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의 경인미술관에서 크로스오버 아티스트 양방언씨를 만났다. 북한 국적의 아버지, 남한 국적의 어머니를 둔 그는 국악과 클래식을 넘나들고, 한국 지역의 정서를 음악에 담는다. 미술관 경내의 전통찻집 마루에 앉은 그의 옆에 고양이가 다가와 잠이 들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경계인: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 (표준국어대사전)
사전적 의미에 따르자면 그는 경계인(marginal man)이다. 일본에서 ‘양’(梁)씨 성을 가진 조선 사람으로 태어났다. 초중등 과정까지 총련계 학교를 다녔지만 97년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했다. 일본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지만 전업 뮤지션의 길을 택해 오늘날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넘나드는 유명 아티스트로 우뚝 섰다. 그의 음악은 클래식에서 출발해서 록과 뉴에이지, 국악과 영상음악, 게임음악까지, 종횡무진 장르와 매체를 가로지른다. 국경과 이데올로기, 클래식과 대중문화, 전통과 글로벌 사이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경계를 타고 놀며 새로운 혼종(hybridity)의 질서를 창조하는 사람, 그는 크로스오버 아티스트 양방언(54)이다.
11월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그의 공연 ‘에볼루션 2014’를 봤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며, 예정된 시간 90분을 훌쩍 넘겨 두시간 가까이 진행된 열띤 무대였다. 부산아시안게임 공식 주제곡인 ‘프런티어’를 비롯해, 애니메이션 음악 ‘새벽의 연화’, 최근 강원도 정선을 직접 답사하고 작곡했다는 ‘정선아리랑’과 제주도 해녀박물관의 의뢰를 받고 쓴 ‘해녀의 노래’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16인조 현악 주자들과 국악밴드, 일본과 미국에서 온 퍼커션들, 드럼과 기타, 젊은 판소리꾼의 목소리가 화려한 조명 속에서 양방언의 피아노 선율과 함께 어우러졌다.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그의 공연에 뜨겁게 화답했다.
사흘 뒤 서울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공연이 끝나고 피로가 겹친 탓일까, 감기 몸살로 앓다 나왔다는 그는 우리 일행을 보자, 황급히 마스크를 벗으며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는 통역 없이 한국말로 진행되었다.
한국 해녀가 일본 해녀보다 기질이 세다?
-공연 잘 봤다. 제주에서 오신 해녀분들이 ‘해녀의 노래’를 직접 노래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분들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 있나?
“물론이다. 작곡 의뢰를 받은 뒤에 해녀분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들었다.”
-제주도 방언 때문에 대화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분들은 표준어도 하시니까. 오히려 내 말이 사투리 같지 않나?(웃음)”
-어떤 얘기를 나눴나?
“그간 ‘해녀의 노래’가 ‘동경행진곡’(1929년 개봉된 일본 영화 주제가) 선율을 딴 것이어서, 새로 음악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그리고 노래가 너무 슬프거나 어둡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웃으시면서 ‘우리들 잘 산다’고,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늘 힘든 건 아니라면서….”
양방언은 해녀들의 바람대로 밝고 활기 넘치는 선율을 만들었고, 그 곡에 소설가 현기영이 노랫말을 입혀 2013년 ‘제1회 제주판타지’ 페스티벌에서 발표했다.
‘나는 해녀, 바당(바다)의 딸/ 만경창파 이 한 몸 내던졍/ 바당 밧듸 농사짓젠/ 열 길 물속을 드나들엄쪄/ 우리집 대들보, 나는 해녀/ 가슴엔 테왁 손에는 미역낫/ 밀물과 썰물, 해녀 인생/ 어서 가자 이어싸 물때가 뒈엇쪄…’(‘해녀의 노래’ 양방언 작곡, 현기영 작사)
-일본에도 해녀가 있는데 한국 해녀와 비교해 보면 어떤가?
“바다에서 물질하는 건 같은데, 일본 사람들과 우리들 기질의 차이랄까, 제주 해녀들이 훨씬 세고 과감하다.”
