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 작가가 1974년 일본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판화설치작품 ‘걸레’. 현지 백화점에서 산 식탁보 표면에 걸레와 걸레에서 배어 나온 수분의 마른 흔적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찍은 파격적 구도의 작품이었다. 현재 김구림 작가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전시실 들머리 공간에 주요 출품작으로 나왔다.
이 걸레는 작품인가. 이 걸레의 물기가 스며든 식탁보는 판화인가.
정말 알쏭달쏭하다. 한국 실험미술 대가 김구림(87)씨가 49년 전 만든 판화 설치작품 ‘걸레’는 판화와 설치작품, 일상용품 사이의 경계를 헷갈리게 만든다. 테이블을 덮은 허연 식탁보 한구석에 꽃무늬가 들어간 걸레덩이가 턱 하니 놓여있고 그 걸레덩이에서 배어 나옴 직한 물기가 배어들어 누렇게 변색된 흔적이 보이는 것이 작품의 전부인 까닭이다. 판화에 설치작품의 개념을 결합한 것도 확실히 이질적이지 않은가.
지난 8월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7 전시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김씨의 회고전에서 관객의 눈길 끄는 화제작 중의 하나로 떠오른 것이 ‘걸레’다. 이 작품은 판화의 기본적인 정의가 무엇인지를 새삼 의심스럽게 하면서 우리 삶과 예술에서 시간의 의미를 따져 묻는다. 판화는 흔히 목판이나 동판에 새겨서 종이에 찍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지만, 그는 이런 전제를 걸레덩이와 그 아래 누런 수분 얼룩의 존재감으로 단호히 거부해버린다.
사실 작품의 걸레 아래 스며든 누런 얼룩은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이미지다. 그러니까 진짜 수분의 흔적은 아닌 셈이지만, 작품은 이런 경계를 넘나드는 판화기법의 연출을 통해 ‘무슨 재료든 일단 찍어내고 작가의 의도가 들어가면 작품이 아니냐’는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아울러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물들이 시간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담게 되고 그것에 어떤 시선을 주느냐에 따라 작품과 작품 아닌 것이 된다는 통찰도 담는다.
때가 묻은 탁자를 흰 천으로 닦아 천이 걸레가 되고 결국에는 닳아서 걸레 조각이 되는 긴 과정을 2분7초에 압축한 또 다른 영상 작업 ‘걸레’(1974)는 이런 시간성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가의 주요 작품으로 판화 ‘걸레’와 더불어 회고전에서 상영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이 처음 소개된 곳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한국에서 실험영화와 퍼포먼스를 하다 1973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간 김구림은 현지에서 사물과 시간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와 창작에 탐닉하면서 현지의 전위 사조인 모노파의 작가들과 교유했다. 일본 현대미술을 편력하는 와중에 1974년 일본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 전시장에 문제작 ‘걸레’를 내놓은 것이다.
