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종횡사해
김지석의 종횡사해 /
칼 로브(1950~)는 ‘공동 대통령’으로까지 불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측근으로, 그의 이름을 딴 ‘로브 바이러스’(Rove virus)라는 말이 있다. 당파적 정치조작에 전념하지 않는 두뇌 부분은 모두 파괴하는 바이러스라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그는 ‘미국의 정치구도를 바꾸는 전략가’이지만 실상은 철저한 당파적 정치꾼이다.
정치꾼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여론조사다. 대통령 일정을 비롯한 모든 정치행위는 여론 지지율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에 맞춰진다. 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부시 행정부에서 3년간 백악관 대변인을 지낸 스콧 매클렐런은 얼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펴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이 책에서, 부시 행정부의 감세·교육정책과 이라크 전쟁 선동 등은 부시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중 지지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로브 등이 세심하게 조직한 정치 캠페인이었다고 폭로했다. 가치의 문제를 부각시켜 기독교 우파를 결집시키고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슬로건으로 부시의 강경 보수 이미지를 희석시켜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한 사람도 로브다.
로브는 지난해 백악관 정치고문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미국 정치권은 아직도 그가 만들어놓은 ‘정치꾼 정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민주·공화당 모두 여론 동향에 정책을 맞추다보니, 대통령 선거가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정책 차이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초기에 높은 기대를 모은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 역시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뒤엔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오히려 지지율을 갉아먹는다. 민주당은 좋은 재집권 기회를 만났는데도 새 틀을 짜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더 플랜>(리북 펴냄)은 민주당의 이런 고민을 담은 책이다. 각각 정치꾼과 정책광 출신인 공동저자는 공화당 방식의 게임을 끝내고, 새 시대에 맞는 정책적 비전에 집중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한다.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우선하는 정치꾼 정치로는 나라가 직면한 도전에 대응할 수 없는 만큼 정치의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이들 견해로, 미국의 경제적 질서는 몇 세대 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다. 사회적 계약은 1930년대에 맞춰 만들어졌고, 사회안전망은 1960년대에 맞춰져 있으며, 21세기를 위한 준비는 20세기 말에 멈춰서 있다.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정치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보다도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라는 지적은 한국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명박 정부는 정책 실패를 이전 정권 탓으로 돌리고 당파적 접근을 강화함으로써 궁지에서 벗어나려 한다. 올바른 국가 비전을 추구해 국민을 폭넓게 통합시키기보다 고정 지지층 결속에 집중하는 것이다. 스스로 위안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적 목표를 갖는 정치’라는 당위는 뒷전으로 밀린다.
경륜과 품격이 있는 정치인(statesman)은 국민의 책임과 동참을 요구할 수 있다. 반면 정치꾼은 일시적으로 비판을 모면하고 지지율을 높이는 데 치중한다. 과연 지금 이명박 정부의 비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이 대통령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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