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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집요한 문공부…‘시대정신’ 2·3권은 아예 ‘판금’당했다

등록 2014-09-29 19:07수정 2015-04-27 22:20

84년 무크 <시대정신> 1권에는 문영태의 연필화 ‘심상석’, 85년 2권엔 김용신의 판화 ‘한반도여’, 86년 3권에는 ‘우리시대 성’ 전시에 출품된 유성숙의 유화 ‘대지에서’가 표지화로 실렸다. 문영태 화가 제공
84년 무크 <시대정신> 1권에는 문영태의 연필화 ‘심상석’, 85년 2권엔 김용신의 판화 ‘한반도여’, 86년 3권에는 ‘우리시대 성’ 전시에 출품된 유성숙의 유화 ‘대지에서’가 표지화로 실렸다. 문영태 화가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⑫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아홉번째로 화가 문영태씨가 ‘시대정신’과 그림마당 민 시절의 활동과 일화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박인배, 심광현, 이종률, 조성우,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83년 ‘시대정신’ 첫 전시회 뒤
2회부터는 무크지도 함께 출간
2권에서 ‘해방의 미학’ 특집 싣고
3권 성의 상품화·성폭력 문제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 다뤄

부산 강도전·광주 자유미술인회 등
지방 미술운동에도 교두보 역할
문공부, 책 출간 때마다 압수·수색
저자 등 구속…아예 폐간시키기도

86년 ‘그림마당 민’ 경영난 때
“폐쇄 대신 개인에게 맡기자” 하자
용태 형 “의견 낸 사람이 운영해라”
결국 87~88년 관장직 맡게 돼

■ 최초의 민중문화운동 전문지 ‘시대정신’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30년이 훌쩍 넘었다. 1983년 ‘시대정신’ 첫 전시회가 서울 관훈동의 제3미술관에서 열렸다. ‘현실과 발언’과 같은 동인회원전은 아니었고 뜻 맞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 데 모은 기획 주제전이었다. 서울·광주·부산·제주 등 전국 곳곳의 작가들이 한데 모여 성황을 이뤘다.

이를 계기로 첫 회에는 팸플릿에 작가들의 작업일지를 가볍게 담았지만, 84년 ‘시대정신’ 2회 기획전부터는 전시회에 맞춰 무크지(비정기 간행물) 형태의 <시대정신>도 출간하게 됐다. 기획전은 7회까지 이어졌다.

1983년 단발성 기획전으로 시작된 ‘시대정신’은 작품 전시만이 아니라 무크지 <시대정신>도 발간해 초기 민중미술운동의 담론을 주도했다. 83년 첫 기획전의 팸플릿으로 표지에 이철수 판화가 실렸다.
1983년 단발성 기획전으로 시작된 ‘시대정신’은 작품 전시만이 아니라 무크지 <시대정신>도 발간해 초기 민중미술운동의 담론을 주도했다. 83년 첫 기획전의 팸플릿으로 표지에 이철수 판화가 실렸다.
‘시대정신’이 지향한 목적은 당시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미술운동을 더욱 큰 ‘문화의 힘’으로 엮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 가능한 한 인간다운 삶을 가꾸는 문화운동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래서 무크 ‘시대정신’은 당시만 하더라도 주변부 장르에 머물렀던 판화·만화·벽화·사진이 지닌 특성과 공공성을 살려, 대중들과 친근하게 접촉할 수 있고 활발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매체를 아울렀을 뿐 아니라 참여 시, 마당극, 여성 문제도 끌어들여 민중문화운동을 지향한 한국 처음이자 유일한 예술담론지였다.

이처럼 전시와 출판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시대정신은 80년대 새로운 미술운동의 소집단 모임과 구별됐다. 물론 기획위원이라고 해봤자 박건과 나, 단둘이었다. 그러나 기획전과 무크지에 참여한 작가는 물론, 평론가·시인·만화가·사진가·연희패 등등 다양한 분야 예술인의 헌신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원고료, 강연료, 교통비, 숙박비 등등 기본 사례조차 제대로 주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생색이나마 주려 해도 다들 한사코 사양했다. 그야말로 자발성으로 움직였다. 그 또한 ‘시대정신’이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상상력과 실천만이 공통된 고뇌이자 행복이었다.

