인, 인디언 원주민 등은 ‘소수자’란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문화 속에서, 그 ‘소수자’ 아이들은 백인을 표준으로 그리는 어린이책을 보며 자라야 했던 것이다.
엄마가 미얀마 출신인 에마 맥윌리엄스가 ‘아시안/동아시안’ 책꽂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콜롬비아에서 입양된 여동생을 둔 셸비 캔트럴이 콜롬비아 관련된 책을 찾아보고 있는 모습.
월즈 오브 워즈는 이렇듯 좁은 시야만 제공받아온 미국 어린이들에게 더 넓고 다양한 ‘세계’를 보게 해주기 위해 설립된 도서관이다. 미국 안에서 출간됐지만 ‘미국 밖’을 보여주는, 다양한 인종적·문화적 정체성들을 담고 있는 책들을 모아 4만여권의 장서를 확보했다. 출판사, 학계, 아리조나대가 위치한 투손 지역의 학교들 등을 연결해 ‘다양성’에 초점을 두고 추천도서 선정, 수업, 전시,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 애리조나대가 위치한 투손은 멕시코 국경에서 가까워, 이주민이나 난민들이 특히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같은 날 오전, 이번에는 투손 시내 샘 휴스 초등학교 2학년 학생 20여명이 교사의 인솔 아래 월즈 오브 워즈를 찾았다. 월즈 오브 워즈에 전시 중인 그림책 <페이퍼 선>을 배우는 수업이다. 이 그림책은 19세기 말 중국인 소년이 중국인 이민을 금지했던 ‘중국인배척법’(1882년 발효) 시기 미국 이민을 위해 ‘가짜 아들’ 행세를 해야 했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이들은 조를 나누어 그림책 원화를 보며 감상을 적고, 생소한 한자를 배워보고, 그림책 주인공처럼 시험 대비를 해보는 등 분주했다. 주인공이 가짜 아들로 행세하기 위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들키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이게 다 금광 때문(캘리포니아 금광 발견으로 중국인 이민자가 폭증했다)이에요” 말하는 등 아이들은 책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한편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공감을 표시했다. “지금도 주인공 같은 사람이 있을까”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학생 중 한 명인 노라는 “이 책을 쓰고 그린 사람들의 아버지가 ‘가짜 아들’이라고 했어요” 대답했다.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월즈 오브 워즈를 찾은 샘 휴스 초등학교 2학년생 노라가 <페이퍼 선> 수업을 들으며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의 설립자이자 디렉터 캐시 쇼트 애리조나대 교수는 “미국에선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 그러니까 다양성이 공동체 형성의 핵심 조건이지만, 인종 중심으로 형성된 위계질서가 낳은 억압과 차별도 있다. 문학은 그것에 도전하는 데 큰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건조한 정보만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문학은 감정적인 경험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타인과 공감하고 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길을 틔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문학이 특히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 쇼트 교수는 “연결성”이라고 답했다. “이미 많은 경험을 한 어른과 달리, 어린이는 문학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손쉽게 이동하고 그것을 자신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어린이·청소년 고유의 경험을 담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지요.” 