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개막한 ‘코리아통일미술전’ 행사에서는 임진택의 판소리, 강혜숙의 살풀이춤, 안치환의 노래공연 등 남쪽의 민중문화도 소개했다. 북쪽 잡지 <조선화보>(93년 12월호)에 실린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16)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열여섯번째로 미술평론가 심광현 교수가 ‘코리아통일미술전’ 등 민예총 시절 뒷얘기를 들려준다. 이어 작가 황석영씨가 마무리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강요배 ‘한라산’ 최하택 ‘백두산’
입구 두 그림 앞 기념촬영 줄이어
거칠고 현대적인 남쪽 그림과
밝기만한 북쪽 그림 이질감 컸지만
보해소주·고려인삼주 섞은 통일주에
‘우리의 소원’ 부르며 융화 ■ 기적처럼 열린 첫번째 ‘코리아통일미술전’ 1993년은 수십년간의 군부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로 전환이 이루어진 첫해라는 점에서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하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시작된 해였다는 사실은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박근혜 정부 들어 친일과 군부독재를 다시 합리화하고자 역사교과서 왜곡까지 자행되고 있지만, 그 모태라 할 김영삼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고, 자동차 천만대 시대가 열리면서 소비문화가 만개하기 시작한 해였다. 그런 점에서 93년은 문화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정치적 변화가 역사적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국민적 관심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다면, 문화의 변화는 잊혀진 문화유산을 직접 찾아다닐 수 있는 물리적 여건을 제공했다. 이런 변화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한국 영화 100만 관객 시대를 최초로 열고,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100만부 이상 팔리는 경이로운 기록들로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신세대 문화’가 폭발했는데, 강렬한 전자 비트와 꽹과리의 역동성을 결합한 음악적 표현에 문제적 교육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정부의 공식 승인을 얻어 이뤄진 남북예술교류전인 <코리아통일미술전>도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93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기적’처럼 열렸다. 물론 이 ‘기적’은 92년부터 행사를 준비해온 김용태(용태 형) 민예총 사무총장의 선견지명과 집요함의 결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특유의 개방적 정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기에, 또 20년이 넘게 지난 오늘까지도 ‘제2회 전시’가 열리지 못하고 있기에 실제로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전시 기간 동안 도쿄에서 진행된 남북 대표자회의에 실무자로 참석했던 나 역시 당시에는 이후 교류가 계속될 것으로 알고 마냥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 일은 정말 기적같이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린 신기루 같은 사건이었다. 민예총에서는 88년 결성 이후 거리투쟁으로 일관하다 93년 8월 사단법인으로 전환한 이후 처음으로 여는 큰 사업이었기에 통일미술전에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남과 북, 그리고 총련의 문예동 소속 작가들의 미술 작품까지 모두 94점을 소개했다. 거기에 임진택의 <오적> 판소리 공연과 강혜숙의 살풀이춤, 안치환의 노래 공연과 문예동의 국악 연주를 곁들인 복합행사로 기획했다. 10월12~16일 도쿄에 이어 18~23일 동포들이 많은 오사카에서도 열어 최대한 풍성한 잔치로 연출했다. 개막 당일부터 고조된 흥분과 긴장은 남한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조선대를 방문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서도 남북의 첫 문화교류 행사를 주요 뉴스로 소개한 덕분에 전시장은 내내 관객들로 붐볐다. 나는 도쿄 전시만 보고 돌아와야 했지만, 4박5일 짧은 체류 동안에도 감격스런 일화의 연속이었다. 특히 개막 당일의 기억이 강렬했다. 저녁 축하 만찬에서 북쪽 만수대창작사의 최하택 유화창작단장이 “분단 반세기 만에 북과 남, 해외 미술가들의 만남의 감격이 너무 커서 야밤에 지진이 일어난 것 같다. 이번 만남의 순간은 너무 짧지만, 이 감격의 순간에서 나온 에너지를 우리 미술가들이 통일의 불씨로 이끌어 올리자”고 연설해 좌중을 웃음과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남쪽 대표로 나선 화가 임옥상도 “비무장지대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새들처럼 남과 북의 미술가들이 교류의 확대를 통해 통일을 앞당기자”고 답사를 해 열띤 박수를 받았다. 