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건 월렌이 지난해 5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공연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나는 컨트리 음악을 좋아한다. 이 문장을 보고 동질감을 느낄 독자는 몇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몇 없다. 컨트리 음악은 이를테면 미국의 트로트다. 1920년대 초반 미국 남부 애팔래치아산맥으로 이주한 이민자 음악이 다양한 민족의 음악과 섞이며 탄생한 것이 ‘컨트리’다. 물론 컨트리는 이후 록과 포크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상당히 현대화됐다. 그럼에도 우리가 컨트리라는 말을 듣는 순간 떠올리는 이미지는 하나다. 텍사스 농장 모닥불 앞에서 벤조를 튕기며 나훈아처럼 꺾이는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는 카우보이. 그것이 컨트리다. 생각해 보면 컨트리라는 단어의 의미가 그렇다. 시골 음악. 촌 음악이다.
내가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다. 집에는 올리비아 뉴턴존과 케니 로저스의 엘피가 있었다. 올리비아 뉴턴존은 컨트리풍 팝으로 경력을 시작한 가수다. 어머니는 ‘렛 미 비 데어’(1973)를 종종 틀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당신과 있게 해주세요.” 구성지게 애원하는 이 노래가 너무 좋았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돌리 파튼이었다. 영화 ‘나인 투 파이브’(1980)에 비서로 등장한 돌리 파튼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기가 막혔는데, 그가 실은 컨트리 가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기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에게 “너처럼 예쁜 여자와 달리 나에게는 그밖에 없다”며 애원하는 ‘졸린’(Jolene, 1973)은 아직도 내 스포티파이에서 가장 자주 재생되는 노래다. 세상에는 슬픈 팝송이 많다. 슬픈 컨트리만큼 슬픈 팝송은 없다. 발라드가 아무리 애절해도 트로트의 애절함에는 약간 미치지 못하는 이유와도 비슷할 것이다.
컨트리는 1990년대 이후 빠르게 현대화됐다. 가스 브룩스는 1990년대 전성기를 누리며 컨트리를 메이저로 치켜올린 인물이다. 미국 역사상 비틀스에 이어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이기도 하다. 1991년 내놓은 앨범 ‘로핀 더 윈드’(Ropin’ The Wind)는 마이클 잭슨의 ‘데인저러스’와 당시 열풍을 일으키던 록밴드 너바나의 ‘네버마인드’를 제치고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신은 이 앨범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컨트리는 어디까지나 미국 한정 음악인 탓이다. 미국에서 아무리 인기를 누려도 미국 외 세계는 컨트리를 듣지 않는다. 컨트리로 경력을 시작한 가수들은 더 큰 인기를 위해 컨트리를 벗어던지는 경향도 있다. 세계적 톱스타인 테일러 스위프트도 기타를 든 ‘컨트리 소녀’로 시작해 지금은 그냥 팝 음악을 하는 가수가 됐다. 전통적인 컨트리는 이제 죽은 것인가? 미국에서도 뒷방, 아니 뒷목장 늙은이들이 듣는 흘러간 장르가 된 것인가?
지금 미국에서는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컨트리의 역습이다. 지금 ‘핫 100’이라고 불리는 빌보드 싱글 차트 1, 2, 3위가 모두 컨트리다. 1위는 제이슨 알딘의 ‘트라이 댓 인 어 스몰 타운’(Try That In A Small Town), 2위는 모건 월렌의 ‘라스트 나이트’(Last Night), 3위는 루크 콤스의 ‘패스트 카’(Fast Car)다. 비티에스 정국의 솔로곡 ‘세븐’이 7월 넷째 주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지만 이내 컨트리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세 노래는 팝적인 감각을 가미한 컨트리가 아니다. 전통적인 컨트리다. 3위 ‘패스트 카’는 흑인 여성 포크 가수 트레이시 채프먼이 1988년 내놓은 노래를 다시 부른 것이다. 채프먼의 노래는 무직 남자와 마트에서 일하는 여자가 언젠가 빠른 차를 타고 지금 처지를 벗어나고 싶다고 노래하는 흑인 노동계급 여성의 송가였다. 이걸 백인 남성 컨트리 가수가 부르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컨트리 음악의 주요 소비자는 결국 백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 백인 노동계급이 1980년대 흑인 노동계급이 처했던 현실과 이상한 방식으로 조우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패스트 카’는 백인 컨트리 가수 목소리로 다시 불리는 순간 북부 공업지대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의 송가처럼 들리는 데가 있다.