오롯이 그들을 위해 쓰여지고 그려진 다양한 책들을 만날수록, 아이들은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경험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근대 어린이청소년문학은 애초 유럽에서 발원했지만,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고 해도 좋을 만큼 미국은 도서관을 중심으로 어린이와 책의 가치를 강조하는 문화적 전통과 이를 뒷받침하는 거대한 시장을 만들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어린이문학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뉴베리’·‘콜더콧’ 상이 그 대표적 증거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미국 어린이청소년문학이 오랫동안 주류의 편협한 시각만 대변했을 뿐 다양성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지난 10여년간 특히 폭발적으로 제기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투’ 운동,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과도 함께하는 흐름이다. 미약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세력을 키워 주류의 성을 침식했고, 이제 미국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도 다양성이 핵심적인 가치가 된 것이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학 어린이책협동센터(CCBC·Cooperative Children’s Book Center)가 집계하는 ‘다양성 지표’를 보면, 1985년 미국에서 출간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전체 어린이책 2500권 가운데 흑인 저자가 쓴 것은 단 18권에 불과했다. 어린이책협동센터는 1994년 다양성 지표의 카테고리를 ‘흑인’, ‘원주민’, ‘아시안/태평양’, ‘라틴계’ 등으로 넓혔고, 2018년에는 다시 이를 ‘흑인’, ‘원주민’, ‘아시안’, ‘라틴계’, ‘태평양 섬’, ‘아랍’ 등으로 확대했다. 2021년 지표를 보면, 전체 3427권 가운데 ‘흑인’ 카테고리(흑인 저자가 썼거나 흑인 경험을 다루거나) 책들은 767권, ‘원주민’은 134권, ‘아시안’은 861권, ‘라틴계’는 572권, ‘태평양 섬’은 15권, ‘아랍’은 46권에 이른다. 11월4일 어린이책협동센터에서 <한겨레>와 만난 이곳 디렉터 테사 마이클슨 슈미트는 “우리의 작업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고 그것이 제대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단지 현실을 충실히 관찰하고 반영하는 작업을 했을 뿐인데, “책으로 비춰진 (획일적인) 미국 사회와 실제 (다양한) 미국 사회 사이의 괴리가 워낙 큰 나머지 ‘공적 대화’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현재 다양성 지표는 미국 사회의 특성상 인종·문화적 배경을 주된 카테고리로 삼고 있지만, 장애, 젠더(LGBTQ+) 등도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다.
월즈 오브 워즈에서 열고 있는 <페이퍼 선> 전시회를 찾은 샘 휴스 초등학교 2학년들.
가장 권위 있는 상에서도 변화가 뚜렷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어린이청소년문학 잡지 <혼북> 2022년 5·6월호는 올해 제정 100년을 맞은 뉴베리상의 역사를 특집으로 다뤘는데, 차분하고 냉정한 성찰이 담겼다. 편집자 캐슬린 호닝은 “<인류 이야기>(뉴베리 메달 1회 수상작) 같은 책이 조용히 낮은 층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은 조금도 괴롭지 않다. 그보다 최근 몇 년 사이 나온 훌륭한 뉴베리 아너 수상작들에 더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썼다. 시대와 인식의 변화에 따라, 백인·남성 중심으로 쓰여진 과거 수상작들 가운데 상당수는 더 이상 어린이들에게 읽어보라 추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계 작가 린다 수 박이 분석한 내용을 보면, 1982~2001년 20년 동안 뉴베리 메달 수상작가 20명 가운데 백인은 19명, 흑인은 1명이었다. 그러나 2002~2021년 백인은 12명으로 줄어든 대신 흑인(2명), 라틴(2명), 아시안(4명) 등이 늘었다. 특히 어린이청소년문학에 다양한 정체성들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에겐 다양한 책이 필요해’(We Need Diverse Books) 운동이 시작된 2015년 이후 수상자 8명만 보면, 백인은 단 1명에 그친다.
가장 뛰어난 그림책에 주어지는 콜더콧상은 뉴베리상보다 더욱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는데, 지난 10년 동안 수상자 10명 가운데 8명이 유색인종에 속했다. 콜더콧상 심사위원회에 참여한 바 있는 쇼트 교수는 “심사위원회는 8명의 선출직과 7명의 임명직으로 이뤄지는데, 과거에는 거의 모든 심사위원이 미국 중서부 출신·백인·중산층·기독교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도서관협회가 나서서 위원회 구성을 다양하게 조정하자, 위원회가 다루는 ‘우수함’에 대한 기준도 새로워진 것”이라 지적했다.
