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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나 같은 순수시인을 참여시인 만들 건가, 이 총검의 시대야

등록 2014-12-14 19:18수정 2015-04-27 22:16

왼쪽부터 김형수 작가, 고은 시인.
왼쪽부터 김형수 작가, 고은 시인.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⑤ 김형수가 묻고 고은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두번째 주자인 시인 고은(오른쪽) 선생과 시·소설·평론을 다 하는 김형수(왼쪽) 작가가 시인의 일기를 통해 회고한 작가회의 창립 초기 비화와 80년대로 이어진 문학운동의 변화 흐름 등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9일 수원 고은 시인의 자택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어 시인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고은은

고은은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52년 출가해 승려로 시작 활동을 하다 58년 처녀시 ‘폐결핵’ 등으로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첫 시집 <피안감성>, 서사시 <백두산>, 전작시 <만인보>를 비롯한 시집 70권, <고은시전집>, <고은전집> 등 모두 150여권의 저서를 냈다. 세계 25개 국어로 시와 소설이 번역 출판되며 한국 대표 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히고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를 비롯해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예총 초대 회장 등을 지내며 민족문학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 시대 현실에 맞서 치열한 참여 활동을 해온 진보진영의 원로다.

단국대 석좌교수로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위원장, 유네스코 세계 시 아카데미 명예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김형수는

김형수는 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85년 <민중시 2>를 통해 시 ‘배고픈다리’를 추천받았고, 88년 <녹두꽃>을 창간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96년 <문학동네>에서 소설로도 등단했다. 시집 <빗방울에 대한 추억>,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반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등을 냈고, <문익환 평전>을 쓰기도 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과 치열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새로운 담론 생산을 통해 80년대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논객으로 불리며, 작가회의 사무총장 시절 한-몽골 작가 교류를 주도하기도 했다.

2012년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시인 고은과의 대화>를 정리해냈고, 몽골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조드-가난한 성자들> 출간 기념으로 고은 시인과 토크강연회를 하는 등 문단 선후배로서 각별한 교분을 나눠왔다.

70년대 벽두 한 노동자의 분신에
내 심신이 흡수되는 체험을 했어
야, 우리도 뭔가 결의해야 한다고
신경림한테 역설하고 의논했지
작가 선언 한 번에 그칠 게 아니라
문학운동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염무웅한테 선언문 기초 맡겼어

1974년 11월18일 오전 9시50분께 서울 광화문 의사회관 현관에서 대표간사 고은 시인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출범을 알리는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그 순간 대기중이던 경찰 기동대가 달려들어 문인들이 들고 있던 펼침막을 뺏어가려고 몸싸움을 하고 있다.  작가회의 제공
1974년 11월18일 오전 9시50분께 서울 광화문 의사회관 현관에서 대표간사 고은 시인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출범을 알리는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그 순간 대기중이던 경찰 기동대가 달려들어 문인들이 들고 있던 펼침막을 뺏어가려고 몸싸움을 하고 있다. 작가회의 제공

김형수 선생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출범한 지 40년, 어느새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혀지는 시점에 이르렀어요.

고은 내가 지난 세기 후반기에 어떤 자각이 있어서 1970년대부터 일기라는 것을 썼는데, 잦은 가택 수색과 친지들에게 몰래 맡겨두는 과정에서 소실된 것도 상당하지만 남은 것으로도 그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내 사적인 기록이 공공성의 일부에 관련될 때마다 살아 있는 실증이 되고 있네.

김 <바람의 사상>(2012년)은 선생님의 사적 체험이 집단의 역사가 되는 마술 같은 현상의 증거물 같습니다. 특히 그 시절의 행보 속에서 선생님은 숨소리 하나, 기침소리 하나도 다 시대의 것이었습니다.

고 자실의 출범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네. ‘74년 11월’은 가깝게는 ‘74년 1월’로부터 싹을 틔웠지. 그 무렵의 일기는….

