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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인권으로 승화한 ‘원폭 2세 김형률’에 대한 기억

등록 2008-05-23 21:29

전진성 교수
전진성 교수
역사가 빚은 비극적 존재이자 열정적 인간
피해자 자녀들 삶 세상에 알린 뒤 숨져
“역사와 인권에 대한 보편적 생각 놀라워”
인터뷰 /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펴낸 전진성 교수

“죄송하지만, 담뱃불 좀 꺼주시겠습니까?” 허름한 한식집의 테이블을 앞에 두고 그가 말했다. 2003년 5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는 연신 메마른 기침을 했다. “폐병이 있어서… 담배 연기가 치명적이거든요.” 조금 전 그는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원폭 피해자 문제를 의논하고 싶다고 했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운영위원 몇몇이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자신을 원폭 피해자 2세 환우인 김형률이라고 소개했다. 163㎝, 37㎏의 체구가 이미 그의 병을 말해주고 있었다. “낯설었지요. 한국에도 원폭 피해자가 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 2세가 피해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거든요.” 전진성 부산교육대 교수(사회교육과)는 조그맣고 마른 그를 그저 측은하게만 여겼다.

다음날 전 교수는 부산대 정문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드릴 자료가 있습니다.” 김형률은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측은지심을 자아내던 전날의 그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지요. 달변이어서가 아니라, 허약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힘, 진정으로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힘, 그런 게 느껴졌어요. 그저 동정만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알고 보니 김형률은 원폭 2세 환우와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뒤지고, 도움이 될 만한 단체를 모조리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를 통해 원폭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서 인권 문제의 가장 높은 가치를 길어 올렸다. 길어 올리고 2005년 5월29일 세상을 떠났다. 다시 3년이 흘러 전 교수가 책을 썼다. 김형률 평전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1만2000원)를 내놓았다. 짧은 삶을 산 김형률을 오랫동안 기억하려는 노력이다. 원폭 피해자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역사와 인권에 대한 기억이다.


고 김형률씨. 사진 문성은 작가 제공.
고 김형률씨. 사진 문성은 작가 제공.
전 교수는 독일에서 현대 지성사를 전공했고, 강단에 자리잡은 뒤 줄곧 역사와 기억에 관한 여러 책을 썼다. <박물관의 탄생>(살림·2004),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휴머니스트·2005) 등이 그의 저술이다. 그런 그에게 김형률은 역사가 빚어낸 가장 비극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려 했던 가장 열정적인 인간이었다.

김형률은 원폭 2세 환우다. 이 말을 그가 만들어냈다. 그로 인해 원폭 피해자 2세·3세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다. 2002년 3월, 원폭 피해자의 자녀로 태어나 오랫동안 질병의 고통을 겪었다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커밍아웃’했다. 아프다고 말하는 일이 왜 그리 힘들었을까? “원폭 1세들은 원폭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2세들에게 사회적 불이익이 갈 것을 걱정하는 것이지요. 물론 대다수 원폭 2세들은 건강합니다. 그러나 아픈 원폭 2세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씨는 이를 인권·반전·평화의 문제로 확장시켰습니다.”


1945년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모두 70만여명이 피폭 피해를 입었다. 그 가운데 10%인 7만여명이 한국인이었다. 이들은 ‘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식민지배의 고통, 원폭 피해의 고통, 한일 정부로부터 방치된 고통이 그것이다. 그러나 원폭 2세 환우는 또 다른 고통을 짊어졌다. 원폭 피해 1세대로부터도 외면당하는 고통이었다. “김씨는 한국과 일본의 원폭 피해자 단체로부터 압력을 많이 받았어요. 원폭에 따른 유전으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김형률은 2005년 5월, 도쿄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간부에게서 비난조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각혈이 시작됐고 귀국 뒤 닷새 만에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자료를 정리하면서 전 교수는 거듭 놀랐다. 5평짜리 방은 계간 <역사비평>을 비롯한 현대사 관련 서적과 영문 의학 저널을 포함한 각종 의학서적들로 빼곡했다. 그의 컴퓨터에는 생전에 보낸 전자우편, 각종 활동 자료와 논문, 발표문, 일기 등이 꼼꼼히 분류되어 있었다. 그가 남긴 글에는 사회과학자와 다름없는 안목과 식견이 드러나 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전문대에서 기술을 공부했으면서도 혼자의 힘으로 각종 서적과 자료를 독파한 덕분이었다. “아픈 사람은 자신의 문제에만 빠져들기 쉬운데, 그걸 넘어 역사와 인권에 대한 보편적 생각을 했다는 것이 가장 놀랍고 감동적이었어요.”

김형률이 태어난 1970년은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해다. 김형률은 전태일처럼 고통의 본질에 눈을 떠 온몸으로 항거했다. 김형률은 전태일과 달리 노동 문제가 아니라 생명 문제를 통해 소외된 자의 인권을 제기했다. 두 사람이 각 시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전 교수는 그런 점에서 조영래 변호사의 구실을 해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전태일 평전의 독자를 잇는 김형률 평전의 독자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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