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아홉번째로 판화가 홍선웅 교수가 민중미술협의회 시절의 활동상을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이종률, 조성우,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84년 ‘삶의 미술전’ 끝나자
새로운 미술운동 논의 무르익어
‘해방 40년 역사’ 전국 순회전 열고
민중미술 논의 물꼬 ‘민미협’ 결성
‘민족미술’ 발행·토론회 정례화…
‘그림마당 민’ 운영 등 기틀 잡아
■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운과 민미협의 태동
‘용태 형’은 그가 즐겨 부르던 ‘산포도 처녀’처럼 부드러우면서 정감이 많았다. 그는 조직을 운영하는 일에는 판단력이 신속하고 단호했지만 누구에게나 자상했다. 1984년 6월 <삶의 미술전>(관훈미술관·아랍미술관·제3미술관)을 기획하면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문영태, 강요배, 박세형과 함께 우리는 여러 차례 기획모임을 하면서 작가의 자료를 수집하고 출품 작가를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성완경 선배와 용태 형에게 조언을 듣곤 했다.
‘삶의 미술전’은 “삶과 유리된 미적 가치관을 양성한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총체적 삶의 맥락 속에서 미술을 정립해 나갈 것”을 주장한 전시였다. 군부독재정권 속에서 현실을 외면한 채 서구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술에 매몰된 제도권 미술에 대한 도전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의 가치관과 창작론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삶의 미술전’을 계기로 새로운 미술운동에 대한 논의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많은 미술인들이 인사동의 건국다방 앞에 있던 평론가 원동석 선생의 미술자료실을 들락거렸다. 주재환, 손장섭, 김정헌 등 현발 동인들을 비롯해서 선화랑에서 발간하는 <선미술>의 주간을 맡고 있던 유홍준, 그리고 광주의 홍성담과 최열, 동인 ‘임술년’과 ‘두렁’의 회원들과도 가끔씩 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84년 우리는 <해방 40년 역사전> 전국 순회전을 기획했는데, 또 지방 순회전시회 때마다 세미나도 열었다. ‘역사를 보는 작가의 시각’(황석영·광주), ‘작품에 있어서 형식의 제 문제’(홍선웅·광주), ‘역사와 예술’(염무웅·대구), ‘작가와 역사’(이철수·대구), ‘역사화의 주제의식’(성완경·부산), ‘작가와 시대정신’(문영태·부산), ‘작품에 있어서 주제 표현의 제 문제’(원동석·마산) 등의 주제로 지역 미술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전시회를 통해 민중미술에 대한 논의가 전국 단위로 활성화되었으며 훗날 ‘민미협’이라는 미술전문가 집단을 결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힘전 사건’과 젊은 미술인의 결집
사무국장 연임 마다한 용태형
뉴욕 가서 ‘민중판화전’ 기획
판매대금 민미협 활동비로 보내
유홍준과 콤비플레이 운영비 숨통
85년 7월 안국동에 있었던 아랍미술관에서는 <한국미술 20대 힘 전>이 열렸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에서 전시장을 봉쇄하고 30여점의 작품을 강제 철거해 버렸다. ‘힘 전’ 사건은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첫번째 민중미술 탄압 사례로 꼽히며, 이로 인해 미술인들의 조직적인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 달 뒤인 8월17일 우리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열고 민미협 창립의 필요성에 합의하고 창립준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그 덕분에 ‘힘 전’에 참여했던 20대의 젊은 미술인들이 민미협에 적극 가입하며 주도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힘 전’ 며칠 전인 7월5일, 나는 이른바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으로 유상덕(작고)·김진경(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고광헌(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등 30여명의 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해직당했다. 그러자 선배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민미협 창립 준비위원회 총무를 맡겼다. 그리고 여러 대학신문에 미술운동론을 쓰고 있던 미술평론가 최열에게는 사업과 홍보를 책임지게 했고, 사무국장은 당연히 용태 형의 몫이었다. 서서히 사무국 체계가 갖춰지고 운영위원회와 대의원 조직이 편제되면서 그해 11월22일 120여명의 미술인들이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창립총회를 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억압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민미협이 출범하면서 용태 형은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직을 다져 나갔다.
