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미샤 마이스키와 협연을 마친 지휘자 장한나. 장한나 누리집 갈무리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 오른다. 30년 전 첼로를 배우던 제자는 지휘봉을 잡고, 스승은 여전히 첼로를 켠다. 장한나(41)와 그의 스승 미샤 마이스키(75)가 오는 9월 서울과 대전, 전주, 경주에서 11년 만에 함께 연주한다. 10살 첼리스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봐 준 마이스키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장한나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1992년 한국 공연을 마치고 대만에 머물던 미샤 마이스키는 장한나의 연주가 담긴 테이프를 받았다. 10살이란 나이를 믿을 수 없는 연주였다. 즉시 “내년 마스터클래스에 오라”는 답변을 보냈다. 이듬해부터 장한나는 마이스키의 ‘유일무이한 제자’가 됐다.
“잘하는 사람은 손으로, 더 잘하는 사람은 머리로, 정말 잘하는 사람은 가슴으로 소리를 낸다.” 11살 때 스승에게 들은 이 말을 장한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후 장한나는 강한 러시아 억양이 밴 영어 발음부터 걸음걸이, 악기를 다루는 자세까지 스승을 닮아갔다. 장한나와 인연을 맺은 거장들이 많지만 ‘진정한 스승’으로 망설이지 않고 마이스키를 꼽는다.
“겨우 열한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한국의 꼬마한테 무한한 애정을 베풀어줬다. 집을 빌려주고 연습실도 마련해줬다.”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우승한 장한나는 “스승 덕분”이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마이스키 역시 장한나를 ‘단 한 명의 제자’라고 말한다. 마이스키는 지난해 서면 인터뷰에서 “한나처럼 빼어난 첼리스트가 연주를 멈춘 건 안타깝지만 그는 훌륭한 지휘자”라며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존경한다”고 했다.
지휘자 정명훈은 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2위에 입상한 피아니스트 출신이다. 유니버설 뮤직 제공
남매가 11년 만에 한 무대에 오른다. 지휘자 정명훈(70)의 피아노에 정경화(75)의 바이올린이 함께하는 듀오 공연. 오는 9월 5일 예술의전당에서다. 정트리오 멤버인 첼리스트 정명화를 대신해 이들과 오래 인연을 맺어온 중국 첼리스트 지안왕(55)이 함께하는 트리오 공연도 있다. 정명훈과 정경화에게도 각각 결정적 순간에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준 거장들이 있다. 정명훈에겐 이탈리아 태생 명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1914~2005)다.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위를 했던 정명훈은 26살이던 1979년 오디션을 거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이끌던 줄리니 문하로 들어간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정명훈에게 줄리니는 “당신은 타고난 지휘자”라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줄리니는 곧 정명훈을 부지휘자로 발탁했다. 어느 날 난해한 곡을 접한 정명훈이 줄리니에게 찾아가 곡 해석에 대한 답을 물었다. “내일 다시 오라”는 답변을 들은 정명훈이 다음날 다시 스승을 찾았지만 줄리니는 답은 들려주지 않았다. “정명훈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라네.” 그날 들은 스승의 이 한 마디가 정명훈에게 평생의 교훈으로 남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게 스승의 가르침이었던 것. 스승이 타계하자 정명훈은 “오직 음악에만 집중했던 정말로 순수한 분”이라고 회고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11년 만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생 정명훈과 듀오 무대에 오른다. 크레디아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겐 3명의 ‘큰 스승’이 있다. 1961년 13살에 만난 미국 줄리아드 음대의 이반 갈라미언 교수는 정경화를 혹독하게 단련했다. 갈라미언은 이츠하크 펄먼, 핑커스 주커만, 김남윤, 강동석 등의 명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낸 ‘바이올리니스트 조련사’로 유명하다. 정체냐 도약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를 이끌어준 스승은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1929~2019)이다.