1위인 제이슨 알딘의 ‘트라이 댓 인 어 스몰 타운’은 더 정치적이다. 알딘은 도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짓을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한번 저질러보라”고 엄포를 놓듯이 노래한다. 뮤직비디오에는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 현장이 삽입됐고 뮤직비디오는 여러 방송 채널에서 금지당했다. 그러자 미국 백인들 사이에서 이 노래를 더욱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의 컨트리 열풍은 오로지 정치적인 이유에서 시작된 것일까?
2019년 8월 미국 뉴욕의 바버숍에서 머리를 깎은 뒤 사진을 찍고 있는 모건 월렌. AP 연합뉴스
그에 대한 질문은 역시 지금 컨트리 최고의 스타 모건 월렌의 이야기로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그의 노래 ‘라스트 나이트’는 이미 14주간 1위를 차지한 올해 최고의 히트곡이다. 딱히 정치적인 노래는 아니다. 술에 취한 남자가 “그게 우리의 마지막 밤이었을 리가 없다”고 징징대는 이별 노래다. 그런데 월렌이 2023년을 대표하는 미국 음악계 최고의 스타가 된 과정에는 대단히 정치적인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2022년 3월2일 소셜미디어에 동영상 하나가 퍼지기 시작했다. 월렌이 친구들과 헤어지며 흑인 비하 단어 ‘니거’(Nigger)를 내뱉는 장면을 옆집 사람이 몰래 녹화해서 올린 영상이었다. 월렌은 곧 사과했지만 비난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방송사들은 그의 음악을 금지했다. 음원 플랫폼에서도 삭제당했다. 경력은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캔슬’된 것이다. 다만 2022년은 ‘캔슬 컬처’(취소 문화)가 시작된 2017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이 논란이 되거나 자신의 정치적 관점과 다를 때 이를 소셜미디어에서 처형하는 ‘캔슬 컬처’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오바마마저 2019년 공개적으로 “캔슬 컬처는 정치적 활동이라 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그리고 미국 밀레니얼 세대로부터 ‘꼰대’라는 욕을 먹었다.) 재미있게도 월렌이 ‘캔슬’되자 그의 음악을 듣자는 운동이 폭발했다. 특히 보수적인 백인들 사이에서 그의 음악이 더 적극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앨범 ‘데인저러스: 더 더블 앨범’(Dangerous: The Double Album)은 2022년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 인기는 ‘라스트 나이트’의 놀라운 기록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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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월렌은 진보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보수주의자들을 대변하는 반동적 목소리인가? 나는 월렌을 점점 보수화하는 미국의 정치적 상징으로 일컫는 글을 수도 없이 읽었다. 알딘의 ‘트라이 댓 인 어 스몰 타운’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정치적 사건과 월렌의 인기를 완벽하게 떼어놓고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모건 월렌의 노래를 정치적 이유로 나의 애청곡 리스트에서 ‘캔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의 노래는 확실히 훌륭한 컨트리다. 좋은 앨범이 아니라면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미국 음악 매체 ‘피치포크’가 6.9점이라는 후한 점수를 주며 “(가사의) 익숙한 감상주의에도 월렌이 노래할 때 당신은 떨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호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노래 ‘레드넥 러브 송’(Redneck Love Song)을 종종 듣는다. 레드넥은 니거에 해당하는 백인 멸칭이다. 햇빛 아래서 종일 노동한 탓에 목이 붉게 그을린 가난하고 무식한 백인 촌사람들을 일컫는 단어다. 월렌은 노래한다. “내 트랙터는 녹색이고 내 목장은 더 푸르지/ 나는 말이 없는 남자지만 이렇게 말할게/ 내 목은 붉은색이고 내 옷깃은 푸른색이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이 노래는 겪어본 적 없는 세계로 나를 데려간다. 1990년대 힙합은 나를 경찰에게 핍박당하고 백인에게 천시받으며 마약 거래로 겨우 돈을 버는 엘에이(LA) 뒷골목 흑인 게토로 데려갔다. 월렌의 노래는 농장에서 종일 노동하고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며 어쩌면 트럼프를 강력하게 지지할지도 모를 텍사스 교외로 나를 데려간다. 나는 다른 정치적 위치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노래하는 두 장르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미국이라는 국가의 그림을 퍼즐처럼 맞춰보려 애쓴다. 모든 것을 정치적 이유로 ‘캔슬’할 수는 없다. 존재하는 것을 눈앞에서만 지우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지금 미국에서 일고 있는 모건 월렌과 새로운 컨트리 붐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모른 척했던 절반의 미국이 내놓는 목소리다.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옳거나 옳지 않거나. 음악은, 예술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직시하고 담아내며 흐르는 것이다.
문화 평론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