-기질이 세다고?
“너~무 쎄다.(웃음) 작년에 제주도에서 도립교향악단하고 초연을 했는데 무대에서 제주엠비시(MBC) 아나운서가 ‘해녀분들 소감이 어떠세요?’ 하니까, 마이크를 빼앗아 들고는 오늘 너무 기분 좋고, 양방언이 노래를 만들어서 행복하다고…. 그러면서 마이크를 안 주시는 거다.(웃음) 그렇게 세고, 말도 많고, 과감한 게 제주도 해녀분들의 매력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공연 십여일 전 완성한 ‘정선아리랑’도 첫선을 보였는데, 스케일 크게 다가오는 아리랑의 애절함이 가슴 뭉클했다. 작년 초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보인 ‘아리랑 판타지’, 소치겨울올림픽에서 폐막식 공연으로 올린 ‘아리랑’에 이어서 ‘아리랑’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고 있는데.
“난 중학교까지 총련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아리랑’ 선율이 익숙하긴 했지만, 큰 관심을 갖고 있진 않았다. 근데 재작년인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아리랑’을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연주할 기회가 생겨 작업을 해보니 너무 매력적이더라. 그 음악을 들으셨는지 대통령 취임식의 총감독을 맡으신 윤호진 감독이 내 ‘아리랑’이 남하고 좀 다른 것 같다고, 같이 해보자고 해서 취임식 공연을 했고. 이어서 소치에서도 했다.”
한국의 정서를 한과 농축된 슬픔이라고 규정하는 건 일제가 주입한 식민사관이라고 반발하면서도, 막상 우리 스스로 ‘한국적인 것’을 그리고자 할 때 그 한의 정서 안에 갇혀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양방언의 ‘아리랑’은 선입관도 고정관념도 없다. 부드럽고 날렵하면서도 호방하고 역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 양방언 스타일의 ‘한국 음악’이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 건, 2006년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영화음악을 맡으면서부터다. 처음엔 막막했다. ‘나는 국악도 모르는데 한국인의 깊은 심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임권택 감독한테 하소연을 하니 ‘당신이 할 만하니 맡긴 것’이라면서 두가지를 부탁했다. 촬영장에 자주 올 것, 그리고 술 먹고 갈 것!
-술 먹고 가라고?
“술 많~이 먹었다. 정말 많이 주셨다.(웃음) 이 장면은 이렇다, 저렇다, 거의 설명을 안 해주시고 가만히 있게만 하는데 그러니까 더 열심히 보게 되더라. 정말 대가(大家)란 그런 분인 것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보고 데모(샘플 음원)를 만들었는데 아주 좋다고, 그런 것을 자기들도 원한다고 하셔서 런던심포니와 녹음했다. 내 생각엔 그런 것 같다. 우리 (고유의) 정서를, 한국과 외국의 중간에 서 있는 누군가가 바라보고 거기서 뭘 만들어낸다면, 그런 것들이 자꾸 쌓인다면, 그것이 결국엔 한국 안에서 나오는 것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제주 출신 북한 국적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 남한 국적 어머니
자신은 북한 국적 취득했지만
해외 음악활동에 족쇄로 작용
아버지 돌아가신 뒤 한국 선택 의사로 일하다 전업뮤지션으로
클래식서 록, 국악, 게임음악까지
경계 타고 놀며 혼종의 질서를
창조하는 크로스오버 아티스트
해녀와 아리랑도 새롭게 재해석 인생을 바꾼 총련계 학교의 체벌 “한국과 일본의 중간에 선 한국 사람”.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양방언은 제주도 출신의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30년 무렵 11살 어린 나이에 가난을 피해 제주도를 등지고 일본 땅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응시료도 없어 돈을 꿔서 입학시험을 볼 만큼 가난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일본 사회에 발을 디디고 살아남기 위해 그는 의사가 되었다. 1947년 처갓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의주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고 그로부터 13년 뒤인 1960년 1월1일, 넷째와 8년이나 터울이 지는 늦둥이로 양방언을 낳았다. -한반도 최남단 제주도 아버지와 최북단 신의주 어머니 사이에서 1월1일 태어났다. 무슨 ‘왕의 탄생 신화’도 아니고, 굉장히 드라마틱한 출생이다.(웃음) “신기한 일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아버지는 국적이 북한이었고 어머니는 그 반대였다.” -아, 어머니가 북한, 아버지가 남한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국경은 넘을 수 있어도 총련계와 민단계가 그렇게 연애를 해서 혼인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데.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열심히 설득하셨던 것 같다.