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오늘 부는 바람>, 김원일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1976
<오늘 부는 바람>, 김원일 소설집
문학과지성사, 1976
봄바람. 이 말은 봄과 바람의 들뜬 이미지를 잃은 지 오래다. 십여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봄바람은 황사를 연상시킨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는 “지금은 남의 땅”이라서 그렇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걸어가는 싱그러운 봄이었다. 지금은 빼앗긴 들도 ‘아닌데’ 봄이 없다. 사계도 삼한사온도 각각 경계가 흐려진 지 오래다.
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쫓겨났다. 3월. 을씨년스러움, 극심한 일교차, 잿빛 하늘, 급작스런 찬바람…. 지난달 바람은 가혹했다. 내년에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나만 우울한 줄 알았는데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연을 들으니 다들 3월이 심란했던가 보다.
바람의 범위는 만상(萬象)의 양극을 축소해놓은 것 같다. 나른한 미풍에서부터 물체를 이동시키는 태풍까지. 말할 것도 없이, 바람은 인생의 시련과 실연의 오랜 메타포다.
인간은 인생에 개입할 수 없다. 삶은 어쩔 수 없음이요, 외롭고 지겨운 노동,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生) 이후엔, 바로 노병사(勞/老病死)다. 인생을 한 장면으로 요약한 소설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원일의 <오늘 부는 바람>(표제작)을 들겠다. 이솝 우화나 톨스토이의 콩트들, 수많은 잠언집도 멋진 한 컷이지만 그들은 비유적이다.
<오늘 부는 바람>은 1970년대 도시 빈민의 가난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문학과 지성의 본뜻, 문학과 지성의 관계를 배웠다. 빼어난 문장이란 그 자체로 영상이며 읽는 이의 몸에 배어들고 베는 글이다. 설렁탕집의 기름진 습기, 비좁고 침침한 서민 아파트, 아버지의 술 냄새, 병명(위암)도 모르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비명, 오빠의 구타와 성폭행, 주인공 속옷의 피비린내가 고스란하다.
이 작품은 1975년 작이다(<소설문예> 게재). 세로읽기 책. 책값은 천원. 문학을 전공한 내 엄마의 유품이다. 표지 뒷면에는 젊고 잘생긴 당시 작가의 사진과 김병익의 비평이 있다. 둘 다 눈부시다. “…그는 한 작가가 관심을 갖고 열의로써 대결해야 할 모든 고통스런 문제들을 통해 우리의 이 시대와 인간이 어떤 형태로 패배해 가고 있는가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부는 바람”은 오늘‘만’ 부는, 오늘‘의’ 바람이라는 뜻인 듯하다. 오늘은 흐린 날일지라도 내일은 나아질 것이라는. 작품의 내용은 비극적이지만 분위기는 힘이 있다. “…이제 엄마 생각에도 서러워지지 않았다. 껌보다도 더 질긴 삶이 내 발을 땅에다 굳건히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193쪽)
껌보다 질겨야 이어지는 삶, 이것이 희망일까?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나는 ‘껌’일 자신이 없다. 또한 1975년과 2013년의 바람은 다르다.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비밀로 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보이지 않는 깁스’를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극복은 쉽지 않다. 아니, 극복할 필요가 있을까. 인생은 언제나 바람인데… 운 좋으면 황사 없는 바람. 대개는 산성비와 함께 우산대 휘청거리는 폭풍우, 아니면 이번 겨울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따귀 같은 바람이거나 공사장의 흙먼지와 검은 비닐봉지가 날리는 더러운 바람이다.
작가 후기 역시 매혹적이다. “나는 구원이나 긍정을 바탕으로 한 화해보다도 어둠이나 죽음의 아름다움, 삶의 어려움이 주는 쓸쓸함과, 고통에 소리 죽여 흐느끼는 절망을 사랑해왔다.(나는 이런 작가를 사랑한다!)… 비극의 세계가… 부정이나 허무가 아니라 거대한 질서의 운동이요, 생을 절실히 사랑하는 애정의 소산임을 확신한다.”(300쪽)
실망시키지 않는 후기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시대의 비극은, ‘애정의 소산임을 확인할’ 시간이 없는 비극이다. 날마다 전쟁이고 흐느낌이다. 다만, 매일 부는 바람도 저마다 다른 바람임은 분명하다. 이 괴로움의 변주가 삶의 가능성이다. 바람 잘 날 없는 날을 기대하지 말자. 조금씩 다른 바람에 대해 알고, 쓰고, 함께 바람 맞는다면 오늘 부는 바람도 견뎌지겠지.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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