곧이어 우리가 가져간 ‘보해소주’와 북쪽에서 가져온 ‘고려인삼주’를 섞어 만든 통일주를 마시며 150여명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의 소원’과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며 연회장을 돌아 열기로 가득 채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코리아통일미술전’에서 남·북·재일동포 대표들이 공동 기자회견과 교류협력 조인을 한 뒤 연대의 포옹을 하고 있다. 남쪽 화가 강요배의 ‘한라산’(뒷벽 왼쪽)과 북쪽 만수대창작사 유화창작단장인 최하택의 ‘백두산’ 그림 등을 배경으로, 왼쪽부터 북쪽 대표 최계근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장, 남쪽 대표 김용태 민예총 사무처장, 홍영우 총련 문예동 위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화내는 대신 협력 후원
10년이면 운동판도 변하지만
변하지 않은 건 그의 넉넉한 품새 ■ 문예아카데미·민족예술대학 그리고 문화연대 민예총은 사단법인으로 전환 뒤 주요 사업으로 계획한 남북 문화교류가 94년 들어 돌연 표류하게 되자 수차례 워크숍을 열어 문화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중문화운동의 전반적 쇠퇴 속에서 소비자본주의와 신세대 문화의 확산 같은 문화정치적 상황과 80년대 문화운동의 오랜 관성 사이에서 점점 벌어지는 간격을 좁히기는 쉽지 않았다. 95년 초 세계무역기구(WTO) 창설과 함께 본격화된 세계화의 열풍, 96년 말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 진입과 함께 이뤄진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돈’(자본)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문화운동의 흐름은 한층 급속히 퇴조했다. 그러는 사이 94년 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전>이 열리고, 95년에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개최되면서 민중문화운동의 제도권 진입이 본격화되었다. 92년 문예아카데미 기획실장, 93~94년 민예총 편집실장을 맡으며 용태 형과 자주 만났던 나는, 95년 ‘광주비엔날레 졸속개최 반대운동’을 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 미술판을 떠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용태 형과도 뜸해졌다. 그 몇년 뒤 97년 무렵 사이 용태 형은 다소 침체된 문예아카데미의 재활성화를 위한 기획 책임을 다시 내게 맡겨주었다. 도정일 선생이 새로 교장을 맡고 강내희 교수, 문학평론가 이성욱(작고) 그리고 내가 기획위원을 맡아 기존의 문학과 예술 중심의 대중강좌를 문화연구·철학과 접맥하여 새롭게 혁신하는 일을 도모했다. 그런 와중에 용태 형이 새로 벌린 큼직한 기획이 바로 ‘민족예술대학’ 설립 프로젝트였다. 나는 이번에도 용태 형에게 ‘차출’되어, 장의균 형의 사무실에서 진행한 기획회의에 참여해 교육과정 기본계획을 구성하는 일을 맡았다. 대학의 재원조달 책임을 자처했던 제정구 의원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결국 일이 무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85년 민족미술협의회 창립 때 용태 형과 처음 만나 직접 머리를 맞대고 같이 구상했던 수많은 일들의 마지막 과제였다. 그렇게 형과 일로 맺어졌던 인연은 99년 가을 내가 도정일·강내희 교수, 화가 김정헌, 건축가 정기용, 소설가 조세희, 출판인 김경희(지식산업사) 등과 함께 ‘문화개혁시민연대’(현 문화연대)를 창립하게 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98~99년은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를 고비로, 공공영역 전체를 강타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사회문화적 연대의 필요성과 함께 문화영역 자체에서도 사회적 감시와 비판의 필요성이 긴요해진 상황이었다. 또 1200개가 넘는 국공립 도서관·박물관·미술관·공연장·문화의집 등의 운영이 여전히 군부독재 시절의 병폐에 따라 관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민주적 개혁이 시급했지만, 예술운동조직이었던 민예총에서 이런 일들을 모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의 영향 속에서 문화와 경제의 융합 현상이 나타나고, 문화관광과 문화산업과 문화체육이 정부 문화정책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던 상황 변화에 대한 비판과 진보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예술인들 말고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가능한 새로운 문화운동조직의 설립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 진단과 문제의식에 대해 용태 형은 적극 동의하고, 설립 준비를 위한 여러 워크숍과 토론회가 민예총 강당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문화연대가 초기의 힘든 과정을 무난히 통과한 것은 용태 형의 ‘통 큰’ 운동정신 덕분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경쟁관계가 될 수도 있을 ‘딴살림’을 차리겠다고 나섰음에도 용태 형은 다른 이들처럼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민예총 주요 회원들의 문화연대 참여를 돕고 두 단체가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88년 민예총 창립 이후 단일한 흐름을 유지해온 진보적 문화운동은 ‘민예총의 예술(문화)운동’과 ‘문화연대의 사회적 문화운동’이라는 두 개의 트랙으로 분화, 상호 협력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 운동판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본다. 