김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1974년 1월 5일 (토) 공간사에 갔다. 박용구와 떡국을 먹었다. 개헌 청원의 작가 선언에 박태순의 권고로 참가했다. <창작과 비평> 그룹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왔으나 대의로서 동참했다. <문학과 지성> 그룹에서는 서울대 출신 몇몇 사람은 제외하고 김병익·정현종이 나와 함께 나서기로 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 아버지 제사 때문에 직접 선언 장소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다방에 갈 수 없다.” 여기서 “창비 그룹들과 일정한 거리가 있어왔다”고 한 말씀이 좀 뜻밖입니다.

고 60년대 전반 내가 제주도 3년 체류를 끝내고 서울에 왔을 때 <68문학>이 나왔어. ‘창비’도 막 창간되었어. 백낙청의 귀국이 이룬 전혀 새로운 문학사회운동의 지표가 되었지. 아마도 이에 대한 대칭성인지 뭔지로 ‘문지’의 인문주의가 생겼는데 그 4·19 준재들이 바로 윗세대인 나와 최인훈쯤을 친밀한 배경으로 삼았지. 그때 나는 또 다른 참여파들로부터 ‘허무주의의 교주’라는 공격을 받을 때였어. 그런데 70년 겨울의 ‘전태일 사건’과 그 뒤 군사파쇼에 대한 저항 분위기 등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었어. 그것이 영구집권 책동의 박정희 시대를 끝장낼 근거가 되는 개헌청원운동이었어. 내가 풍덩 뛰어든 것이 그때부터였던가.

김 상당히 긴장되는 발걸음이 시작되었죠. “1974년 1월 6일 (일) 오후 군산으로 향한다. 아버님 기일. 버스 옆자리의 여학생에게 제사는 몇시에 지내느냐고 물었다. 밤 11시쯤이라 했다. 어린아이한테 제사 시간을 배웠다. 집에 가면 이런 아들을 어머니가 한심하게 바라볼 것이다. 앞에서 달려오는 자동차 불빛에 내가 부끄러웠다.” 그 다음날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61명의 문인 성명 오늘 발표되었다. 안수길, 백낙청 등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이왕이면 나도 현장에 있어야 했다.” 그때 혹시 정권의 회유 같은 건 없었습니까?

고 당시 공화당 의장인 박준규 등이 나를 요정 ‘장원’으로 초대해서 입만 벌리면 미녀의 안주가 들어오는 호화한 술을 마신 적도 있었지. 박 의장은 대통령 박정희와 자주 술자리를 함께한다며 나더러도 셋이 한판 벌이자, 현 정부에 참여도 하자 하고 회유한 적도 있었어.

 79년 4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문익환·김지하·양성우·송기숙 등의 석방을 촉구하는 ‘옥중 문학인의 밤’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고은 시인.   작가회의 제공
79년 4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문익환·김지하·양성우·송기숙 등의 석방을 촉구하는 ‘옥중 문학인의 밤’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고은 시인. 작가회의 제공
김 그간의 작품들이 증명하듯이 선생님은 이데올로기에 휘말릴 수 없는 인식구조를 지녔습니다. 그런 기질을 화학적 변화에 가까운 비약의 세계로 끌고 간 게 무엇일까요?

고 그 무렵 소위 재일동포와 연계로 조작된 문인 간첩단 사건이 진행되고 또 민청학련 사건으로 시인 김지하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나는 70년대 벽두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 사건에 내 심신이 흡수되는 체험을 했어. 밖으로는 솔제니친에 대한 관심도 생겨나고 있었지.

김 다음의 표현이 인상 깊어요. “1974년 10월 23일 (수), 나 같은 순수 시인을 참여 시인으로 만들 것인가. 이 군인의 시대, 이 육군의 시대야. 이 총검의 시대야. 이 탱크의 시대야. 이 색안경의 시대야.”

