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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논술이 몰고 온 ‘전 사회의 철학화’
글쓰기 앞서 책읽기를 가르쳐라

등록 2007-12-07 16:47수정 2007-12-07 19:59

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거의 30년 전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전방 부대에 배치됐을 때다. 철학과 출신이라고 하자 여러 고참이 철학이 뭔지 물었다. 철학 강의를 좀 들었다고 해서 이런 고차원의 질문에 조리 있게 답하기는 쉽지 않다. 철학개론에 나오는 대로 ‘철학은 학문의 학문’이라고 했더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철학도답게 자신들의 사주팔자나 화끈하게 봐 달라고 했다.

지난해 이맘때쯤 동문 송년모임을 알리는 초대장을 받았다. ‘철학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이때가 아니면 언제 모이겠느냐’라는 게 초대글의 요지였다. 사실이 그렇다. 중·고등학생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철학사의 주요 저작들이 모두 요약 해설판으로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초등학생을 위한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책도 곧 등장할 듯한 분위기다. 한 후배는 이를 두고 ‘전 사회의 철학화’가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평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철학의 대중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논술 광풍이 자리하고 있다. 대학입시에서 최상급의 논술답안을 쓰려면 박사 학위 세 개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우선 출제자의 의도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해 문제 설정을 해야 한다(철학박사). 또 문학 또는 역사에서 끌어온 사례가 적절하게 들어가야 하며(문학·사학박사), 마무리는 사회과학적으로 해야(사회과학박사)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아울러 논리적 논지 전개가 필수적이니 전체적으로 철학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논술은 ‘논증적인 글쓰기’다. 논증과 글쓰기를 함께 잘 해야 한다. 논증과 글쓰기는 그 사회의 지력을 재는 주요 척도다. 따라서 논술을 잘 하는 사람이 많으면 학문 발달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의 수준도 올라간다. 하지만 지금 이뤄지는 논술 교육은 ‘좋은 논술’보다 ‘점수 따기 논술’에 집중하다 보니, 기껏해야 비(B)급 논술 능력만을 키운다. 형식적으로 큰 문제가 없으면서 내용이 탁월한 글이 에이(A)급 논술이라면, 형식은 잘 짜였으나 특별히 탁월한 내용 없이 상식적이고 누구나 할 법한 논의를 하면 비(B)급이 된다. 속성으로 지식을 주입해서는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춘 천편일률적인 글이 양산될 뿐이다.

박정하 성균관대 교수는 <논술 에센스>(동아일보사 펴냄)에서 “초등 논술은 미친 짓”이라고 말한다. 초등학생 때는 논리적 글쓰기보다 정서적 글쓰기가 더 필요한데, 대입 논술 개념을 가르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사교육이 논술 교육을 더 잘 맡을 수 있다는 생각도 그릇된 선입견이다.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교육 시스템을 갖춘다면, 우수한 교사를 많이 보유한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더 중요한 건 책 읽기다. 생각을 채울 재료가 없는데 글 내용이 좋아질 리가 없다. 곧, 전 사회의 철학화는 논술 시험에 얼마나 잘 대비하느냐가 아니라 학생을 포함한 국민들이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은 그가 읽은 모든 책의 합계’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자.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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