(웃음)” -그럼 어머니는 결혼 후 국적을 북한으로 바꾸셨나? “(고개를 설레설레) 그것 때문에 더 복잡한 거다. 두분 다 (각자의 국적을) 유지하고 사셨다. 외갓집 식구들의 힘도 셌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가 (재일 거류) 민단 쪽에서 힘을 가지신 분이어서,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니까.” 남한 국적의 신의주 어머니와 북한 국적의 제주도 아버지. 남도 북도 아닌 일본 땅에 살면서 두분은 남과 북, 어느 고향에도 발을 디뎌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평생 제주도를 그리워하며 사셨지만 1996년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제주도를 다시 찾지 못했다. -아버지한테 제주도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나? “맨날 똑같은 얘기를 한 백만번은 들었을 거다.(웃음) 바다가 예쁘고 공기가 좋고 생선이 맛있고… 어머니하고 제일 많이 다툰 것도 제주도 음식 때문이었는데, 제주도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어머니는 신의주 사람이라 절대 못하는데.” -뭘 잡숫고 싶다고 하셨나? “‘자리’라는 게 있다. 작은 생선. 그런 것 좀 어디 가서 사 오라고, 근데 어머니는 그게 음식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다. 사람이 먹는 게 아니라고.(웃음)” -(웃음) 어머니는 그런 음식은 드셔본 적도 없으실 테니. “뼈를 먹고 있다고, 어떻게 생선뼈를 먹냐고….(웃음)” 제주도 음식 때문에 티격태격하시는 것 빼고는 부모님은 의가 좋으셨다. 아버지는 성실과 신의로 어디서든 신뢰를 받았고, 어머니는 영양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아버지 병원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공존’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투철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일본 사람들도 돈을 안 받고 치료해주고, 조선인학교를 세우는 데 사재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당시에는 재일동포의 다수가 총련 소속이고 민단계가 오히려 소수였던 걸로 알고 있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당시 많은 재일동포들이 아버지처럼 총련계로 쏠렸던 이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나?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총련계는 동경 도내에 조선인학교를 7~8개나 가지고 있었는데 민단계는 그 당시 2개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그만한 큰 학교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힘이 크다는 뜻이었다. 압도적이었다.” 아버지는 다섯 남매를 모두 총련계 학교에 보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큰형과 막내 누나는 의사가, 둘째와 셋째 누나는 약사가 되었다. 막내 방언도 순조롭게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는 듯 보였다. 일본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취과 의사로 1년 근무한 뒤, 도쿄대병원 정형외과로 발령을 받을 때까지는. 1985년 어느 날, 그는 홀연히 짐을 꾸려 가출을 했고 전업으로 음악을 하기로 맘먹는다. 중학교 때부터 마음을 흔들던 강렬한 유혹, “음악을 하면서 평생 살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작정 따르기로 한 것이다. -언제부터 음악인으로 살고 싶단 생각을 한 건가? “형과 누나들이 다들 음악을 좋아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나도 어려서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배웠는데 중학교 때 라디오에서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을 듣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평생 이런 음악을 하면서 살고 싶다 느꼈고, 음악에 대해서 아주 큰 매력, 아니 매력을 넘어서서 좀 위험하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아, 여기 빠질 것 같다. 여기 빠지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되나 걱정이 될 만큼…. 그 정도로 멋있었다.” -당신이 쓴 에세이집 <프런티어, 상상력을 연주하다>를 보면 중학교 때 “악의 상징인 서구음악을 좋아하고 팝 앨범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교장실에 불려가 “반동분자” 소리를 듣고 뺨을 맞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일이 진짜 있을 수 있나? “당시 총련계 학교에선 교사의 체벌이 아주 흔했다. 완전 군대 같았다. 