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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만 줘도 웹툰 되고, 채색도 척척…달콤 살벌한 AI

등록 2023-05-15 08:00수정 2023-05-15 15:22

스케치를 선화로, 텍스트를 콘티로
실사 사진도 웹툰으로 바꿔줘
기존작가 화풍 학습해 신작도

보조 수준 넘어 대체 경지 우려
“호기심과 공포감을 동시에 느껴”

“저는 마지막까지 만화를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그리려고 노력했던 작가였습니다. 이런 제가 ‘미드저니’와 ‘노벨에이아이(AI)’라는 그래픽 인공지능을 처음 봤을 때 공포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특정 부분에서는 제 그림 실력보다 좋고,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능가할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공포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걸 절감하고 있습니다.”

<베리타스> <은의 켈베로스> <위버> 등을 그린 19년차 만화가인 김동훈 한국만화가협회 이사가 말했다.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디지털 시대의 웹툰 제작과 기술 포럼’에서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많은 만화인들이 그의 말에 공감을 나타냈다. 권혁주 한국웹툰작가협회장은 “인공지능 기술은 복잡한 작업을 자동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력적이지만, 개인 창작자 입장에서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나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다”며 “웹툰 작가들은 인공지능에 호기심과 공포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대체 어떤 수준이기에 작가들이 이런 토로를 하는 걸까?

네이버웹툰의 ‘웹툰 에이아이(AI) 페인터’. 색을 고르고 원하는 곳에 터치하면 자연스럽게 색을 입혀준다. 네이버웹툰 제공
네이버웹툰의 ‘웹툰 에이아이(AI) 페인터’. 색을 고르고 원하는 곳에 터치하면 자연스럽게 색을 입혀준다. 네이버웹툰 제공

현재 웹툰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기술은 상당한 진척을 이룬 상황이다. 캐릭터와 배경에 자동으로 채색해주는 기술, 밑그림 수준의 스케치를 정교한 선화로 바꿔주는 기술, 텍스트를 그림 콘티로 바꿔주는 기술, 실사 사진을 웹툰으로 바꿔주는 기술, 기존 작가 화풍의 웹툰을 그리는 기술 등이 현실화됐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곳은 네이버웹툰이다. 2019년부터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들어가 2021년 10월 ‘웹툰 에이아이 페인터’ 베타(시험판) 서비스를 내놓았다. 작가가 색을 고르고 원하는 곳에 터치하면 자연스럽게 색을 입혀준다. 이를 활용해 채색한 작품은 누적 72만장(2022년 12월 기준)에 이른다. 아직 작가들이 본격 활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면 이용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유미의 세포들>의 이동건 작가는 “종이 만화 시절 박스 선 긋기나 말풍선 작업이 웹툰에서 간단한 공정이 된 것처럼, 채색도 간단한 작업으로 축소될 것 같다”며 “작업을 줄여줄 기술이 나온다면 사용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네이버웹툰은 사진이나 영상을 실시간으로 웹툰 화풍으로 바꾸는 ‘웹툰미’도 개발 중이다.

국내 인공지능 스타트업 툰스퀘어는 글로 쓴 문장을 만화로 바꿔주는 ‘투닝’을 개발했다.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사람도 스토리만 잘 만들면 웹툰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툰스퀘어는 지난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이를 선보여 관심을 모았다. 툰스퀘어는 <외모지상주의>의 박태준 작가가 대표로 있는 더그림엔터테인먼트(박태준만화회사)와 손잡고 특정 화풍을 적용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국내 인공지능 스타트업 오노마에이아이도 글만 입력하면 웹툰으로 만들어주는 ‘투툰’을 내놓았다.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주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도 선 다듬기, 채색, 배경 그리기 등을 자동으로 해주는 ‘딥툰’을 개발하고 있다. 2024년 완성이 목표다.

업계는 이런 기술들이 작가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웹툰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한 이면에는 작가들의 과도한 노동 문제가 있는데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년 웹툰 작가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하루 평균 창작 시간은 10.5시간, 주 평균 창작 활동 일수는 5.8일이었다. 창작 활동의 어려움으로는 83.6%가 ‘작업·휴식 시간 부족’을, 82.5%가 ‘정신·육체 건강 악화’를 꼽았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 교수는 “웹툰 에이아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작가의 과도한 업무 부담을 줄여줘 새로운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에 집중할 환경을 만들어줄 것”이라며 “몇몇 대형 웹툰 스튜디오가 주요 플랫폼 작품을 거의 독식하는 상황에서 1인 작가가 경쟁하려면 에이아이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네이버웹툰의 ‘웹툰미’는 사진이나 영상을 실시간으로 웹툰 화풍으로 바꿔준다. 네이버웹툰 제공
네이버웹툰의 ‘웹툰미’는 사진이나 영상을 실시간으로 웹툰 화풍으로 바꿔준다. 네이버웹툰 제공

인공지능은 작가를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대체하는 경지를 바라보고 있다. 2020년 3월 <우주소년 아톰>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데즈카 오사무의 신작 <파이돈>이 출간돼 큰 화제를 모았다. 작가 사후 31년 만에 나온 신작은 사실 인공지능과 후배 작가들의 협업으로 나온 것이다. 분량도 짧고 캐릭터와 스토리도 어설픈 걸음마 단계였으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데 의의가 있다. 국내에선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작가와 재담미디어가 손잡고 ‘에이아이 이현세’로 신작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 작가가 44년간 그린 4174권 분량의 만화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그린 신작이 올 하반기에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기대가 커지는 한편 우려 또한 가볍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오히려 소외시키거나 착취하는 구조로 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민 만화문화연구소장은 “도구가 더 높은 생산성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입력하고 기계가 출력한다는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며 “에이아이로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작가를 더욱 착취하는 구조로 가는 것을 경계하고, 인간의 창의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짚었다.

저작권에 대한 우려도 있다. 인공지능이 만든 결과물의 저작권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 또 그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학습한 기존 작품들의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발을 뗀 수준이다. 김종휘 변호사(법무법인 서교)는 “에이아이로 생성된 저작물이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창작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며 “에이아이가 여러 학습 데이터 소스로 만든 저작물의 경우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월 법조계, 인공지능 산업계, 창작자 등이 참여하는 ‘에이아이-저작권법 제도 개선 워킹그룹’을 발족했다. 오는 9월까지 운영하며 ‘저작권 관점에서의 에이아이 산출물 활용 가이드라인’(가칭)을 마련할 계획이다.

툰스퀘어의 ‘투닝’으로 만들어본 이미지. 툰스퀘어 누리집 갈무리
툰스퀘어의 ‘투닝’으로 만들어본 이미지. 툰스퀘어 누리집 갈무리

창작자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기술 교육 등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동훈 한국만화가협회 이사는 “인공지능과 기술 발전에 있어 작가들이 소외당하지 않고 이를 적절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기술 교육에 투자하는 등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며 “웹툰계·과학기술계·정부 간 상설 논의 기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혁주 한국웹툰작가협회장도 “웹툰 작가들은 대부분 유튜브나 온라인 클래스 등을 통해 스스로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며 “교육기관과 산업계가 협력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설계·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신일숙 한국만화가협회장은 “인공지능 기술은 만화의 본질, 좋은 스토리와 그림, 연출의 조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어쩌면 우리 작가들에게 한단계 더 도약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일자리를 뺏을 수도 있다”며 “어차피 올 미래라면 피하지 말고 도전하는 정신으로 고민과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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