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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시민 참여하는 ‘과학 통제’ 유효할까

등록 2007-11-09 18:56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물리학자들>을 통해서 본 ‘과학적 시민권’의 의미

‘과학자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가능하고 또 유효할까? 1962년 스위스 취리히극장에서 막을 올린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이 바로 이 물음에 답했다. 가능하지만 유효하지는 않다고! 추리극 형식을 빌린 이 작품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인 뫼비우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극 중에서 그는 과학적 발견의 궁극적인 원리인 ‘모든 가능한 발견체계’를 완성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론이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것을 예감하고 다가올 재난을 막기 위해 스스로 미치광이로 위장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해 산다. 과학자의 도덕적 책무를 나름의 방법으로 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세상이 그를 그냥 놓아주지 않는 데에 있다. 그와 한 병동에 있는 다른 두 정신병자들도 실은 물리학자들이다. 이들은 뫼비우스의 연구결과를 훔쳐내기 위해 각각 미국과 소련에서 파견되었다. 살인사건이 실마리가 되어 이 모든 사실들이 드러났을 때, 뫼비우스는 과학자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오는 모험”에 절대 개입해서 안 되며, “정치가들에게 이용당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내세워 두 첩보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곱사등이인 병원장이 뫼비우스의 이론을 빼내 기업에 팔아넘긴 다음이었다. 결국 뒤렌마트는 이 작품에 과학자들의 도덕적 책무만으로는 과학기술을 안전하게 유도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럴까? 답은 ‘그렇다’이다. 예가 있다.

유전공학의 여명기인 1974년, 버클리대학의 교수인 폴 버그를 중심으로 분자생물학자들이 유전자 재조합 연구의 자발적인 중지를 요구하는 <재조합 디엔에이(DNA) 분자들의 잠재적인 생물학적 위험성>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성명서는 이 분야에서 연구하는 모든 과학자들이 “눈에 띄는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을 때까지” 유전자 재조합 실험들을 하지 말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물리학자들>에서 보듯이 정치적·경제적 권력들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과학기술에 대한 정부 차원의 통제다.

2000년 1월 몬트리올에서 150여 국가의 정부가 ‘국제 생명안정성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 의정서는 과학기술에 ‘심각한 위해성에 대한 정당한 의심’이 있을 경우, ‘과학적 확실성이나 합의 부재가 예방적 조처를 취하지 않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영국의 생물학자 매완 호 교수의 ‘사전예방 원칙’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정서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역시 정치적·경제적 권력들 때문이다. 예컨대 오늘날 각국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유기체·세포주·유전자에 특허를 주고 있으며, 유전체와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기업의 소유로 인정하고 있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정부나 기업이 지원하는 연구비로 자국 및 타국의 토착공동체에서 유전자원을 훔치는 데 분주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날 같이 고비용을 전제로 하는 ‘거대 과학’의 시대에는 과학자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뿐 아니라 정부차원의 통제가 결의된다 해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언급한 ‘문명의 자기파괴 잠재력’을 안고 있는 ‘위험감수사회’가 이미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낙관적 기대만을 간직한 채 다가오는 위험들은 마냥 바라보고만 있어야 할까? 뒤렌마트는 <물리학자들>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은 ‘물리학자들에게 부치는 21가지 요점’을 통해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해법을 밝혔다. “물리학의 내용은 물리학자들과 관계되지만, 그 영향력은 모든 인간에게 관계된다. 모두에게 관계되는 일은 오로지 모두가 함께 해결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다. 옳은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생각을 ‘시민참여를 통한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 또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일례로 유럽에서는 ‘합의회의’라는 시민참여 방식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유전공학이나 생명공학처럼 사회적 파장이 큰 과학기술들에 대해서는 그 기술의 ‘수혜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시민들이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 분야에 국한되어 있던 시민권을 과학기술 분야에까지 확대했다는 뜻에서 이 권리를 ‘과학적 시민권’이라 부른다. 그리고 대표적인 사례로 네덜란드의 ‘구성적 기술 영향 평가’를 꼽는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여기에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까? 과학기술의 통제에 과연 과학자들만 위험하고 시민들은 안전한가? 대중민주주의 내지 참여민주주의가 가진 위험성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예컨대 시민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집단이기주의, 더 나아가 파시즘 내지 대중독재라는 용어와도 연관되어 있는 이 문제를 일찍이 입센이 그의 <민중의 적>에서 다루었다. 다음에 이어 살펴보자.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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