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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 중요해 마음이 중요해?

등록 2023-03-03 19:00수정 2023-03-03 22:27

[한겨레S] 주일우의 뒹굴뒹굴
제사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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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댁까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은 멀었다. 기차를 타고 대여섯시간을 가서 망건을 쓰고 절을 했다. 자정이라는 시간, 똬리 모양을 하고 하늘로 오르는 향, 말없이 기침으로 주고받는 신호들 속에서 얼굴도 모르는 증조할아버지를 생각했다.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가 고생이 심하셨다는데. 할아버지는 그래도 아버지가 그리워, 진짜로 움막 짓고 3년상을 치렀다는 전설이 있었다. 엎드려 증조할아버지가 음식을 드실 짬을 드릴 때, 뭔가를 빌었다. 공부 안 했지만 시험 잘 보게 해주면 좋겠다는 정도의 시시껄렁한 소망들. 진짜로 귀신이 있다면 괘씸하다고 벌을 내릴지도 모를 망상들.

할아버지는 늘 엄했지만 손자에겐 다정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사를 모실 때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멋지게 기른 수염을 잡는 것도 허락하셨던 양반이니, 시답잖은 바람도 들어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의 형식은 조금씩 허물어졌다. 망건 쓰고 삼베옷 차려입었는데 이젠 깨끗한 옷만 입으면 문제가 없다. 제사 시간도 자정에서 저녁 무렵으로 조정이 되었고 제수도 간편해졌다. 한문을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해서 지방도 한글로 모신다. 생전의 기억을 돌아다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니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제사를 물려받았다. 그 과정에서 고민했던 것은 준비에 부담은 줄이면서 제사 지내는 의미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였다. 찬과 과일의 가짓수를 줄이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하룻저녁 먹을 양으로 줄였다. 모든 형식을 다 지우지 못하는 것은 뜻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각자 집에서 사랑했던 이들을 추념할 수도 있겠지만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는 일에 따라 어울려 사는 집단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족들이라도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 간소하게라도 음식을 준비하고, 바빠도 지우기 어려운 약속을 만들어놓는 것은 형식으로 내용을 지켜보려는 생각 때문이다.

<제사를 부탁해 >의 주인공, 제사상 코디네이터 권수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상 차려놓고 상 주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게 제사지. 별거 없어.” 제사란 그런 것이다. 결국은 마음이 으뜸이고 형식은 거들 뿐. 물론, 제사상 코디네이터에게 제사를 맡기는 세태를 생각하면 마음이 으뜸이라는 말이 공허하다. 권수현은 진심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상을 차린다. 제사상의 주인이 좋아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서 제사상에 올린다. 종교적인 이유를 대면서 절마저 코디네이터에게 시키는 집에선 귀신이 닿은 음식도 꺼린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코디네이터가 먹어야 하는 경우도 제법 된다. 뜻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을지도 모른다. 한없이 가벼워진 형식은 훅 불면 날아갈지도 모른다.

권수현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친구, 박정서의 1주기 제사상을 차린다. 친구가 좋아했던 것들로 상을 차려주고 싶은데, 실없는 거짓말로 현실을 덮던 친구라 그가 좋아하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분간하기 힘들다. 떠난 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준비를 하는 마음이 제사를 지내는 마음이다. 친구의 딸과 친구가 좋아하던 아이돌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좋아했던 것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것이 무엇일까 엄청 궁금한데, 거기서 소설이 끝나고 만화가 시작된다. 만화 속 주인공은 박정서의 유령. 자신의 뜻을 헤아려보려는 친구와 딸의 이야기를 듣는다. 제사는 우리와 우리의 기억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

만화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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