늘 맞아왔기 때문에 뺨을 맞은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이런 이유로 맞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 큰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정말 ‘심~각하게’(강조하며)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을 국가나 제도가 사람한테 포기시킬 수 있는가? 그 일을 아버지나 가족한테도 털어놓지 못할 만큼 정말 깊이 고민했다. 그날부터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이상하게’ 된 거다.(웃음)”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 자의 비애, 그리고… 음악은 취미로 하는 거라고 믿었던 아버지로선, 의사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불안정하고 기약 없는 뮤지션의 길을 선택한 아들이 이해되지도 용납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양방언을 외면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에게 건넨 얘기는 단 세마디뿐이었다. “먹고는 다니는 거냐? 살아 있는 거냐? 음악 해서 먹고살 수 있겠냐?” 199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양방언은 해외로 음악 활동을 다니는 데 족쇄가 되었던 북한 국적을 버리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1998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하던 제주를 처음 찾았다. 서귀포 중문을 거니는데 어머니는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고 뺨을 스치는 달콤한 미풍에 꿈인 듯 생시인 듯, 문득 환상 속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귓가에 선명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악보로 옮겨 지은 곡이 ‘프린스 오브 제주’(제주의 왕자)다. -종교가 있나? “없다.” -아버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나? “그렇다. 항상 느낀다.” -이젠 아버지에게 충분히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닌가? “결국은 마지막까지 인정을 못 받은 상태로 아버님을 떠나보냈으니까…. 근데 기본적으로 나는 페시미스트(비관론자)는 아니다. 아버님이 하늘에서 인정해 주실 때까지 열심히 해야지. 지난번 ‘해녀의 노래’도 아버지께 들려드리고 싶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니 아버지도 혹시 좋아해 주시지 않을까. 언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쓴웃음으로 말을 삼켰다. 아버지는 엄하고 과묵했지만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적인 분은 아니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늘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어디든 뿌리내리려 안간힘 쓰던 아버지. 말년의 그는 북한의 퇴락을 목격하며 당신이 열정을 바쳤던 이상의 붕괴 앞에 절망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숙명처럼 책임을 떠안았다. 고향을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눈감으실 때까지 국적을 바꾸지도,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않았다. 부디 아들만큼은 아버지같이 살지 않기를,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마음껏 능력을 펼치라”는 뜻에서 방언(邦彦)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는 아들도 안다. -당신에게 아버지는 뭔가? “음…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가) 모국처럼 큰 존재. 크-은, 아주 큰 존재다. 모국처럼 느낀다.” -모국?
“자기 나라. 내가 속할 수 있는 내 나라. 난 속하는 데가 많지 않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북한 국적, 한국 국적… 여러 나라를 왔다 갔다 하지만 명절 때 돌아가는 고향은 없다. 젊은 시절엔 고민을 많이 했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내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한국에 와서도 이질감을 느낄 때도 있고 일본에 있을 때도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근데 아버님을 통해, 한국이란 나라에 속할 수 있다는 게 내겐 큰 행복이다. 몇 년 전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님이 내게 그런 얘길 해주셨다. ‘너 같은 사람이 재미있다. 어디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시야가 있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 그러니 불안감이나 걱정은 이제 버리라’고. 그때부터 마음이 좀 편해졌다.”