고 시대와의 관계가 도래하는 시기였나봐. 내 안의 잠든 행동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어. 그 무렵에 내 정신 전환의 모험이랄까, 투신이랄까, 그런 결단이 자리 잡았던 듯하네.

김 공안당국은 골치 아픈 사건이 참여파가 아니라 순수파 시인에게서 비롯되는 게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동지를 규합하는 과정이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고 어려웠지. 두 번 세 번의 설득도 불사했어. 다행히도 선배 몇과 동료 몇은 아주 순조롭게 호응해주어서 무척 고마웠지. 어느 시대든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이 작은 불씨로 시작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처음의 합의는 지극히 비관적이었어.

1973년 4월~77년 4월 4년간의 일기를 수록한 고은 시인의 <바람의 사상>은 ‘자실’ 출범 전후를 증언하는 사초이기도 하다.
1973년 4월~77년 4월 4년간의 일기를 수록한 고은 시인의 <바람의 사상>은 ‘자실’ 출범 전후를 증언하는 사초이기도 하다.
김 그래서 이런 장면이 더 실감납니다. “1974년 10월 25일 (금) 버스에서 내렸다. 종로 1가 거리에서 신경림을 오랜만에 만났다. 야, 우리도 뭔가 결의해야 한다고 내가 역설했다. 내가 순수파 몰아올 테니 자네가 참여파 동원할 수 있느냐 물었다. 하겠다 한다. 경림이도 나와 의견이 같았다. 우동을 사먹을까 하다 다음에 한잔 나누자 하고 헤어졌다. 이제 나는 거리에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다른 운명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너라. 오너라. 그 어떤 파도덩어리도 오너라. 내가 너에게 파묻히겠다.” 이어 2주가 흐른 뒤입니다. “11월 11일 (월) 신경림과 만나 문인 선언 문제를 의논했다. 작가 선언이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김병익에게 은밀히 알렸다. 경림은 백낙청과 의논하기로 했다. 이제 나는 출항한다. 뱃머리에 서 있으리라.” 이날 일기에 꽤 중요한 표현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30명 선으로 정했다. 선언은 온건하게 하기로 했다. 서명 작가 명단을 공표하기로 했다. 공표를 죽어라고 마다할 놈도 있을 것이다. 내가 독려할 것이다. (…) 미국 대통령 포드가 간 뒤를 적기로 삼았다. 왜냐하면 미국 우두머리의 덕이나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내 어깨 가볍지 않다.” 일기가 사초(史草)가 됐어요. 이를테면, “11월 14일 (목), 시국의 추위가 급박하다. 작가선언을 앞당기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문구에게 서두를 것을 말했다. 문구가 창비 쪽에 전달했다. 귀거래 다방에서 모였다. 백낙청·염무웅·박태순·이문구와 내가 만났다. 다방 안을 살펴야 했다. 도처에 남산의 눈이 번뜩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이 결국 40년 이어갈 조직의 첫발자국 아닙니까? 겁도 없으세요.

고 최하림이 ‘김수영론’을 쓰고 나서 ‘김수영은 겁이 많고 고은은 겁이 없다’ 했는데 사실은 내 만용은 내 술이 가져온다네.

50명도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2~3일 새 101명이나 참여했어
1974년 11월18일 아침 9시50분
광화문 의사회관 현관 계단서
후다닥 내가 선언문을 읽었지
결의문 5항까지 읽게 되었을 때
경찰들이 나를 번쩍 들어올렸어

