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버스 컴퍼니’ 게임의 여성 캐릭터인 이스마엘 소개 그림.
‘림버스 컴퍼니’ 게임 캐릭터 항의
여성 원화가 과거 리트위트 크롤링
남성혐오 내용 있다며 페미 지목
회사, 입사 전 일인데 즉시 해고
2023년 7월의 일이다. 게임제작사 ‘프로젝트 문’이 출시한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 사용자들은 게임 운영상의 문제를 지적하며 프로젝트 문에 항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개중 일부 남성들은 캐릭터 ‘이스마엘’과 ‘싱클레어’의 신규 인격 디자인을 두고 “프로젝트 문이 여성 사용자들만 노린다”는 불만도 함께 토해냈다. 남성 캐릭터인 싱클레어는 가슴이 깊게 파인 상의에 초커 목걸이를 한 차림으로 공개가 된 것에 반해, 여성 캐릭터인 이스마엘은 전신을 감싼 검은 잠수복 차림으로 공개된 것이다. 두 캐릭터 모두 노출도가 비슷하다면 몰라도, 남성 캐릭터는 노출이 있고 여성 캐릭터는 극도로 꽁꽁 감싼 것에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 불만의 근거였다. 사람들의 불만은 무럭무럭 자라 “프로젝트 문 전체가 ‘남성혐오’를 하는 건 아닐까?”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한 여성 게임 원화가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게임 엔딩 크레디트에 닉네임을 공개한 이 원화가의 트위터 계정이, 불법촬영 범죄 규탄 시위 관련 트위트를 인용하거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트위트에 태그가 돼 있었으므로 이 원화가도 래디컬 페미니스트일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해당 계정이 과거에 어떤 글을 썼는지 검색으로 긁어내기 시작했고, 지금은 지워진 과거 글들을 크롤링(특정 사이트의 웹 페이지를 가져와서 필요한 데이터를 추출해 내는 기법)해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리며 해당 여성 원화가를 ‘남성혐오자’로 규정했다.
‘남성혐오’의 증거로 제시된 트위트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한국여성민우회의 넥슨 민우회 사상 검증 반대 해시태그 ‘나는 메갈이다’ 트위트를 리트위트(남이 쓴 글을 재게시하는 것)했던 기록이나 낙태죄 반대 주장을 리트위트한 기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의 유리천장이 가장 단단하다는 트위트를 리트위트한 기록 등이 대부분이다. 개중엔 면도기가 꼭 필요하긴 한 거냐며 남자들에게 그냥 “손톱으로 수염을 뽑아도 되지 않느냐”는 트위트도 있었는데, 이건 생리대가 필수품인지 잘 모르고 “휴지로 막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남자들의 말을 미러링한 트위트였다. 그나마 보기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있을 만한 트위트는 “네가 끔찍하게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자막이 달린 외국 드라마 캡처 화면을 인용해 ‘한국 남자’라고 쓴 트위트였는데, 그마저도 직접 쓴 글이 아니라 리트위트였다.
이미 지워진 과거 트위터 기록들이 무단으로 크롤링된 끝에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일부 남성 사용자들은 해당 원화가의 그림체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 굴곡을 강조하지 않는 특징이 개인의 사상 탓이 아니겠느냐는 지적부터, 안 그래도 미숙한 그림체 때문에 퀄리티가 좋지 않았다면서 경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었다. 일부 사용자는 직접 회사에 찾아가 게임 운영상의 불만과 함께 원화가의 과거 트위트 내역을 문제 삼았다.