미국 매디슨-위스콘신대 ‘어린이책협동센터’(CCBC)의 2018년 다양성 지표를 토대로 만든 일러스트. 각각의 인종적·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거울’의 크기를 통해 불평등한 현실을 짚고 있다. 누리집 갈무리
미국의 대표적인 어린이청소년문학 잡지 <혼북>의 다양성에 관한 자료.
이처럼 미국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 다양성이란 가치는 결코 손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다양한 소수자들의 투쟁에, 아이들에게 자신을 제대로 비춰 볼 ‘거울’과 더 큰 세상을 만나게 해줄 ‘창문’을 함께 쥐어주고자 하는 노력이 함께 더해진 결과다. 그만큼 ‘백래시’도 만만찮다. 최근 미국 교육계에서 부각되는 가장 큰 문제는 ‘지적 자유’ 침해, 다른 말로는 ‘검열’(challenge)이다. 다양한 관점을 담은 책들이 늘어나자, 주류 가치를 신봉하는 학부모 중심으로 학교나 도서관을 상대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이런 책들을 읽히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주로 성·젠더, 인종에 대한 내용을 문제삼아, ‘금지도서’ 목록을 만들어 공유하고 교육구·학교나 도서관에 요구하는 식이다. 미국도서관협회의 집계를 보면, 2021년 한해 동안 ‘금지도서’ 지정 시도는 729건 있었으며 전체 1597권의 책들을 목표로 삼았다. 올해 들어선 8월까지 전체 1651권을 ‘금서’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681건 있었다. 이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해주는 등 일방적인 교훈을 담은 어린이책 ‘브레이브 북스’(Brave Books) 시리즈를 만들고, 이를 ‘좋은 책’이라며 읽히는 운동도 편다.
바네사 브랜틀리-뉴턴이 그린 ‘우리는 다양한 책들이 필요해’ 일러스트. 누리집 갈무리
그러나 ‘백래시’를 이끌고 있는 생각이 실상 어린이와도, 문학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쇼트 교수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어린이는 보호 받아야 할 존재라기보다 “어른과 아무런 차이 없이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문학은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 세상으로 당신을 초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 자신만의 관점을 형성하는 것은 나와는 다른 다양한 관점들을 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미국 어린이청소년문학은 어린이를 존중하는 데에서 오랜 차별과 배제를 넘어설 길을 발견했으며, 과거에 대한 냉정한 성찰과 반성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다양성의 가치를 더욱 굳건하게 다져가고 있다.
투손, 매디슨/글·사진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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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어린이청소년 문학의 명작들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
1977년 뉴베리 메달 수상작. 작가 밀드레드 테일러는 흑인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뉴베리상을 받았다. 199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 현실을 정면으로 다룬 이야기책.
사금파리 한 조각
한국계 작가 린다 수 박의 2002년 뉴베리 메달 수상작. 12세기 고려시대 도자기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자신의 꿈을 향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안녕하세요, 하느님? 저 마거릿이에요
미국의 인기 청소년 문학 작가로 꼽히는 주디 블룸의 1970년 데뷔작. 초등학교 6학년생 마거릿이 부모 대신 하느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춘기 소녀의 모든 이야기.
인어를 믿나요?
2019년 볼로냐 라가치 ‘오페라프리마’ 부문 대상 등을 받은 그림책. 인어에게 매료되어 인어가 되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개성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전한다.
엘 데포
그래픽 노블로는 처음으로 2015년 뉴베리상(아너)을 받은 작품. 4살 때 청력을 잃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특수 보청기를 사용하는 주인공을 통해 ‘다름’이 ‘놀라운 것’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억 전달자
공상과학(SF) 소설의 명작으로도 꼽히는 1994년 뉴베리 메달 수상작. 모든 것이 획일적으로 통제되는 세상에서, 12살 조너스는 이전 세대의 모든 기억을 전달받아 보유하는 ‘기억보유자’가 된다.
투손, 매디슨/글·사진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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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3회 ‘낙관 너머 현실 ’이 나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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