아버지 시대의 경계인들은 폐쇄적이고 강고한 구심력의 희생양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양방언 시대의 경계인들은 경계를 딛고 올라 경계를 허무는 개척자가 된다. 그의 대표곡처럼 양방언은 지금 ‘프런티어’로 진화하는 중이다.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신의주 출신 남한 국적 어머니
자신은 북한 국적 취득했지만
해외 음악활동에 족쇄로 작용
아버지 돌아가신 뒤 한국 선택 의사로 일하다 전업뮤지션으로
클래식서 록, 국악, 게임음악까지
경계 타고 놀며 혼종의 질서를
창조하는 크로스오버 아티스트
해녀와 아리랑도 새롭게 재해석 인생을 바꾼 총련계 학교의 체벌 “한국과 일본의 중간에 선 한국 사람”.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양방언은 제주도 출신의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30년 무렵 11살 어린 나이에 가난을 피해 제주도를 등지고 일본 땅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응시료도 없어 돈을 꿔서 입학시험을 볼 만큼 가난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일본 사회에 발을 디디고 살아남기 위해 그는 의사가 되었다. 1947년 처갓집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의주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고 그로부터 13년 뒤인 1960년 1월1일, 넷째와 8년이나 터울이 지는 늦둥이로 양방언을 낳았다. -한반도 최남단 제주도 아버지와 최북단 신의주 어머니 사이에서 1월1일 태어났다. 무슨 ‘왕의 탄생 신화’도 아니고, 굉장히 드라마틱한 출생이다.(웃음) “신기한 일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아버지는 국적이 북한이었고 어머니는 그 반대였다.” -아, 어머니가 북한, 아버지가 남한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국경은 넘을 수 있어도 총련계와 민단계가 그렇게 연애를 해서 혼인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데.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열심히 설득하셨던 것 같다.(웃음)” -그럼 어머니는 결혼 후 국적을 북한으로 바꾸셨나? “(고개를 설레설레) 그것 때문에 더 복잡한 거다. 두분 다 (각자의 국적을) 유지하고 사셨다. 외갓집 식구들의 힘도 셌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가 (재일 거류) 민단 쪽에서 힘을 가지신 분이어서,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니까.” 남한 국적의 신의주 어머니와 북한 국적의 제주도 아버지. 남도 북도 아닌 일본 땅에 살면서 두분은 남과 북, 어느 고향에도 발을 디뎌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평생 제주도를 그리워하며 사셨지만 1996년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제주도를 다시 찾지 못했다. -아버지한테 제주도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나? “맨날 똑같은 얘기를 한 백만번은 들었을 거다.(웃음) 바다가 예쁘고 공기가 좋고 생선이 맛있고… 어머니하고 제일 많이 다툰 것도 제주도 음식 때문이었는데, 제주도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어머니는 신의주 사람이라 절대 못하는데.” -뭘 잡숫고 싶다고 하셨나? “‘자리’라는 게 있다. 작은 생선. 그런 것 좀 어디 가서 사 오라고, 근데 어머니는 그게 음식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다. 사람이 먹는 게 아니라고.(웃음)” -(웃음) 어머니는 그런 음식은 드셔본 적도 없으실 테니. “뼈를 먹고 있다고, 어떻게 생선뼈를 먹냐고….(웃음)” 제주도 음식 때문에 티격태격하시는 것 빼고는 부모님은 의가 좋으셨다. 아버지는 성실과 신의로 어디서든 신뢰를 받았고, 어머니는 영양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아버지 병원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공존’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투철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일본 사람들도 돈을 안 받고 치료해주고, 조선인학교를 세우는 데 사재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당시에는 재일동포의 다수가 총련 소속이고 민단계가 오히려 소수였던 걸로 알고 있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당시 많은 재일동포들이 아버지처럼 총련계로 쏠렸던 이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나?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총련계는 동경 도내에 조선인학교를 7~8개나 가지고 있었는데 민단계는 그 당시 2개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그만한 큰 학교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힘이 크다는 뜻이었다. 압도적이었다.” 아버지는 다섯 남매를 모두 총련계 학교에 보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큰형과 막내 누나는 의사가, 둘째와 셋째 누나는 약사가 되었다. 막내 방언도 순조롭게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는 듯 보였다. 일본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취과 의사로 1년 근무한 뒤, 도쿄대병원 정형외과로 발령을 받을 때까지는. 1985년 어느 날, 그는 홀연히 짐을 꾸려 가출을 했고 전업으로 음악을 하기로 맘먹는다. 