정경화는 1967년 레벤트리 콩쿠르에서 핑커스 주커만과 공동으로 우승했다. 그런데도 유대계의 강력한 후원을 받은 주커만의 승승장구에 한 발짝 밀려나 있었다. 그런 정경화에게 19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성공적 협연은 연주자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줬다. 프레빈과 여러 음반도 녹음했다. 이후 수많은 거장 지휘자들과 협연하며 정상급 연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정경화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준 스승은 바이올리니스트 조제프 시게티(1892~1973)다. 헝가리 태생의 이 바이올린 대가는 정경화에게 한시를 읽어주는 등 문학과 철학, 미술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이들 외에도 많은 국내 연주자가 후광이 되어 이끌어준 ‘거장’들에게 빚지고 있다. 조수미와 카라얀, 손열음과 네빌 마리너도 그랬다. 1987년 이탈리아에 머물던 조수미(61)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의 비서에게서 오디션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는다. 1년 전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여주인공 질다 역을 맡았던 조수미의 이탈리아 데뷔 무대를 카라얀이 관람했던 것.
카라얀 앞에서 25살 조수미가 부른 노래는 질다의 아리아 ‘그리운 그 이름’ 이었다. “축하하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지? 신이 내린 소리, 신의 선물이지.”
카라얀이 조수미에게 했다는 말이다. 다큐멘터리 <잘츠부르크의 카라얀>을 보면, 카라얀은 조수미에게 “목소리가 물처럼 맑고 투명하다”고 감탄한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상하게 하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는 부르지 말라고도 조언한다. ‘카라얀이 선택한 소프라노’ 조수미는 이후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의 상대역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모차르트 협주곡 21번을 녹음한 지휘자 네빌 마리너. 크레디아 제공
피아니스트 손열음(37)에게 ‘잊을 수 없는 스승’은 지휘자 네빌 마리너(1924~2016)다. 영화 <아마데우스> 음악감독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그 지휘자다. 두 사람은 2016년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의 내한 공연 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협연하면서 처음 만났다. 그가 2위를 했던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했던 그 곡이다. 네빌 마리너는 “당신의 모차르트 연주는 특별하다”며 손열음에게 곧바로 모차르트 협주곡 전곡 녹음을 제안했다. 2개월 뒤에 영국 런던에서 첫 곡으로 21번 협주곡을 녹음했다. 27개에 이르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전부 녹음하려면 갈 길이 멀었다. 그때까지도 이 음반이 이 전설적인 지휘자의 최후 녹음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4개월 뒤 네빌 마리너는 9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손열음은 2018년 전국 순회 공연에 ‘네빌 마리너경을 기리며’란 부제를 달았다.
피아니스트 윤홍천(41)의 도약에 날개를 달아준 거장은 지휘자 로린 마젤(1930~2014)이었다. 독일 하노버음대를 졸업하고 뮌헨에서 거주하던 31살 윤홍천은 2013년 뮌헨 필하모니 상임 지휘자로 부임한 로린 마젤에게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연주가 담긴 음반도 함께였다. 예상했던 대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3개월 뒤엔 공연장으로 로린 마젤을 직접 찾아갔고, 이틀 뒤에 오디션을 볼 수 있었다. 쇼팽의 협주곡 2번 1악장과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1악장을 연주했다.
“다들 화려하게만 연주하려 하는데 자네는 깊이 이해하고 있구만. 자네의 해석이 참 좋네.” 윤홍천의 연주를 직접 들은 로린 마젤의 평가였다. 곧바로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니와 윤홍천의 협연 일정이 잡혔다. 하지만 공연을 4개월 앞두고 마젤은 갑자기 세상을 떴다.
윤홍천은 마젤 대신 지휘봉을 잡은 피에타리 잉키넨(43·현재 KBS 교향악단 음악감독)의 지휘로 뮌헨필과 협연할 수 있었다. ‘마젤이 선택한 피아니스트’로 소개되면서 윤홍천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뉴욕 필 음악감독을 거친 마젤의 선택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율리아 피셔, 힐러리 한도 마젤의 오디션을 통과하면서 정상급 연주자로 등극했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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