나는 ‘시대정신’ 전시와 잡지 편집 과정에서 용태 형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는 남한강, 때로는 북한강의 길섶을 오르락내리락 걷고 또 걸으면서. 용태 형은 출판미술운동과 민중미술 작품 유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조언을 구할 때마다 답을 찾아주었고, 그러면 나는 또다시 의견을 묻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시대정신지 발간 때마다 문화공보부는 경찰을 앞세워 잡지를 압수·수색하거나, 저자나 출판 관계자들을 구속하기도 했고, 아예 폐간시키기도 했다. 출판기념회를 원천봉쇄하는가 하면 ‘시대정신’ 2권과 3권은 아예 판매금지를 당해 세상에 선보이지도 못했다. 미술서적으로는 처음 겪는 수난이었다.

새로운 미술운동은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의 ‘강도전’과 광주의 ‘자유미술인회’를 통해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강도전을 기획했던 박건은 80년 이후 필자와 합류해 86년까지 시대정신 전시와 시대정신지 출간 작업을 함께 해주었다. 우리는 전문 전시장이나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기를 갈망하며 대학·종교단체·노동현장 등등 지역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시와 미술교실과 강연회를 벌였다. 불과 3권에 그쳤지만, 무크 ‘시대정신’은 새로운 미술운동의 움직임을 이론과 실천으로 확산시키는 교두보 구실을 하고자 했다.

■ ‘시대정신’ 단명했으나 풍부했던 담론

84년 무크 ‘시대정신’ 창간호는 ‘삶-그 모든 방향에서 달려와 만져 보고 꼬집어 보고 껴안아 본다’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발간사 ‘힘의 문화’에서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시대정신’ 전시회는 개인 또는 민중의 삶을 오늘의 현실구조와 역사 인식 속에서 표출되어진 의식과 감각들을 모아 한 상 (밥상) 차려 많은 사람과 나누어 먹으려고 합니다. 무크 ‘시대정신’ 또한 그러한 염원에 대한 열망입니다.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의식과 형식들을 소통시킬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데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피어난 첨예한 의식들을 다시 대중 속으로 끌고 가는 기관차가 되고자 합니다.”

김윤수 선생은 권두언에서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이루는 정신이 실로 부패하고 돌이킬 수 없는 국면에 처해 있다는 통찰과 인식에서 온다. 그들의 시선은 미술사 속에 있지 않고 민족사를 겨냥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현상, 사고방식, 제도, 체제에 맞서 민족사를 주도하는, 깨어 있는 정신이야말로 시대정신”이라고 했다.

권두시를 쓴 김정환은 ‘아름다움을 위하여’라는 제목 아래 “…시대정신이여!/ 해방의 미학이여!/ 아름다움의 생애여!”라며 ‘지울 수 없는 노래’,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시대정신’ 첫 전시(83년)에 출품됐던 작품 사진과 참여 작가들의 인물도 잡지에 수록했는데, 그 작가들로는 강요배·고경훈·김민숙·김용문·김윤주·김정명·김정헌·문영태·민정기·박건·박불똥·서상환·송주섭·신학철·안창홍·임옥상·전준엽·황재형 그리고 고 오윤, 사진가로는 김영수·최민식이 들어 있다.

