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자신의 장서를 모교인 강남대에 기증한 이상보 박사한테 남은 것은 자신과 지인의 저서 외에 좁쌀책 2천여권뿐이다. 텍스트가 아닌 물성으로의 책만 남은 셈이다. 특히 한줌에 드는 좁쌀책은 해외여행 틈틈이 모아들인 것으로 각종 사연과 추억이 담긴 애완의 대상이다. 돋보기로 보이는 책은 러시아 횡단 철도여행 중 구입한 <레닌 약력첩>.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국문학 2만권 먼지 쌓이자 강남대 기증
백범이 서명해준 ‘백범일지’ 피난때 잃어
눈에 띄는대로 사모으는 버릇
이빠진 서가 너머 여행가방 열자 ‘좁쌀책’ 우르르
“아직 버리지 못한 욕심이요”
백범이 서명해준 ‘백범일지’ 피난때 잃어
눈에 띄는대로 사모으는 버릇
이빠진 서가 너머 여행가방 열자 ‘좁쌀책’ 우르르
“아직 버리지 못한 욕심이요”
한국의 책쟁이들/② 이상보 국민대 명예교수 “서운하시겠어요?” “무슨 말씀을…. 좋은 집으로 시집 보내는 기분이라 즐겁고 기뻐요.”(<갑사로 가는 길> 117쪽) 92년 그는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면서 연구실과 집에 있던 책 여섯 대 분량(1.5t 트럭)을 강남대 도서관으로 실어보냈다. 정말 즐겁고 기뻤을까. 5월 말 찾아간 이상보 국민대 명예교수의 서대문구 홍은동 집은 깨끗했다. 거실 책꽂이에 자신 및 가까운 지인의 최근 저서, 작은 방 두 벽에 전공인 국어국문학 관련 책, 침대 방에는 최근 헌책방에서 사들인 잡학 책이 쌓였다. 그뿐. 단행본(H) 2만4809권, 연속간행물(HP) 1059권, 참고도서(HR) 851권, 논문(T) 523권. 그가 서너 차례에 걸쳐 강남대에 기증한 책들은 도서관 4층 종합정보자료실 한쪽 별도의 공간에 비치돼 있다. 7단복식 2연서가 40개 분량. 그의 호를 딴 한실문고다. 문고 이름 첫자를 따 분류기호 앞에 H 기호를 부여했다. 관외대출은 안 되고 열람 또는 복사만 할 수 있다. 영구보존 조건에 기증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 92년 장서 인수 당시 강남대도서관 장서는 20만권. 한꺼번에 1/10이 늘어난 셈이다. 인수작업에 간여한 강남대의 한 직원은 “이 박사의 장서는 우선 양이 많았고 국문학 쪽으로 특화돼 소장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면서 “한번만 봐서인지 거의 새책 수준이었고 출판사에서 증정한 책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기증도서 목록을 보면 분류기호 800대 도서가 70% 가량 차지하고 그 가운데 시집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 한문책은 도서관 2층 고서자료실에 잠금장치를 두고 전시하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그가 연락해올 때마다 고인 책들을 인수하기로 약조했다.
그가 장서를 기증한 것은 물리적으로 그가 더이상 책을 보관하여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 아파트가 비좁을 뿐더러 나이듦에 따라 책의 활용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50년 이상 국문학 분야로 특화해 모은 책은 그의 분신과도 같았다. 종이뭉치로 전락해 먼지를 덮어쓴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책은 인간과 다른 운명을 가진 것. 표지를 닦고 먼지를 떨어내면 그 속의 콘텐츠는 다시 무시간성을 회복할 터. 젊은이들이 그 책들을 들춰 그 안의 진미를 맛보면 자신의 국어국문학 열정 역시 전해지지 않겠는가. 도서관에 둥지를 튼 그의 장서는 행복하다. 한살이를 끝낸 책들이 또 다른 한살이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장서가들의 책은 도서관에서 거절당하거나 홀대받기 일쑤. 관심사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집된 책은 패총처럼 분야와 층위가 잡다하기 마련이다. 질이 담보되지 않을 뿐더러 도서관의 자료와 겹치는 경우가 많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따른다. 하여, 나름대로 모아진 자료를 귀중하게 여기는 소장자와 일정기준에 따라 필요한 것만 받겠다는 도서관의 입장이 달라 ‘일괄 인수-보존’은 이뤄지지 않는다. 서가정리 겸 기증생색을 내려 귀중자료는 빼고 나머지만 인수해 가라는 사람조차 있다고 사서들은 전했다. 장서를 의탁한 강남대는 이 교수의 모교. 그는 동국대 국문과를 다니면서 강남대의 전신인 중앙신학교 2년 과정을 이수했다. 당시 한국전쟁 뒤 혼란기에서 믿을 이는 신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국군이 적을 퇴치하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선무방송은 대전에서 녹음된 것이었음을 나중에 알고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 터다. 환도하자마자 세운상가 자리에 있던 신학교에 등록해 함석헌 등에게 초교파적 신학을 배웠다. “내 나이가 얼마나 돼 보이오?” “예순 다섯?” 약간의 아부섞인 대답. “올해 여든이오.” 실제로 그의 얼굴은 10년을 낮잡아볼 정도로 젊어보였다. 무슨 비결이라도?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했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지망생이었다. 학생이자 교사 시절 그는 원효로 건국청년훈련원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처음 만났다. 