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인공지능이 만든 단편영화. ‘안전지대’. 유튜브 갈무리
지난달 10일 서울 삼성동에서 열린 ‘인공지능(AI) 그리고 사람’ 강연에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생성형 인공지능 ‘챗지피티’(ChatGPT)가 작성한 이른바 ‘막장 드라마’ 대본을 공개했다. 그가 챗지피티한테 제시한 조건은 세가지. ‘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이 있을 것’ ‘주인공이 죽을병에 걸릴 것’ ‘삼각관계가 나올 것’. 그렇게 해서 나온 대략 30장 분량의 드라마를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 지선은 미국에서 사업하던 아빠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지선은 아빠가 남긴 편지를 읽던 중에 자신이 입양됐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충격을 받고 쓰러져 입원하고 검사 도중 암이 발견된다. 현실이 괴로운 지선은 막 살기로 결심하고 친한 친구들의 남자친구를 뺏기 시작한다.’
인식형 인공지능이 존재하는 것을 식별해내는 역할을 했다면, 생성형 인공지능은 자료를 토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 생성형 인공지능이 대중문화 산업의 창작 영역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공지능 작곡가가 등장하는 등, 대중문화 창작 작업에 활용된 시도는 있었지만, 드라마 대본 집필 분야는 다른 영역이었다. 대본은 대사 한줄에도 작가의 개성을 녹여내고, ‘기쁘다’라는 단어도 상황에 따라 정반대 의미로 활용할 수 있기에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봤다. 하지만 기술 개발은 이제 인공지능이 작가를 대신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국외에서는 이미 방송 제작에 활용되고 있다. 미국작가조합(WGA) 작가들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과거 작품을 토대로 생성한 대본 초안을 작가들이 수정하기도 한다. 인공지능으로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국도 등장했다. 인공지능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생성형 인공지능이 대본을 쓴다. 이 대본을 다시 인공지능 음성으로 내보내는 방식이다. 스위스의 한 라디오 방송국도 지난달 27일 인공지능이 제작한 콘텐츠를 하루 동안 ‘시험방송’으로 내보냈다. 지난해 12월 <안전지대> 등 인공지능이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단편영화들도 등장했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실험은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부산의 한 대학에서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인공지능이 생성한 대본으로 인공지능 배우가 연기한 4부작(각 15분) 드라마 <미스터리 에이(A)양>을 제작해 공개한 바 있다. 작가들이 이야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스토리 전문 인공지능 플랫폼, 이른바 ‘인공지능 보조작가’도 등장했다.
지난해 11월 공개된 인공지능이 대본을 쓴 드라마 ‘미스터리 에이(A)양’. 콘진원 제공
실제 작가들의 고민은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2일(현지시각) 미국작가조합 소속 영화·티브이(TV) 작가 1만여명은 넷플릭스, 아마존, 디즈니 등이 소속된 영화제작자동맹과 임금협상 등 단체교섭이 결렬되자 16년 만에 파업에 돌입했다. 작가들의 요구 중 하나는 바로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대본 생성을 막는 안전장치 마련이다. 일본 연예계 종사자들도 지난 8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를 상대로 인공지능이 콘텐츠를 생성할 때 어떤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는지 공개할 의무 등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법 정비와 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담아온 한국 드라마도 최근 형태가 달라지면서 이런 일들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해 오디오 드라마에서 인공지능이 목소리 연기를 하고, 가상 인간 로지는 오티티 티빙 드라마 <내과 박원장>에 특별 출연해 연기도 했다. 오랜 경력의 드라마 작가는 <한겨레>에 “미국 작가들의 파업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영향으로 30분·45분 등 쇼트폼 형태 드라마가 쏟아지고 있는데, 이런 형식이라면 인공지능이 대본을 써도 모를 것 같다”고 말했다. 외주제작사 프로듀서는 “드라마도 기본 공식이 있다. 소설과 달리 그 틀에 맞춰서 멜로, 범죄 등 장르별 키워드를 넣는다면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춘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취재 시간을 줄이는 등 장점도 있겠지만, 결국 보조작가나 인기 없는 작가의 일자리를 빼앗고, 왜곡된 작품이 쏟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를 악용할 경우 작가가 인공지능의 보조작가로 전락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드라마 작가는 “드라마를 돈으로 보고 대본을 아무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케이(K)콘텐츠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인공지능이 대본을 집필하는 일은 사전에 규제해야 한다”고 했다.
남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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