1985년 7월20일 전시장에서 철거·압수당한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 출품작들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쌓여 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제공
용태 형은 86년 1년 동안 사무국장을 맡았지만 그사이 많은 사업을 추진해 민미협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업을 꼽자면, 민미협 기관지인 <민족미술>을 발행해 새로운 미술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 기관지를 통해 회원의 전시와 기획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집단 미술운동과 지역현장 운동을 소개했다. 또 30년대~80년대의 중국 신목판화운동사, <일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전>(JAALA)의 작품과 교류를 소개해 사회변혁운동으로서 민중미술운동에 대한 시각을 국제적으로 넓혀 나갔다.
둘째로는 민족미술 대토론회를 정례화시켜 조직운동의 방향과 창작론, 미술의 대중화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지역 미술인들과 연대를 강화해 나간 점이다. 이 대토론회가 지금까지도 해마다 민미협의 정기 행사로 이어진 것은 이처럼 출범 때부터 그 중요성이 높게 평가받아온 덕분이다.
셋째로는 민미협의 전시공간인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운영했다. 그림마당 민은 많은 운영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원 모두가 힘을 모았지만 이를 총지휘한 것은 당연히 사무국장인 용태 형과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유홍준 선배였다. 나는 지금도 이 두 선배의 콤비 플레이가 없었다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이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때 ‘민미협·그림마당 민의 1년 결산 대차대조표’(86년 12월15일)를 보면 총수입과 총지출이 각각 3352만원이었다.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약 2억원에서 3억원은 될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든 것은 회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이지만 그 출발 시점에 용태 형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 6월항쟁과 민예총 결성의 모색
87년 민미협 제2기에 들어서면서 용태 형은 나를 사무국장으로 추천했다. 돌이켜보면, 앞서 86년 수많은 일들이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에서 벌어졌고 용태 형은 과로로 인해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마침 평론가 엄혁의 주선으로 캐나다 토론토의 에이 스페이스 화랑에서 ‘김용태·김봉준·박불똥 3인 초대전’(1987)이 이뤄졌고, 이어서 3월에는 뉴욕의 마이너 인저리 화랑에서 초대전이 잡혀 있었다. 용태 형은 3월 뉴욕 전시를 위해 출국했고 전시가 끝난 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국청년연합을 이끌고 있던 윤한봉(작고) 선배와 만나 <뉴욕 민중판화전>을 기획했고, 그 수익금을 민미협에 보내주기까지 했다. 어디를 가나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용태 형의 성격이 잠깐 다니러 간 이국땅에서 민중판화전까지 주선한 것이다.
87년 3월 민미협이 고 박종철군 추모를 위한 <반고문전>을 열자, 경찰은 그림마당 민을 봉쇄하고 작품 30여점을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4월 전두환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4·13 호헌조처’를 발표했다. 민미협은 즉각적으로 ‘우리 모두의 소망을 모아서 어둠을 밝히자’라며 ‘시국에 관한 237 미술인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어서 민미협을 포함한 문화 6단체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 조작 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후 6월항쟁까지 군부독재 타도를 향한 투쟁의 열기는 뜨거워만 갔다. 반고문전부터 6월 투쟁까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이때처럼 바빴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뉴욕에 가 있던 용태 형이었다.
이처럼 국내 사정이 급박하고 점점 치열해지자 용태 형은 뉴욕 전시를 마치자마자 귀국했다. 그리고 민미협과 문화 6단체의 투쟁에 힘을 보탰고 직접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87년 대선이 야권분열에 의한 민주정권 교체의 실패로 막을 내렸고, 용태 형은 뭔가 모색을 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문화예술인들의 역량을 모아 민예총을 건설해야겠다는 것이다.
홍선웅 판화가·전 민예총 대변인
북쪽 고위급 인사도 녹인 용태형의 ‘바둑 회담’
90년대 예술 교류때 친화력 발휘
2002년 금강산 해맞이 축제 때는
찝차 내린 북쪽인사가 “형님” 인사
몇년뒤 TV보며 “그 친구 장관급 됐네”
금강산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 성공적 개최를 위한 해맞이 축제’가 열린 2002년 1월1일 아침 해금강에서 민예총 대표단인 임옥상(왼쪽부터)·김정헌·김용태·홍선웅씨가 함께했다. ‘용태 형’의 손에 든 술은 춤 공연과 함께 단상에서 축제 선언을 위해 준비해 간 술이다. 사진 홍선웅씨 제공
“두 점 깔아, 형.” “두 점이라니, 니가 깔아야지!” “어, 내가 아마 2단인데…형!”
