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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가 꿈틀거린다, 30년 만에 국제미술장터 열려

등록 2023-07-19 08:00수정 2023-08-31 19:00

울림과 스밈
도쿄 겐다이 아트페어 전시장 들머리 모습. 일본 조각가 오히라 류이치의 대형 설치조형물 ‘회로'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도쿄 겐다이 아트페어 전시장 들머리 모습. 일본 조각가 오히라 류이치의 대형 설치조형물 ‘회로'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명실상부한 미술의 도시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국에 집중호우가 몰아치기 직전인 7~9일 찾은 일본 수도 도쿄는 전시의 열기로 북적였다. 습기를 머금은 여름 더위로 진이 빠졌지만, 시내 미술관과 갤러리, 거리의 공공미술 공간의 관람 분위기는 날씨를 무색하게 했다. 외국 나들이가 드문 건축 거장 안토니오 가우디의 바르셀로나 성 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컬렉션들이 대거 선보인 도쿄 왕궁 근처의 국립근대미술관은 입구는 물론 전시장 내부도 종일 유심히 지켜보는 관객들 대열로 가득했다.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의 수작들을 망라한 대형 회고전이 차려진 우에노 공원의 도쿄도미술관, 현대미술대가들의 작품들을 국어, 산수 등의 8개 교과목으로 재구성한 롯폰기 모리미술관의 ‘세계의 교실‘ 전, 19세기 유럽 인상파로부터 비롯된 추상회화의 전개과정을 살펴본 아티존 미술관의 기획전 등도 대성황이었다.

일본에서 30여년만에 처음으로 대형 국제미술품장터를 연다고 해서 찾아간 도쿄의 외항 요코하마는 도심 거리가 바다를 낀 거대한 전시 회랑의 느낌을 주었다. 요코하마 역전에서 보행교를 건너 미나토미라이라고 불리는 도심재개발 지구로 들어갔다. 닛산자동차그룹의 글로벌 본사 건물을 관통하는 2층 높이의 거대 통행공간을 거쳐 대로를 걸어가니 아트페어 장소인 퍼시피코 요코하마가 보였다. 보행공간을 걷는 내내 눈앞으로는 항만의 물길과 멀리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졌고 도심 안쪽으로는 요코하마 타워와 앙팡맨(호빵맨)박물관, 호텔 등 개성적인 외양을 지닌 현대건축 마천루들과 전시관들이 조형물처럼 들어서 있었다.

행사장은 바다 쪽에 가까워 도심에선 다소 떨어진 곳이고 규모도 서울 코엑스보다는 좀 작은 듯했지만, 일본과 한국, 미국 등 74개 화랑이 참여한 중대형급 국제미술품장터(아트페어)인 ‘도쿄 겐다이(현대)’ 전시장이 차려졌다.

6~9일 열린 도쿄 겐다이는 홍콩, 대만, 싱가포르,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6곳의 장터를 개설해 ‘아트페어 제조기’로 불리는 영국 출신 딜러 매그너스 렌프루가 꾸린 그룹 아트어셈블리의 최신작 장터다. 1992~1995년 열린 일본 국제현대아트페어(니카프) 이후 30여년 만에 열리는 대형 국제아트페어여서 주목을 받았다. 최근 동아시아 대도시들 사이에는 미술시장 허브(거점) 경쟁이 본격화하는 추세다. 지난 1월 싱가포르에서 에스지아트페어가 개막한 것을 시작으로 3월 아시아 최대의 미술품 장터인 홍콩아트바젤이 열린데 이어 지난 5월 대만 타이페이의 당다이 아트페어가 진행됐고 9월에는 서울에서 프리즈+키아프라는 대형 국제미술품 장터가 차려질 예정이다. 한여름 열리는 도쿄 겐다이는 이 경쟁에 도쿄가 끼어들겠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도쿄 겐다이 본전시장에 나온 토야 시게오 작가의 설치작품. 깎아낸 나무 조형물들을 세워 숲을 형상화했다. 노형석 기자
도쿄 겐다이 본전시장에 나온 토야 시게오 작가의 설치작품. 깎아낸 나무 조형물들을 세워 숲을 형상화했다. 노형석 기자

사실 일본은 최근 국제미술품장터를 제대로 벌여본 경험이 없다. 1970~1980년대 엔화를 뿌리며 세계 각지의 명화를 샀던 일본 컬렉터들은 1990년대 이래로 버블 경기의 영향으로 자산가치가 뚝 떨어지면 투자심리가 30여년째 얼어붙은 장기 동결상태였고 화랑들은 국내용 페어를 열여 작품들을 판매하는데 급급했다.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임에도 세계미술시장의 점유율이 2~3%에 불과한 상황이다. 국내 페어는 나이 든 컬렉터와 화상들이 주도하고 젊은이들은 미술관서 전시나 보고 시장에는 관심을 끄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는데, 그런 도식이 깨어졌다. 엠제트(MZ) 세대로 관객도 바뀌었고 작품도 젊고 강렬한 감수성이 느껴졌다.

본 전시에는 74개 화랑이 참여해 작품을 냈는데 구성이 특출했다. 국내외 화랑들이 두루 참여하는 본전시 외에 일본말로 꽃을 뜻하는 하나, 가지를 뜻하는 에다, 씨앗을 뜻하는 타네로 별개의 3개 섹션을 나눴다. 하나는 중견작가 1~2명, 에다는 저명하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대가 1~2명, 타네는 엔에프티(NFT), 영화, 에이알(AR), 브이알(VR) 등 디지털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한 현재진행형의 시각예술형식을 담은 갤러리 작품들을 집중 소개했다. 특히 ‘쓰보미(꽃봉오리)’란 제목으로 만든 일본의 현대여성작가 5명의 특별전은 강렬했다.