악수를 할 때 쇳덩이를 쥔듯 했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 수시로 경교장을 드나들면서 먹물 시중을 들거나 잔디밭에서 공을 찼다. “을지로에 살았는데, 피난하면서 ‘이상보 동지에게’라고 백범이 서명한 <백범일지>를 항아리에 묻어두었소. 돌아와 보니 쑥밭이 되어 찾을 수 없었소. <백범일지>가 눈에 띄면 사 모으는 습관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요.” 고전시가 찾으려고 발로 글을 썼지 백범 사회장 때 그의 영구차 끈을 잡고 장례행렬에 참가한 뒤 다니던 단국대 정치학과를 때려치고 동국대 국문과로 편입했다. 그 이후는 국어국문학 인생. 한때 시집을 낼 만큼 시를 좋아했던 터, 고전시가를 전공하기로 하고 조선시대 3대 가객 중 ‘노계 박인로 연구’로 석사학위를 땄다. 정송강(김사엽), 윤고산(이재수)은 선점되었기에 박노계로 물꼬를 잡았다. 박사학위는 ‘가사문학의 연구’. “옛 시가를 연구하니 시골 노인들이 옛날 책을 가지고 찾아오곤 했소. 한글 시가가 한두 편 섞인 문집은 아주 소중한 자료였소.” 목판본 문집은 5만원, 필사본은 10만원 하는 식으로 구입했다. 그가 산 고서는 골동품으로서가 아니라 연구자료로서. 이탁본 농가월령가 등 조선시대 기사를 발굴하면 하는대로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대부분이 일차적인 사항을 망라한 ‘발굴보고서’다. “요즘의 신문기자와 흡사하오. 전국 안 다닌 절이 없을 정도로 발로 글을 썼소. 요즘은 자료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소.” 웬만한 자료는 모두 햇빛을 보았다고 본다. 그는 ‘디지털 시대의 국어국문학 연구’가 마뜩찮다는 표정이다. 문예학이다, 사회학적 관점이다 해서 남이 써놓은 논문을 종합해 냅다 자기 얘기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19, 20세기 가사 자료가 많은데 미답지경이오. 지은이를 밝히려면 족보도 찾아보고 해야 하는데 힘이 달려요. 누군가 젊은이가 한다면 전부 넘겨줄 의사가 있소.” 몇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한 듯, 얘기해도 듣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의 책에 대한 관심은 여전해서 들며나며 집에서 가까운 헌책방을 들른다. 그 좋은 책들이 주인을 못 만나는 게 안타깝다. 자신이 거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한두 권씩 집어온 책이 다시 쌓인다. 장서의 빈자리처럼 허허한 가슴을 채우거나, 매만지고 냄새맡는 완상 수준에 머무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줌에 드는 작은책, 이름하여 좁쌀책. 기증도서에 포함하지 않고 지금껏 애완하는 책이다. ‘부지기수’라지만 2천권쯤 되지 않을까 추정한다. “아직 버리지 못한 욕심이오.” 그는 여행가방 먼지를 떨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또다른 상자. 그것을 열자 비로소 좁쌀책이 우수수 쏟아졌다. 베트남판 춘향전, 일본·중국 시집과 유교경전, <고험요람> 등 옛책, 프라하에서 구입한 성구집, 바라밀경, 코란경, 호주 교포가 준 열쇠고리형 성경 등등. “이것좀 보시오” 하는 근엄했던 그의 표정은 아이처럼 바뀌었다. 1992년 러시아 철도여행 중 샀다는 <레닌 약력첩>. 1.7×1.8cm. 컬러사진과 활자가 빼곡하다. “보여줄까 말까?” 인주함 크기의 상자를 열자 인주 대신 동그란 구멍 속에 ‘작은 물질’이 들었다. 3.5×3.5×2.5mm. 핀셋으로나 집히는 게 책이다. 돋보기로 봐도 글자를 알아볼 수 없지만 분명히 활판인쇄다. 그렇다니 그런 줄 안다.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 구한 것이라며 회심의 미소다. “좁쌀책은 그 나라의 인쇄기술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를 비롯한 몇몇 좁쌀책 애호가들이 글을 모아 <나의 애장서> <나의 좌우명>이란 책을 만들어 나눠가졌다. 일련번호를 붙여 400부 한정본으로 만들었다. 1999년에는 그 혼자서 <인도차이나 역사기행>(민속원)이란 책을 만들었다. 일반판매를 하려 했지만 서점에서 분실 우려가 있다며 맡지 않더란다. 그는 실컷 자랑을 하고 한 권도 흘리지 않고 도로 여행가방에 넣었다. 지적 자산 보존 수집가가 애국자요 좁쌀책과 더불어 그의 계속되는 관심은 문학비 건립.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의 이름으로 문학비 23개를 세웠다. 이달 하순에는 정태진 문학비(파주도서관 앞) 건립을 앞두고 있다. 이 동호회는 나손 김동욱 박사의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의 후신. 31개의 시비를 세운 바 있는 나손의 동호회는 90년 그의 타계와 함께 이 교수가 대를 이었다. “책 수집가, 그 사람들 애국자요. 자칫 인멸될 지적 자산을 보존하여 세대를 중개하는 몫을 하니까요.” 폼 안나고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의미깊은 역할을 하는 그들이 정당하게 대접 받았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는 자신의 약력을 참고하라면서 140쪽 수필집 <갑사로 가는 길>(범우문고 219)과 95년에 나온 <고서연구>(한국고서연구회 회지 11호)를 건넸다. 그는 요즘 ‘아름다운 가게’ 다니기를 즐긴다. 책값 싸서 좋고 이익금은 불우이웃돕기에 들어간다면서….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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