85년의 무크 ‘시대정신’ 2권은 ‘해방의 미학’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백기완의 ‘민족해방과 해방의 미학 -벽화 운동을 제창한다-’, 원동석의 ‘미술비평의 기능과 수용 -민중예술비평의 제기-’, 이화영이 옮긴 ‘제3세계 해방미학론’(김지하 회화론 외 130매)이 한데 묶였다. 판화는 <시민미술학교 판화전>과 <시대정신 판화전>을 함께 지상 전시함으로써 전문인·비전문인의 미술이 상호 보완하고 상응하는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민중 지향의 미술, 민중 주체의 미술이 한마당에서 출발해 전국 각 지역을 돌며 순회전을 열었다. 전시 기간 동안엔 격의 없는 토론과 비판의 장도 열렸다. 판화 좌담도 수록했는데, 판화가 홍선웅의 사회로 다섯 명의 작가(사회자·이철수·홍성담·장진영·필자)가 개인 작품의 성격, 공동창작의 가능성, 창작 주체의 확산 등을 규명하고, 지금까지의 판화 작업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사진’ 부분에서는 ‘동두천의 기념사진 -김용태의 <디엠제트>(DMZ) 작품에 붙여-’가 성완경의 글에 4장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필자는 천승세 작품집 <황구의 비명>(창작과비평사·1975)을 읽고, 친구와 함께 용산발 동두천행 시외버스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소설에서처럼, 그날 용주골에는 땡볕이 내리쬐고, 시멘트 포장길은 말 그대로 찜통이었다. ‘뭐, 시원한 것 없나요?’ 하고 구멍가게라도 들어가야 할 참이었다. 저기, 길, 끄트머리 의자에 앉은 진한 무늬 옷의 누이가 우리를 보고 “헬로, 컴 히어” 라고 소릴 질렀다. ‘황구의 비명’에서 황구는 복날이 서러운 작은 누렁이·똥개·암캐이자 기구한 운명의 여인처럼 사력을 다해 순종하고 사는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외래종 수캐의 폭력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용태 형의 사진콜라주 ‘디엠제트’는 바로 이 대목과 겹쳐지는 장면이었다.

민족미술협의회가 회원 작가들의 민중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전용 전시공간으로 86년 2월 서울 인사동에 개관한 ‘그림마당 민’은 무수한 탄압과 고질적인 경영난을 이겨내며 10년간 미술계만이 아니라 민중문화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은 민미협의 폐관 결정에 따라 97년 4월 그림마당 민의 현판을 내리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민족미술협의회가 회원 작가들의 민중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전용 전시공간으로 86년 2월 서울 인사동에 개관한 ‘그림마당 민’은 무수한 탄압과 고질적인 경영난을 이겨내며 10년간 미술계만이 아니라 민중문화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은 민미협의 폐관 결정에 따라 97년 4월 그림마당 민의 현판을 내리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만화’ 부분을 보면, 주재환의 사회로 진행된 ‘새로운 만화운동을 위하여’ 좌담에서 작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며, 만화 장르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자신들이 해야 할 작업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86년 잡지 <만화정신> 필화사건이 터져, 민미협 만화분과 위원장 손기환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당했다. 최민화는 앞서 ‘시대정신’ 2권에서 여러 편의 글을 실었는데, ‘꽃잎 끝에’라는 극화로 작가의 아픈 가족사도 드러내 보였다. 신종봉은 핵을 주제로 하는 ‘핵충 시리즈’를 선보여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멕시코 만화가 리우스의 <사회생태학>에서 옮긴 만화도 잡지에 실었다. 필자도 ‘이야기 그림에 대한 군말’로 짧은 글과 도판 10여점을 실었다. 어쨌거나 이때를 전후로 해서 <만화시대>, <만화창작>, 민미협이 엮은 정치풍자 만화집 <오- 하느님 당신의 실수이옵니다>가 잇따라 출간됐다. 개인 만화집도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무크 ‘시대정신’ 3권의 특집은 ‘우리시대의 성(性)’이었다. 화보로는 김진숙의 ‘첫날밤의 꿈’ 외 30명의 작품, ‘한국의 성미술’, ‘세계의 성미술’을 여러 장의 그림·사진·조각들로 편집해 소개했다. 미술평론가 원동석은 ‘에로티시즘의 의미 투영’과 ‘한국 춘의도의 멋’에서 “우리의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외면적 행동 밑에 감추어져 있는 생명력의 감정이 거짓 없이 노출되는 접점이라는 점에서 미학의 차원을 떠나서, 정신분석학적 흥미를 끌 수 있는 연구 대상이라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때 신문·잡지·방송·영화·포스터 등 대중매체에서 조장하는 성의 상품화, 성범죄, 권력과 재력으로 농락하는 성적 폭력, 향락산업, 매매춘, 성노예, 여성문제로서의 경제적 생산 노동의 문제, 출산·자녀 양육의 문제, 성관계의 제반 문제 등에 대한 관심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들이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영역이라고 여겼다.