정부의 전례 없는 지원도 있었다. 전시장은 보세 구역으로 지정돼 세금 혜택이 주어졌다. 원래는 출품하는 화랑들은 10% 관세를 물어야하지만, 보세 특혜가 적용돼 판매될 경우에만 관세를 물도록 했다. 개막식 날 일본 정부의 실세인 고노 다로 디지털상이 전시장을 널리 둘러본 것은 일본 미술시장 진흥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개막 전인 7월1일부터 3~4일간 일본 관광청 협조를 받아 사진 거장 스기모토 히로시가 만든 가나가와현 오다와리시의 ‘에노우라 기상 관측소'와 건축거장 이소자키 아라타가 디자인한 군마현 ‘하라 미술관 아크', 세토 내해의 나오시마와 데시마 사이를 돌아보는 우량고객(브이아이피) 아트 투어가 진행됐고, 모리 미술관, 국립 미술관 등도 브이아이피에 무료 개방됐다.

규모나 매출은 돋보이지 않았다. 페로탕과 블럼앤포 외엔 세계 굴지의 화랑들이 대부분 빠졌고 슈고 아트, 카이카이 키키 등의 일본 화랑들이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메이저화랑인 도쿄화랑도 가까운 아트바젤 쪽의 관계를 의식한 때문인지 출품하지 않았다. 서구 다국적 회사의 아트페어란 점 때문인지 일본 유력 일간지들도 대부분 소개하지 않았다. 첫날 사람들이 쇄도했으나 둘째 날 이후로는 인파가 줄었고 구매보다는 관람 중심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요즘 페어와 마찬가지로 젊은 엠제트 세대 컬렉터와 관객들이 주류를 차지했다. 기존 일본 화랑업계의 대표 장터인 도쿄 아트페어의 경우 고미술 업체들이 섞여 나이 든 중견 컬렉터와 화상 위주의 시장으로 꾸려져 왔는데, 전혀 다른 트렌디한 현대미술 구성으로 젊은 관객들을 불러모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게 현장을 돌아본 국내 시장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실물경기에 밝은 국내 중견 화상은 말했다. “얼핏 장사가 잘 안되는 것같지만, 페어의 내용과 틀이 확 바뀌었다. 치밀한 준비와 밑그림이 보이고 관의 지원도 붙었다. 아직은 도쿄 아트페어를 위시한 기존 화랑업체 행사와 갈라진 구도지만, 함께 합치거나 바젤 같은 국제자본과 손을 잡게 되면 삽시간에 무서운 저력을 발휘할 공산이 크다.”

일본은 19세기말~20세기초 아시아에서 화랑업체 중심의 근대적인 미술품 거래 시장을 처음 본격적으로 펼치며 조선과 중국의 시장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상파 등 유럽 사조도 19세기 말 처음으로 도입해 근현대미술을 다른 아시아권에 퍼뜨리는데 큰 구실을 했다. 지금 세계 3~4위의 경제대국이고 인구는 우리의 두배가 넘고 미술컬렉터 수는 열배 이상일 것으로 추산한다. 도쿄 겐다이는 버블 붕괴로 현대미술 투자가 수십여년 얼어붙은 기형적인 시장 양상을 이제 벗어나 정상적인 미술대국으로 복귀하겠다는 꿈틀임으로 비친다.

일본 미술 평단을 대표하는 이론가 난조 후미오와 카타오카 마미 모리 미술관장, 다구치 컬렉션 설립자 미와 다구치, 페이스갤러리의 대표 마크 글림처 등이 운영 자문과 후원을 맡은 이 페어는 전시 구성과 참여갤러리 선정, 세제 지원 등에서 치밀한 사전 작업을 하면서 기반을 닦겠다는 의도가 명확해 보였다.

지난해 가을 도쿄의 미술관 박물관 소개 이벤트인 도쿄 아트위크에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 업체인 아트바젤이 협업기관으로 관여한데서 보이듯 서구 미술자본들은 최근 일본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버블 붕괴 뒤 잃어버린 삼십년 동안 가라앉은 일본 컬렉터들의 투자심리만 움직이면 미술도시 도쿄를 최근 파리 못지않은 미술마켓 거점으로 키울 수 있다고 보고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화상과 컬렉터들에 따르면, 도쿄 겐다이가 우선 경쟁할 상대로 겨냥한 곳은 바로 서울이다. 오는 9월초 세계적인 미술품장터 프리즈와 함께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한국화랑협회 주최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의 콘텐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전세계 화랑들한테서 밀려든 신청서를 선별해 120여개 업체를 엄격하게 솎아내는 프리즈와 달리 국내 협회에 소속된 200개 넘는 화랑들이 대부분 출품할 예정인 키아프는 어떻게 전시 전략을 구축할 것인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도쿄 우에노공원 미술관 단지 북쪽의 주택가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에스시에이아이 갤러리의 내부. 지난 8일 찍은 전시장 모습으로, 그날까지 도루 카미야 작가의 색면 트레이싱 작업을 선보였다. 노형석 기자
도쿄 우에노공원 미술관 단지 북쪽의 주택가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에스시에이아이 갤러리의 내부. 지난 8일 찍은 전시장 모습으로, 그날까지 도루 카미야 작가의 색면 트레이싱 작업을 선보였다. 노형석 기자

도쿄/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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