결국 프로젝트 문은 대표 김지훈 디렉터 명의로 발표한 공지를 통해 앞으로의 업데이트에는 해당 원화가의 작업물을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며, 해당 원화가와의 계약을 종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 트위트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림버스 컴퍼니’ 제작사인 ‘프로젝트 문’의 김지훈 디렉터가 지난 25일 띄운 공지문. 김 디렉터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지목된 원화가와 근로계약을 종료하겠다고 밝혔다. 림버스 컴퍼니 트위터 갈무리
“(전략) 회사 측에서 모든 직원분에게 누누이 부탁을 드렸던 단 한 가지 당부사항이 있었습니다. 개인이 에스엔에스(SNS)로 어떠한 의견 표출이나 활동을 하더라도 상관은 없으나, 사회적 논란이 생길 여지가 있는 개인 에스엔에스 계정이 회사와 연관될 가능성만큼은 없애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적 논란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만큼 개인 에스엔에스에서의 표현이 회사 전체의 생각으로 여겨질 수 있고, 이로 인해 논란이 발생할 경우 회사 내의 다른 작업자 동료분들 및 회사의 운영에 있어서도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재차 주의를 드렸던 사내 규칙에 대해 위반이 발생한 건이기에, 논란이 된 직원분과의 계약은 종료될 예정입니다. (후략)”
아무리 생각해도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업무와 무관하게 개인으로서 발화한 사회적 발언을 회사가 규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르거니와, 래디컬 페미니즘이 사람을 해고해야 할 만큼 위험하고 극단적인 사상인가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 개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 운영으로 회사 운영에 피해가 갔다 한들 그것이 정규직 직원을 해고해야 할 만큼 중대한 피해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르다. 뭐, 좋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이런저런 것을 다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번 원화가 해고 사건에서 ‘발화의 시점’과 ‘귀책 사유’ 문제만큼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따져보자. 일부 남성 사용자들이 문제 삼고 있는 트위트들이 작성된 시점은 해당 원화가가 아직까지 프로젝트 문에 입사하기 전이었다. 사건이 터진 시점에는 이미 해당 원화가의 트위터 계정에서 삭제된 글이었다. 발화의 시점 자체가 프로젝트 문 사규의 제약을 받기 전이었는데, 과거에 이미 완료된 일을 사후적으로 소급해서 처벌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프로젝트 문 사규가 헌법의 소급입법금지 원칙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상위에 있는 법인가? 몇몇 남성 사용자들은 ‘과거 트위트가 논란이 된 이후에도 사과나 해명이 없었으므로 지금도 같은 입장일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런 추정 자체가 “과거에 지녔던 사상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지 아닌지 증명하라”는 사실상의 사상검증이라는 사실은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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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반사회적 온라인 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에서 활발하게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된 한국방송(KBS) 이아무개 기자조차도 ‘입사 전에 작성한 글들에 대해 입사 후에 징계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해고되지 않았다. 한국방송 내 11개 직능단체와 한국방송 여성회, 한국방송 여기자회, 한 기수 위 선배기자 등이 모두 한목소리로 ‘임용 취소’를 요구했음에도, 한국방송은 이 기자를 해고할 수 없었다. 원칙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일베 기자조차 과거의 글을 문제로 해고되지 않는 마당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논란’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귀책 사유 또한 그렇다. 해당 원화가가 새삼스레 자신이 예전에 썼던 트위트를 꺼내서 제 트위터 계정에 게시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 원화가는 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이 회사와 연관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과거 썼던 트위트들을 이미 삭제한 상태였다. 가만히 있는 해당 원화가의 트위터 계정을 크롤링해서 이미 지워진 트위트들을 새삼스레 끄집어 올린 건 일부 남성 사용자들이었다. 해당 원화가가 게임의 남성 사용자들을 조롱했다거나 자극했다면 또 몰라도, 굳이 가만히 있는 타인의 뒷조사를 한 다음 과거 발언을 문제 삼은 사람들이 자가발전으로 만든 논란이다.
발화의 시점도 사규의 제약을 받기 전이고, 논란을 본인이 직접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면 원화가에게 무슨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과거와 동일한 트위터 계정과 닉네임을 사용한 잘못? 해당 원화가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2015년부터 자신의 일러스트를 올려왔다. 이미 그 계정 자체가 자신의 포트폴리오인 셈이다. “혹시 누군가 내 트위터 계정을 크롤링해서 과거에 지운 트위트들까지 다 끄집어 올려서 보고는 문제 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수년 동안의 작업물이 저장되어 있는 포트폴리오 계정을 버렸어야 했는가?
혹자는 해당 원화가의 그림체를 문제 삼으며 “개인의 사상을 화풍에 반영한 것이라면, 개인의 사상이 업무에 지장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해당 원화가의 사상과 그림체 사이의 연관 관계는 어디까지나 일부 남성 사용자들의 추측에 불과하며, 그 개연성을 명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 명백하게 행위로 증명된 것이 아닌 추측에 대해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와 비슷한 입장이라면 반갑겠으나, 꼭 그렇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그 입장이 어떠한가와 무관하게, 우리가 이번 사안이 한 정규직 노동자가 사상검증을 강요당한 일, 과거에 완료된 언행이 사규에 의해 소급적용돼 현재의 노동권을 부당하게 침해당한 일이라는 것만큼은 동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1항 소급입법금지 원칙과 제19조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일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당 원화가는 적극적으로 사규를 어기지도 않았고, 먼저 논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입사 전에 완료된 일이 사규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만일 이 사안을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잘린 일’이기에 그냥 넘어가도 되는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침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 언행이 온갖 사규에 소급적용돼 노동권을 침해당하는 시대, 사상검증을 강요당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원화가의 편에 서는 것이야말로 내일의 내가 잠재적으로 겪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막는 길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