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스톡홀름 중심가에 위치한 10~13살 전용 도서관 ‘티오트레톤’. 빽빽한 책상 대신 아이들이 편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마련해 책과 멀어지기 쉬운 이 시기 아이들의 도서관 유입을 늘렸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오후 2시(평일) 이후에는 어른 입장 금지이기 때문에 사서들이 아이들 대신 포즈를 취했다. 김은형 기자
지난 10월25일(현지시각) 스톡홀름 세르겔 광장에 위치한 어린이도서관을 찾았다. 세르겔 광장은 옆으로 스톡홀름 고급 백화점과 쇼핑가 등이 위치한 중심가로 스웨덴 도서관은 모두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금싸라기 땅마다 공공도서관이 위치해있는 것이다. 극장, 식당, 쇼핑센터와 함께 현대식 건물에 입주해 있는 도서관은 6개로 이 가운데 3개가 각각 0~9살, 10~13살, 14~25살로 이용 연령을 나눠 운영되고 있었다. 10~13살만을 대상으로 만든 ‘티오트레톤’은 어린아이들과 한데 엮이고 싶어 하지 않고 책과 급속도로 멀어지는 이 나이대의 특수성을 감안해 2011년 개관했다. 탁 트인 광장이 환하게 보이는 이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서관의 모습과 다르다. 책상은 몇개 없고 누워서 빈둥댈 수 있는 커다란 소파와 아이 혼자 있을 수 있는 놀이터 같은 구조물, 한쪽엔 커다란 주방도 있다. 다른 한쪽에 가장 예쁘게 꾸며진 방에는 온통 일본 만화책뿐이다. 도서관인지 휴식 공간인지 놀이 공간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지난 10월(현지시각) 티오트레톤에 설치한 인공지능 사서. 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은 이 나이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설치했는데 실제로 높은 이용률을 보이면서 아이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김은형 기자
사서 아만다 스텐베리는 “이곳에서는 소란을 피우거나 친구를 괴롭히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휴대전화 게임을 해도 좋고 잠을 자도 좋다. 주방에서 음식을 해 먹으며 수다를 떨 수 있고, 종종 ‘가라오케’ 파티와 댄스 수업도 한다. 책을 읽어야 할 의무도 없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한다는 기준도 없다”고 말한다. 또 이곳은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주는 상주 직원 둘을 제외하면 어른 출입 금지다. 수업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인솔해온 교사도 예외가 아니다. “어른이 아이와 도서관에 함께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책을 골라주고 독서를 강요하게 되는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스텐베리의 설명이다. 지난 10월에는 직원을 불편해하거나 말 꺼내기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람 얼굴을 한 인공지공 사서까지 도입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14~25살을 대상으로 한 ‘라바’에는 서가뿐 아니라 그림이나 미술 작업을 할 수 있는 아틀리에와 재봉틀, 각종 악기들, 미니 스튜디오처럼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까지 세심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 나이에 가장 중요한 진로 탐색을 위한 여러 가지 체험 시설과 도구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전시되어 있는 값비싼 악기들은 도서관 이용자라면 누구나 대여할 수 있다는 게 사서의 설명이다. 9살 이하 이용자를 위한 ‘룸 포 반스’는 육아 휴직 중인 ‘라테파파’들이 즐겨 찾는 곳 중에 하나다.
14~25살 이용자들을 위한 전용 도서관 ‘라바’. 진로 탐색이 중요한 이 시기에 맞게 미술 작업, 사진, 악기, 설계, 옷 만들기 등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설과 도구들을 비치해놓았다. 김은형 기자
스톡홀름에서 열차로 한시간 정도 가는 남부 공업도시 쇠데르텔리에 도서관장인 헬레나 고메르는 티오트레톤을 디자인했고 이곳에 부임하면서 같은 성격의 도서관 ‘1014’를 만들었다. 티오트레톤보다 작은 규모지만 소파와 책상, 아이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쿠션과 담요까지 비치돼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1014는 인기 일본 만화 캐릭터와 성소수자 운동을 상징하는 작은 깃발들로 장식돼 있었다. 어린이책에 엘지비티(LGBT)는 물론 ‘젠더 뉴트럴’(젠더를 아예 구분하지 않는 것)까지 등장하는 북유럽의 다양성과 포용성 문화를 보여주는 풍경이다.
도서관에서 만난 고메르는 “책은 나중에 읽어도 좋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면서 문턱을 낮춰 도서관이 편해지면 언젠가는 책을 읽거나 빌려 가기 시작한다”면서 “이른바 양서라는 것도 구분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조언할 수 있지만 무엇을 할지, 어떤 책을 볼지 판단은 아이들이 한다”고 말했다. 이곳도 티오트레톤처럼 어른들이 읽히고 싶은 고전보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르소설과 만화책이 많았다. 만화든 소설이든 한번에 50권까지 4주 동안 빌릴 수 있고, 4주 더 연장이 된다.
스웨덴어와 영어, 아랍어로 쓰인 그림책. 스웨덴어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이다. 김은형 기자
쇠데르텔리에는 2015년 대거 유입된 시리아 난민 등 이주민이 절반을 차지하는 도시다. 어떤 동네는 90% 이상이 이주민인 곳도 있다. 그래서 아이와 어른을 막론하고 스웨덴어 문해력이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다. 고메르 관장은 “아동도서는 어른들이 문해력을 갖추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도서관 어린이책 코너에는 아랍어와 영어, 스웨덴어 등 3개 국어로 쓰인 그림책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주민들이 아이와 함께 도서관을 찾아 쉬운 단어로 쓰인 어린이책을 함께 보면서 문해력을 갖추고 스웨덴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10~14살 이용자만을 위한 쇠데르텔리에의 도서관 ‘1014’에서 포즈를 취한 헬레나 고메르 관장. 김은형 기자
이 밖에도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책을 읽히고자 하는 시 쪽의 노력은 치열하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이동식 도서관인 북버스가 주기적으로 동네를 다니고 커다란 상자에 책을 실은 북사이클도 수영장이나 운동회, 동네 축제 등을 수시로 찾아다닌다. 아이들이 운동하는 체육관 탈의실에 서고를 설치하는 ‘보관소(cloakroom) 도서관’도 최근 시작했다. “형이나 언니가 운동할 동안 기다리면서 동생과 보호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분실되는 책이 많을 것 같은데 문제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고메르 관장은 ”누군가 보기 위해 가져가는 책이 분실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쇠데르텔리에 시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북사이클. 책을 싣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찾아가서 책을 읽도록 독려하고 책을 빌려준다. 김은형 기자
이밖에도 중고제품 가게처럼 도서관에서 헌 옷을 바꿔갈 수 갈 수 있도록 하거나 공구를 빌려주기도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인형을 도서관에서 하루 재운 뒤 밤에 벌어지는 일을 사서가 동화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등 끊임없이 문턱을 낮추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 알마로 상징되는 양질의 콘텐츠 육성이 스웨덴 아동문학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이처럼 아이들이 책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독려하는 도서관 정책인 셈이다. 고메르 관장은 “도서관은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토박이거나 이주민이거나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곳이다. 아이든 이주민이든 책을 읽고 문해력을 갖추면서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의 시민권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게 도서관의 존재 의미”라고 말했다.
스톡홀름, 쇠데르텔리에/김은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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