올봄 홀연히 떠나간 용태 형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풀뿌리같이 끈질긴 생명의 힘을 보듬고 일깨워 주위를 밝게 타오르게 하는 운동가의 넉넉한 품새가 그것이다. ‘고유명사 김용태’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지만, 모두를 아우르는 품이 넉넉하고 끈질긴 운동가를 가리키는 ‘보통명사 용태 형’은 변치 않고 우리 곁에 남아, 퇴행하는 세월에 주눅 들지 말고 이를 가로지를 새판을 짜보라고 독려하고 있는 것 같다. 심광현 미술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그땐 나밖에 없었어…처음엔 무서워해서들” 용태형 총련·북 예술인과 접촉 성사
보수 언론서도 “교류 물꼬” 대환영
행사 마지막날 남쪽 서기 안 나타나
달리는 전철서 ‘협약 발표문’ 작성 1993년 10월 일본에서 열린 <코리아통일미술전>은 비록 제3국이었지만 분단 이후 남북 미술인의 첫 문화교류라는 역사적 상징성 덕분에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 만큼 갖가지 화제와 뒷얘기도 풍성했다. 애초 사상 첫 남북 미술전은 92년 7월 도쿄에서 <일본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전>(JAALA) 기념행사로 ‘통일을 위한 남북 미술인’이란 제목으로 기획됐다. 하지만 일본 쪽의 제안에 북한이 화답을 하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자라전’에 갔더니, 재일 조총련의 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미술위원장인 조선화가 홍영우(인민예술가) 선생이 와서 남북 미술교류를 하자는 제안을 먼저 했어. 자기들이 주선을 하겠노라고. 그래서 좋다고 일차적인 약속을 했고, 그 뒤 나와 박인배가 일본에 가서 문예동 사무국장 김정수 등과 여러번 만나 협상을 했고, 일정이 잡혔고, 북쪽에서도 좋다고 해서 전시를 하게 된 거야. 물론 나는 처음부터 남쪽에서, 서울에서 하자고 고집을 했지만 북쪽에서 곤란하다 하더라구.” 고 김용태 선생은 “문민정부 들어 북한 예술인들을 만나러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처음에는 일단은 (국가보안법 등) 무서워해서들…”이라고 그때 분위기를 회고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도쿄에서 일주일, 오사카로 옮겨 일주일 통일미술전을 했는데, 재일동포들, 특히 조선대 미술학과 학생들이 거의 헌신적으로 도왔어. 또 한가지 극적인 장면은 남북한 대표들이 조선대를 처음으로 함께 방문한 것이었어. 남쪽 기자들에게도 과감하게 문을 열어주고 물론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 ‘통일미술전’은 당시 국내 보수 언론에서도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텄다’며 이례적으로 대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때 민예총 편집실장으로 도쿄에 동행했던 심광현은 ‘술 때문에 빚어진 실수담’을 <산포도 사랑…>에 자진 고백해 놓았다. “도쿄 일정을 마무리하고 마지막날 남북 대표단이 만나 앞으로 남북 문화교류의 틀이 될 최초의 교류협약서에 서명하기로 했다. 그런데 전날 밤새 술을 마시는 바람에 난 그날 행사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 일주일 내내 들떠 있던 내 심리를 예측한 형이 미리 금주령을 내렸음에도 … 신학철 선생님, 강요배 형과 함께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길거리에서 날이 샌 줄도 모르고 마셨던 것이다.” 협약식 기자회견 발표문을 작성해주기로 한 남쪽 대표단의 서기가 사라졌으니 용태 형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도쿄에서 마지막날 아침에 광현이가 사라진 거야. 기자회견 다 끝나고 저녁 뒤풀이 때 나타나더라고. … 할 수 없이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내가 직접 땀을 뻘뻘 흘리며 메모지에 기자회견 발표문을 썼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하지만 평소에도 곧잘 이견을 내고 반대를 고집했던 그에게 용태 형은 ‘기고만장’이라 놀리곤 했지만 화를 낸 적은 없었단다. 이후 문화연대로 갈라지면서 개인적 친분을 쌓지 못했다는 심광현은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용태 형의 정신으로 일을 꾸려나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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