‘현실과 발언’ 동인인 조각가 심정수씨가 ‘용태 형’과 맺은 인연은 ‘바둑 이야기’로 시작한다. “1980년대 중반 나는 그래도 20년가량 되는 기력이었지만, 용태는 만년 7급으로, 내게 여섯 점 깔고 배우는 처지였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의 바둑 실력은 일취월장을 거듭했다. 신경림 선생, 임재경 선생, 원동석 선생 등등과 호적수가 되어 그 실력이 나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그는 ‘민예총’ 중심으로 해마다 바둑대회를 열고 바둑을 통한 친목과 결의를 다졌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고 김용태 선생과 ‘바둑’은 ‘낮술’만큼이나 떼어놓을 수 없는 일상이었다. 그에게 바둑은 인간관계를 맺는 디딤돌이자 세상사를 풀어가는 축소판이었다. 특히 민예총을 꾸려내고 문화판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해낸 그의 안목과 끈기는 바둑판에서 수담을 나누며 쌓은 덕목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84년 무렵 인사동에 있던 원동석 선생의 미술자료실은 미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때 월간 <대학> 주간을 맡고 있던 용태 형은 반주로 낮술을 한잔하고 들러 바둑을 두던 단골손님이었다. 그런데 목포가 고향이면서 성격이 꼬장한 선비풍의 원 선생이 바둑을 두다 한 수 물리면서 “이런 썩을 놈” 하고 한마디 뱉으면 부산 사나이 용태 형은 “이놈아 저놈아 하지 마시오. 나도 낼모레면 사십이오” 하고 되씹듯 내뱉는데 반말도 아니고 경어도 아닌 말투 땜에 주위를 한바탕 웃게 만들고 했다.”
판화가 홍선웅은 “군부독재 시절 외로운 들판에서 저항의 깃발을 들고 맞서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용태형은 좋아하는 바둑을 통해서나마 나름 위안을 찾을 수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93년 민예총 주도로 남과 북, 국외동포 미술인이 참여한 <코리아통일미술전>을 성사시킬 때 ‘바둑을 통한 용태형식 친화력’이 북쪽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통했다며 몇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2002년 ‘월드컵 성공적 개최를 위한 문화예술인 해맞이 축제’를 하기 위해 금강산에 갔을 때 용태 형과 둘이서 밤 산책을 하는데 ‘찝차’에서 내린 북쪽 인사 누군가가 ‘형님’ 하고 넙죽 인사를 했고, 용태형은 늘 그렇듯 ‘그래’ 하며 말을 내렸다. 앞서 94·95·98년 남북 예술교류를 위해 세 차례 북쪽 차관급 인사와 실무회담을 했던 용태 형이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남북 장관급 고위회담 장면이 나오자 용태 형은 ‘어! 금강산의 그 친구가 이제 장관급이 되었네’ 하며 혼잣말을 했다.”
언론인 임재경 선생은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서 70년대 후반부터 관철동과 인사동 일대에서 수담을 즐겨온 용태 형과 나이차를 뛰어넘은 인연을 “말 그대로 이웃사촌이었다”고 말한다. 90년대 초반 한겨레신문 부사장을 끝으로 신문제작 현업에서 물러난 뒤 낙원동에 마련한 그의 집필실이 민예총 사무실과 100m 안팎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민예총 사무총장실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바둑판이 있었다면 내 오피스텔에는 바둑판이 아예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 그의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승률이 아니라 포석을 포함한 전반적인 판짜기에서 보여주는 남다른 면이다. 비슷한 실력의 여느 바둑꾼들에서는 쉬이 보기 힘든 멋 혹은 풍미가 깃들어 있다. ‘모양이 중요하다’는 바둑의 격언대로, 화가 김용태의 바둑에는 조형미가 깃들어 있다.”
임 선생은 ‘이웃사촌을 잘 둔 덕분에’ 99년 도쿄에서 열린 ‘원코리아 바둑대회’에 참가해 입상까지 했던 뜻깊은 일화도 소개했다. 이 대회는 민단계와 총련계로 나뉘어 반목하며 좀처럼 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었던 재일동포사회가 원코리아 깃발 아래 마주 앉은 바둑 시합이었고, 민예총은 한국기원과 함께 남북한 문화교류 차원에서 참가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