특히 3권에는 미술사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을 담았다. 바로 69년 서울대에서 김지하·오윤 등이 발표한 ‘현실동인 제1선언문’으로, 우여곡절 끝에 ‘통일적 민족미술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그 전문을 실을 수 있었다. 또 연출가이자 연희광대패 대표인 임진택의 김지하 원작, 연희광대패의 공동창작인 마당굿 대본 <밥>과, 미술평론가 최열의 ‘80년대 미술운동의 한계와 극복’, ‘민중미술의 논리Ⅰ’도 실었다.

민미협 사무실도 겸했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87년 1월 초 시무식 모습. 앞줄 왼쪽 끝이 유홍준 교수, 바로 뒤에 김정헌 교수와 김용태 당시 민미협 사무국장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민미협 사무실도 겸했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87년 1월 초 시무식 모습. 앞줄 왼쪽 끝이 유홍준 교수, 바로 뒤에 김정헌 교수와 김용태 당시 민미협 사무국장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 그림마당 민의 마당쇠 자임하다

내가 용태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인사동 길목의 단출한 2층에서 형이 화랑을 운영할 때였는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뒤 세월이 한참 흘러 86년 개관한 그림마당 민이 두 해를 채 못 넘기고 안팎의 여러 사정으로 경영난에 부닥쳤을 때 전시장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대부분의 위원들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나는 폐쇄보다는 개인에게 운영권을 맡기고, 민중미술협의회(민미협)가 관여하지 않는다면 잘 운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늘 그렇듯 “그럼 그 안을 낸 사람이 맡아서 운영해 보는 것은 어떤가!” 해서, 그야말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87~88년 두 해 동안 관장직을 맡게 됐다. 나는 그림마당 민의 마당쇠 소임을 다하겠노라고 결심했다.

때마침 88서울올림픽 전후로, 전세계 언론에서 서울로 몰려와 취재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덕분에 그림마당 민도 자주 취재 대상이 됐는데, 특히 통독 이전 서독 매체의 열성에 탄복하기도 했다. 대관료와 더불어 유홍준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좌와 ‘소장 미술도서전’이 성황리에 열린 덕분에 운영비의 일부를 채울 수 있었다. 젊은 영화인들이 전시장을 토론과 영화 상영의 장소로 즐겨 대관해주기도 했다.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열리던 모든 전시들이 다 소중했지만 그 가운데 기억에 뚜렷이 남은 전시들이 있다. 고 장일순 선생의 한살림운동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이 가수 김민기의 주선으로 열려, 수많은 정치·종교·문화계 인사들이 찾았고, 고 김영수 형의 ‘고문전’이 전시장 벽면을 검정 천으로 덮고, 사진을 진열해 독특하게 집중도를 높였다. 주한서독대사관 문정관이었던 울브리히가 소장하고 있던 중국의 수인목판화전도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전시였다.

그 시절을 돌이켜볼 때마다 떠오르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어떤 이가 저기 뭘 짊어지고 꺼덕거리며 오는 꼬맹이를 보고 물었다. “네가 짊어 메고 가는 게 뭬냐?” “망태요”, “그 속에 든 게 뭬냐니까?” “생태 말린 황태요”, “그래, 밥은 먹었느냐?” “여태요”, “어허! 이 골짜기에 아는 이는 있느냐?” “환쟁이 영태요? 글쟁이 석태요?”, “너는 누구냐?” “용케도 살아 있는 용 말린 용태요.”’

그런 용태 형이 떠난 뒤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85년 어느 날 그림마당 민에서 오윤의 두꺼운 판화집 <칼노래>를 정성스레 편집하던 용태 형이 말했다. “얼마 전 윤이와 같이 건강검진 했는데, 윤이는 아무 문제 없고, 내만 조심하라 하더라….” 그러나 오윤은 이듬해 마흔한살 나이에 홀연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남겨진 용태 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용케도 술과 돌과 더불어 한 세대를 더 뒹굴었다. 큰 바위 하나 바둑돌 될 때까지.

문영태 화가·전 그림마당 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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