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님이 이름에 ‘이응’ 들어간 애들은 살이 끼니까 피하라고 했어, 안 했어?” 엄마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온 고등학생 딸을 매섭게 다그친다. 부정한 기운을 막는다며 굵은소금을 딸의 몸에 세차게 뿌리기도 한다. 보살(무당)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의식한 딸은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딸의 폭력적 성향이 아니라, 이름에 ‘이응 들어간 애’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엄마의 무속적 확신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한국사회의 단면을 풍자하는 듯하다.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복수에 나서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인데, 현실감이 차고 넘친다.
학교폭력은 친구들끼리 때리고 맞을 수도 있는 추억이 아니다. 부모의 직업과 재력, 인맥이 가해자의 폭력을 성장통으로 미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모와 교사, 경찰의 도움을 받지 못한 피해자에게 학교폭력은 현재진행형의 끔찍한 범죄 행위이다. 하지만 박연진(신예은/임지연)은 학교폭력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피해자 문동은(정지소/송혜교)을 조롱한다. 가난 때문에 합의금을 외면하기 어려운 처지를 악용하면서 “가족이 제일 큰 가해자인데, 왜들 딴 데 와서 따질까?”라며 비꼬기까지 한다. 교사와 경찰 또한 돈에 매수되어 피해자 문동은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해자 박연진의 범죄 행위를 호도한다. 드라마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학교폭력의 실상을 환기하는 장면들이다.
가해자 박연진은 학교 체육관을 ‘폭력의 놀이터’ 정도로 여긴다.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자퇴하면,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체육관으로 불러들여 ‘놀이’를 즐긴다.
어머니의 돈에서 비롯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폭력이었다. 가해자 박연진은 재력가의 딸이기에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도 없다. 꿈은 그저 가난한 자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꿈을 이룬 이들을 돈 주고 부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필요한 것은 꿈이 아니라 “적당히 안 짜치는 그런 직업”이다. 돈 주고 사람 부리며 재산을 축적해온 어머니가 딸을 사회적 괴물로 만든 것이나 진배없다. 여기에 남편의 재력까지 더해지면서 가난한 자들을 경멸하는 안하무인의 비열함이 심화한 꼴이다.
박연진은 과거 학교폭력 가해 사실이 드러나도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문동은한테 어떻게 했지? 심했나?”라는 궁금증이 “따를 시킬 것이 아니라, 그때 그냥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라는 살의로 전이되면서 남편과 딸에게 감추고 있던, 사악하고 비열한 박연진의 본성이 폭로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사회적 괴물’ 박연진은 그가 저지른 학교폭력을 “이미 지난 일을 이제와서 뭐 어떡”하냐며 아무렇지 않은 일로 치부한다. 하지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죽음까지 생각했던 ‘사회적 약자’ 문동은은 죽어서도 떨칠 수 없는 모멸감과 공포심에 몸서리친다. 복수심을 다잡으며 긴장감을 감추려 해도, 생명을 위협하는 가해자의 공갈과 협박 앞에서는 쉽지 않다. 문동은이 박연진의 사회적 죽음을 계획한 까닭이다.
박연진이 그랬던 것처럼,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집에 산다는 이유로 가난한 친구를 괴롭히는 학교폭력이 끊이지 않는다. 학교 교육을 기득권 유지나 신분 상승의 도구로 여기는 사회적 풍토에서 비롯한 문제다. 자식이 저지르는 학교폭력을 성장기의 치기 어린 행위 정도로 간주하는 무책임한 부모 탓이 크다. 박연진 같은 사회적 괴물을 용인하는 자들 모두가 학교폭력의 가해자이다. 학교폭력은 청소년기의 성장통이 아니며, 놀이도 아니다. 피해자 문동은의 복수극으로 대리만족하는 지금 순간에도, 공권력의 사각지대에서 학교폭력으로 고통받는 청소년이 있다. 학교폭력이 청소년의 영혼과 육체를 “존엄이라고는 없는 폐허”로 만드는,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 행위라는 사회적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