김 그 술 이야기 속에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 문학운동의 개념이 외래에서 유입된 게 아니라 내부에서 생성되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인데, 그냥 읽겠습니다. “처음에는 술타령을 늘어놓았다. 그런 뒤 앞당기는 일을 말했다. 그런 다음 한 번의 선언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발단으로 해서 문학운동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자유라는 개념을 전제하기로 했다. 지난날 50년대의 한국문학가협회에 대응하던 자유문학자협회가 연상되기는 하지만 이 시대 표현의 자유는 절실한 문제이므로 ‘자유’는 결코 이승만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자유문학협회’라 했다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는 이름이 되었다. ‘자유’와 ‘실천’이 복합된 인상이지만 자유는 실천되어야 할 가치라는 점에서 통합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염무웅더러 선언문을 기초하라 했다. 시인이나 작가의 문체보다 평론가의 문체가 선언 논조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할 분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언 발표자는 물론 나에게 맡겨졌다. 이번의 단체 임원은 간사제로 하고 약간 명의 간사를 내정했다. 대표 간사는 나에게 떨어졌다. 내가 사양하고 말고의 겨를도 없이 그렇게 정해졌다. 그날 선언 발표의 사회는 박태순이 맡았다. 이문구는 조직을 맡았다. 나는 모든 시련을 각오했다. 생과 사 따위의 글자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두 글자에 부딪힐 것이다. 백(낙청)은 대학으로 갔다.”

고 그날 이후 나의 일기는 참여 문인 종용과 권유로 뛰어다닌 것으로 채워졌어. 고문으로 이희승·이헌구·박두진 등도 추대 승낙을 받았어. 그런데 2~3일 사이에 101명이나 참여하게 되었네그려. 최악의 경우, 30명이고 50명도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이런 성과였네.

김 그때 서울에서 중앙정보부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까?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추진하려면 상당히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을 텐데요.

고 이런 활동을 청진동 한국문학사 사무실에서 진행했어. 김동리·손소희 부부가 눈감아 준 덕택이었어. 우리가 김동리의 안테나를 접어버렸지.

1978년 임정남 사무국장 주도로 제작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마크. 배지로 만들어 300여 회원들이 공유했다. 작가회의 제공
1978년 임정남 사무국장 주도로 제작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마크. 배지로 만들어 300여 회원들이 공유했다. 작가회의 제공
김 이 대목에서 그날 일기를 좀 읽겠습니다. “11월 18일 (월), 새벽에 목간통에 갔다. 목욕했다. 속옷도 갈아입었다. 귀거래 다방에는 가지 않았다. 보레로로 갔다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우동 가게에도 있었다. 광화문 비각 근처의 여러 다방에 흩어져 있는 문인들을 내가 의사회관 현관으로 급히 집결시켰다. 부근에 경찰 기동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박태순 등이 신문사에 말해 두었으므로 기자들이 몰려왔다. 경찰이 긴장했다. 아홉시 반 선언문 발표가 좀 늦어져 아홉시 오십 분에야 내가 불쑥 현관 계단에 나타났다. 뒤이어 내가 어제 쓴 플래카드를 양쪽에서 잡아 올렸다. 그것을 배경으로 내가 선언문을 읽었다. (…)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은 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에 능한 사람은 살기 편하게 되었으며 왜곡된 근대화 정책의 무지한 강행으로 인하여 권력과 부에서 소외된 대다수 민중들은 기초적인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 (…) 내가 결의문 5항까지 읽게 되었을 때 경찰들에 의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나는 빈 종이상자처럼 가벼웠다. 들어 올려져서도 소리쳤다. 뒤에서 이문구·박태순·조태일·윤흥길·송기원·이시영이 잡혀 오고 있었다. (…) 곧 본서인 종로서로 실려 갔다. 정보과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조사를 시작했다. 내가 진술 거부를 통고했다. 그러자 과장이 내 무릎을 짓이겨댄다. 송기원이 항의한다. 기원도 짓이겨댄다. 다른 사람들도 짓이겨댔다.”

고 그로부터 40년에 이르는 한국 현대 문학사상 가장 긴 지속의 문학운동이 시작되었네.

김 실로 감개무량한 페이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님 개인사에도, 또 모국어의 역사에도 큰 기념비가 될 것 같아요.(다음 회로 이어짐)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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