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조 성소수자 보이그룹 라이오네시스는 최근 <문화방송>(MBC) 심의팀으로부터 ‘동성애’라는 세 글자 설명만 듣고 신곡 ‘이츠 오케이 투 비 미’(It’s OK to be me) 방송 금지 판정을 받았다. 뮤직비디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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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조 성소수자 보이그룹 라이오네시스가 <문화방송>(MBC)으로부터 신곡 ‘이츠 오케이 투 비 미’(It’s OK to be me)의 방송 금지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린 건 지난 17일이었다. 라이오네시스가 입장문에 첨부한 문화방송 심의팀 공문엔 방송 불가 사유로 ‘동성애’ 세 글자만 덜렁 적혀 있었다. 라이오네시스는 “심의 심사 결과가 ‘자신을 긍정하자’는 뼈대의 메시지, 혹은 가수가 동성애자라는 사유에 의한 것이라면, 아쉽게도 저희로서는 엠비시의 심의 규정을 준수한 음악을 제작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재심의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구체적인 사유도 밝히지 않고 그저 ‘동성애’ 세 글자만 적어두면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멤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문제라는 건가, 아니면 가사에 동성애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건가. 문화방송 신규 예능 프로그램 <혓바닥 종합격투기 세치혀>에는 트랜스여성 방송인 풍자가 출연하고 있다. 당장 ‘이츠 오케이 투 비 미’의 방송 금지 판정 소식이 들려온 바로 다음날인 12월18일에는, 풍자가 어렵게 커밍아웃을 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는 내용이 예고편으로 나간 상태였다. 성소수자가 성소수자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예능에서는 가능한데 노래로는 불가능하다는 건가? 나는 심의 결과의 시대착오성도 당황스러웠지만, 그 일관성 없음 또한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다행히도 외신을 비롯한 언론 매체에서 이 사안을 다루고 세계 각지의 팬들이 항의 메시지를 보낸 끝에 문화방송의 결정은 번복되었다. 라이오네시스가 20일 새롭게 올린 입장문은 “이번 심의 심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로 인해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에 관해 직접 사과의 말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별도의 재심의 요청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심의 심사 과정을 다시 진행해 ‘방송 적합’ 판정으로 심의 결과가 정정되었고, 다시 한번 심의 심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받았다는 소식도 전했다.
물론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지만,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빠르게 정정하며 사과한 문화방송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아티스트들에게 직접 사과의 말을 전했다는 것도 바람직하거니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는 것은 더더욱 기대할 만하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성소수자의 삶을 다루는 노래들이 방송 심의를 받을 때 이번 사례가 하나의 확고한 기준점이 될 것이라는 의미 아닌가. 시끌벅적한 과정을 거친 탓에, 새로운 기준점이 정해지는 과정이 만천하에 공개된 셈이니까.
다행인 건 다행인 거고 찜찜함은 여전히 남는다. 풍자는 가능한데 라이오네시스의 ‘이츠 오케이 투 비 미’는 안 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츠 오케이 투 비 미’의 가사는 남성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인 게이 클럽에 모여 ‘남들 비위 안 맞추고 나 자신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며 자신을 긍정하는 내용이다. “이츠 오케이 투 비 미”와 “안 맞춰 비위”라는 다짐이 반복되는 후렴구를 지나면, 메인보컬 이말랑이 부르는 1절이 시작된다. “비로소 내가 나로 사는 곳, 자정의 게이 클럽은 마이 홈. 난 낮에 지고 밤에 피는 꽃.”
가사에서 ‘동성애’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목이라 할 만한 구석은, 이말랑의 파트를 포함해 모두 네 군데가 있다. 나머지 세 파트는 팀의 리더이자 래퍼인 담준의 파트다. “난 또 게이도 1인분 이상인 걸 증명”, “난 늘 스트레이트(이성애자를 지칭하는 은어)보다 베터”, “난 태초부터 게이로 설계됐어. 내 주께서 정했어.” 이 네 군데를 제외하고 나면 곡에서 특별히 ‘동성애’성이라 할 만한 게 전면으로 드러난 대목은 없다. 눈치 빠른 이라면 “여섯 빛의 네온”이나 “비 온 뒤 저 무지개” 같은 대목의 은유를 읽어내겠지만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한국의 미디어는 성소수자 이슈를 다룰 때에 그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에 주목했다. 정체성 혼란으로 번뇌했던 사춘기, 이성애자 중심 사회에서 배척당하면서 겪었던 슬픔과 어려움 같은 것이 중심 소재였다. 설령 그것이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알리겠다는 선의에서 비롯된 접근이라 해도, 은연중에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한 동료 시민’을 향한 연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불쌍한 성소수자를 돕자’는 시혜적인 시선으로 대체해온 측면도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반면 ‘이츠 오케이 투 비 미’는 자신을 받아달라고 이성애자 중심 사회에 읍소하지 않고, 자신은 왜 남들과는 다를까 하는 고민으로 울지 않는 노래다. 오히려 곡의 화자는 자신이 이성애자보다 낫다고, 자신이 게이인 것은 날 때부터 신이 정해준 특성이라고 자신을 긍정하며 더는 남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런 태도는 일찍이 한국 미디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츠 오케이 투 비 미’가 기존의 미디어에 노출된 다른 성소수자 서사와 다른 점이라면 이것이 유일하다. 어쩌면 심의팀은 이 당당한 태도에 당황했던 게 아니었을까?
언제나 불쌍하게 여겼던 존재들이 등뼈를 곧게 세우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제 권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때론 반감을 품는다. 마치 장애인의 인간 승리 서사에는 환호하던 사람들도, 지체장애인들이 장애인 권리 예산 증원을 요구하며 지하철 승차 투쟁을 벌이면 눈살을 찌푸리는 것처럼 말이다. 상대를 대등한 권리를 지닌 존재로 바라보는 연습이 덜 되어 있는 한, 이런 파열음은 계속해서 날 수밖에 없다.
그런 거라면, 스스로 돌아봐야 할 건 문화방송 심의팀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비록 ‘이츠 오케이 투 비 미’를 둘러싼 논쟁은 문화방송 심의팀에서 촉발되었지만, 그 뒤엔 ‘한국 사회가 소수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더 큰 질문이 숨어 있는 것일 테니까. 배척과 멸시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시혜의 시선 또한 교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소수자들을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교정’이란 숙제는 비단 문화방송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