중학교 때부터 마음을 흔들던 강렬한 유혹, “음악을 하면서 평생 살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작정 따르기로 한 것이다. -언제부터 음악인으로 살고 싶단 생각을 한 건가? “형과 누나들이 다들 음악을 좋아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나도 어려서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배웠는데 중학교 때 라디오에서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을 듣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 평생 이런 음악을 하면서 살고 싶다 느꼈고, 음악에 대해서 아주 큰 매력, 아니 매력을 넘어서서 좀 위험하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아, 여기 빠질 것 같다. 여기 빠지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되나 걱정이 될 만큼…. 그 정도로 멋있었다.” -당신이 쓴 에세이집 <프런티어, 상상력을 연주하다>를 보면 중학교 때 “악의 상징인 서구음악을 좋아하고 팝 앨범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교장실에 불려가 “반동분자” 소리를 듣고 뺨을 맞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일이 진짜 있을 수 있나? “당시 총련계 학교에선 교사의 체벌이 아주 흔했다. 완전 군대 같았다. 늘 맞아왔기 때문에 뺨을 맞은 것 자체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이런 이유로 맞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 큰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정말 ‘심~각하게’(강조하며)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을 국가나 제도가 사람한테 포기시킬 수 있는가? 그 일을 아버지나 가족한테도 털어놓지 못할 만큼 정말 깊이 고민했다. 그날부터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가 ‘이상하게’ 된 거다.(웃음)”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 자의 비애, 그리고… 음악은 취미로 하는 거라고 믿었던 아버지로선, 의사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불안정하고 기약 없는 뮤지션의 길을 선택한 아들이 이해되지도 용납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양방언을 외면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에게 건넨 얘기는 단 세마디뿐이었다. “먹고는 다니는 거냐? 살아 있는 거냐? 음악 해서 먹고살 수 있겠냐?” 1996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양방언은 해외로 음악 활동을 다니는 데 족쇄가 되었던 북한 국적을 버리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1998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하던 제주를 처음 찾았다. 서귀포 중문을 거니는데 어머니는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고 뺨을 스치는 달콤한 미풍에 꿈인 듯 생시인 듯, 문득 환상 속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귓가에 선명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악보로 옮겨 지은 곡이 ‘프린스 오브 제주’(제주의 왕자)다. -종교가 있나? “없다.” -아버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나? “그렇다. 항상 느낀다.” -이젠 아버지에게 충분히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닌가? “결국은 마지막까지 인정을 못 받은 상태로 아버님을 떠나보냈으니까…. 근데 기본적으로 나는 페시미스트(비관론자)는 아니다. 아버님이 하늘에서 인정해 주실 때까지 열심히 해야지. 지난번 ‘해녀의 노래’도 아버지께 들려드리고 싶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니 아버지도 혹시 좋아해 주시지 않을까. 언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쓴웃음으로 말을 삼켰다. 아버지는 엄하고 과묵했지만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적인 분은 아니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늘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어디든 뿌리내리려 안간힘 쓰던 아버지. 말년의 그는 북한의 퇴락을 목격하며 당신이 열정을 바쳤던 이상의 붕괴 앞에 절망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숙명처럼 책임을 떠안았다. 고향을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눈감으실 때까지 국적을 바꾸지도, 일본으로 귀화하지도 않았다. 부디 아들만큼은 아버지같이 살지 않기를,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마음껏 능력을 펼치라”는 뜻에서 방언(邦彦)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는 아들도 안다. -당신에게 아버지는 뭔가? “음…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가) 모국처럼 큰 존재. 크-은, 아주 큰 존재다. 모국처럼 느낀다.” -모국?
이진순 언론학 박사·희망제작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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