판화에 대한 기존의 장르적 틀과 관습을 벗어던진 문제적 작품 앞에 일본의 평단과 작가들은 호평 일색이었다. 심사를 하루 연장할 정도로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와 경합을 벌이기도 하고, 현지 판화 잡지는 김구림의 ‘걸레’를 소개하는 전면 특집을 낼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김구림은 한해 전 일본 도쿄 시로다갤러리에서 열린 첫 일본 개인전에서 빗자루, 걸레, 양동이, 전구 등을 닳게 만들거나 일부러 여러 색을 덕지덕지 칠해 낡은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지금 사물의 시간을 과거로 치환시키는 독자적인 개념미술의 방법론을 선보인 바 있다. ‘걸레’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판화의 제작 방식의 측면으로까지 연장시켜 드러낸 결실이었다. 김 작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구림 작가의 1981년 작 ‘정물 에이(A)’(작가 소장). 1974년 일본 도쿄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해 호평을 받은 판화설치작품 ‘걸레’의 작품 얼개를 컵과 쟁반, 천으로 소재만 바꾼 채 거의 그대로 옮겼다. 1981년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출품했지만 ‘판화’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최 쪽이 전시를 거부했고, 아직도 전시회에서 정식으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이태까지 판화는 종이에다 찍어서 액자에 넣어서 에디션 넘버를 붙여 내잖아요. 근데 그거는 구식 방법이고 현대 판화에선 기술이 발달되어 공장에서 무늬를 막 찍어내고 넥타이 만들고 옷에도 무늬를 만들어요. 난 현대 판화는 과거 판화의 방식을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고 봤어요. 우리가 흔히 시장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집안에서나 언제나 사용하는 그런 것들을 갖고 예술화시키자는 것이었어요. 식탁보도 무늬가 꼭 같이 짜여진 것들이 수백장 나오고 같은 무늬의 컵도 마구 쏟아지지 않습니까. 그것들에 작가가 눈길을 주면 판화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1975년 귀국한 그는 한동안 이 ‘걸레’ 연작을 국내 화단에 내놓지 않았다. 일본에서 연마한 개념미술의 방법론으로 표출한 평면작품과 판화 작품들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뒤샹의 변기처럼 모든 재료와 모든 사물이 다 판화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걸레’의 파격성을 본격적으로 평단에 드러내는 데는 6년이란 시간이 더 걸렸다.
마침내 때가 왔다고 생각한 그가 ‘걸레’의 개념을 그대로 떠서 옮긴 ‘정물 에이(A)’와 ‘정물 비(B)’를 세상에 내놓은 건 1981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 전시였다. 걸레 대신 컵과 천, 숟가락 놓인 접시를 흰 테이블 위에 놓고 접시 안 내용물의 흔적, 숟가락의 흔적, 컵의 그늘 따위를 실크스크린으로 찍어 마치 실제 사용한 것처럼 착시감을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의 출품은 한국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논란거리가 됐다. ‘판화는 복제예술’이란 기존 관념을 고수하던 주최 쪽은 회의를 연 끝에 작품이 ‘판화가 아니다’고 출품을 불허하고 조속히 가져가라는 통보문을 보냈고, 이에 반발한 작가와 박서보씨 등 다른 동료 작가들이 잇따라 신문 등에 반박 글을 기고하면서 보기 드문 지상 논쟁까지 벌어졌다.
작가는 결국 행사의 정지를 요청하는 가처분신청까지 법원에 내면서 법정대결을 불사했지만, 동아일보 쪽 관계자가 곧장 작가에 구두 사과하고 유감을 표명하면서 전무후무했던 판화 출품 논란은 일단락됐다.
김구림 작가는 결국 두 점의 정물 작품을 전시장에 낼 수 없었지만 사건의 파장은 그대로 이어져 많은 젊은 작가들은 1980년대 이후 판화를 활용한 설치작품, 오브제 결합 작품들을 숱하게 창작했고, 민중미술의 현장 판화 작업에서도 편지 등 일상 기물 등의 오브제를 결합하는 작업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 원형이 됐던 일본 도쿄판화비엔날레 출품작 ‘걸레’가 지금도 온전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전시장에서 관객을 맞고 있는데 비해 1981년 논란을 빚은 두 점의 정물 작품은 아직도 작가가 소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식적인 전시에서 한번도 소개된 적이 없다. 김 작가는 “이번 회고전에도 ‘걸레’와 ‘정물’을 함께 전시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협소해 결국 꺼내놓지 못했다”며 “죽기 전에 두 판화 작품을 꼭 같이 전시하고 싶은 것이 소망”이라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81년 7월16일치 ‘조선일보’ 11면에 실린 김구림 작가의 반박글.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의 출품 거부에 대해 “초대에 응한 작품에 대해서는 여하를 막론하고 전시하는 것이 국제적 관행”라며 “품 규정에도 없는 법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한 개인의 창작의욕을 위축시키고 후배들에게까지 새로운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결과를 빚게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