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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21세기는 복잡사회…이 시대 아이는 이 시대 울음을 울어야지

등록 2014-12-21 19:38수정 2015-04-27 22:16

왼쪽부터 김형수 작가, 고은 시인.
왼쪽부터 김형수 작가, 고은 시인.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⑥ 김형수가 묻고 고은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두번째 주자인 시인 고은(오른쪽) 선생과 시·소설·평론을 다 하는 김형수(왼쪽) 작가가 시인의 일기를 통해 회고한 작가회의 창립 초기 비화와 80년대로 이어진 문학운동의 변화 흐름 등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9일 수원 고은 시인의 자택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어 시인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70년대말 ‘자실’ 기관지 요구될 때
독일 ‘무크지’ 보고 환호작약
자유보다 적극적 실천으로 옮아가
‘실천문학’을 내기로 합의했지

80년 신군부 계엄치하서 출간
‘서울의 봄’은 또 다른 겨울이었어
노골적 검열에 창간사 못쓰고
자금난에도 국외자금도 못받아

유신 말기로 치달으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인들도 재야와 연대한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1979년 6월23일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로 수감됐던 고은 시인이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난 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석방환영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함께 석방된 소설가 송기숙 교수(맨 오른쪽부터), 시인 양성우씨도 참석했다.  작가회의 제공
유신 말기로 치달으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인들도 재야와 연대한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1979년 6월23일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로 수감됐던 고은 시인이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난 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석방환영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함께 석방된 소설가 송기숙 교수(맨 오른쪽부터), 시인 양성우씨도 참석했다. 작가회의 제공

김형수 <우주의 사투리>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오릅니다. “1970년대의 나는 이렇게 한 개인의 밤에서 시대의 어둠으로 옮겨감으로써 어느덧 그 앞장에 서 있었다.” 이제 이 단체가 ‘시대의 어둠’ 속에서 행했던 일을 말씀해주실 차례예요.

고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초기에는 마치 유목 떼거리 모양으로 이 사무실 저 사무실 드나들면서 내 손주머니와 이문구·박태순의 서랍에 협의회 추진 업무 사안들이 들어 있었어. 회비도 딴 호주머니의 공금으로 아끼고 있었지. 자실 후기인 70년대 후반 80년대 중반에는 내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덕도 보았지. 우리집이야 ‘민청학련 사건’의 청년 남녀들의 숙식처이고 술집이고 또 조직체 설립 장소이고 농성장이고 추모식장이기도 했어. 김치 80포기를 담가서 그것이 반찬이고 찌갯감이었지.

그러다가 70년대 후기에 이르러서 <창작과 비평>이나 재야 종합지 <대화>말고 자실 자체의 기관지 탄생이 요청되었어. 하지만 등록허가제의 정기간행물이나 허가제 출판사의 실정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 내 친구 최정호에게 독일에서는 잡지와 책의 합성인 매거진 북의 무크(Mook)가 부정기 간행의 잡지 형식으로 나온다는 말을 들었어. 환호작약했지. 사실인즉 그 무렵 창비 등은 그 진영대로 탄압과 온갖 불이익의 정치 환경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기에 힘겨웠고, 이런 과정에서 창비의 관념성도 내보일 때가 없지 않았지. 자실은 자실대로 야전성이나 즉각성 때문에 문학 내적인 자기승화의 겨를이 허용되지 않았어. 여기 있다가 저기 있어야 하고 이 협곡에 도사리고 있다가 저 능선으로 올라서야 하는 숨막히는 출몰의 유격전이라 어떻게 서재에서의 지적 침전이 가능했겠어. 그래서 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내 산문집의 출판사인 전예원에서 <실천문학>을 내기로 합의했어. 대표가 ‘동아투위’의 해직기자 출신인 김진홍이었어.

이름을 외워둘 분이 많네요. 사실 ‘실천문학’은 창간될 때 제호부터 아주 독보적인 저항의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자유실천’이라는 저항문학의 명제는 70년대 전기의 ‘자유’로부터 그 후기의 ‘실천’으로 변별되어서 ‘자유’라는 고전적인 가치보다 좀더 적극적인 ‘실천’의 의미를 내세우는 당위가 생겨난 것이지. 더구나 라틴아메리카 민중사상에서 온 ‘프락시스’ 운동의 풍문도 어느만큼 내 의식에 자극을 주고 있었지. 이것은 문학의 사회 이입에서 작가가 민중으로부터 얻고, 민중이 작가로부터 얻는, 그 동시 상호촉발의 페다고지를 ‘실천’ 쌍방향성으로 내세우게 했어. 사실 그 당시 나는 민주화운동이나 문학운동과는 별도로 노동운동에도 발 디디기 시작했는데 이제 작가가 1000만 노동자의 대변자이기보다 노동자 속에서 문학이 출현하도록 하는 ‘노동자 즉 작가’라는 등식을 꿈꾸었어. 실제로 월간 <대화>를 통해 노동자 수기를 주목하게 되기도 했어.

아, ‘대화’,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그런 책들이 저희에게는 인문학적 유아기의 모유 같았습니다. 그 가슴 뜨거운 온기라니! 그러나 감탄만 하고 지나갈 수 없는 게 당시 선생님이 노동자들과 시로 소통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저희 세대가 훗날 ‘5·18’을 겪고 나서 두고두고 되새김질하던 무용담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유신정권 말기의 와이에이치(YH) 노조 사건의 배후조종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혐의를 쓰고 다시 감옥에 가게 되었어. 이 사건이 우리와 야당 총재 김영삼과의 합의로 ‘신민당사 와이에이치 노조 농성’으로 나아가자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의원 제명’이라는 강수를 쓰고 그것이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대통령 암살이라는 종말에 이르게 됐지.

그 뒤 8월9~11일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 때 고은 시인이 배후로 몰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두 달 만에 다시 수감되자 이호철 작가를 비롯한 자실 회원들이 서울 화곡동 시인의 자택에서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작가회의 제공
그 뒤 8월9~11일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 때 고은 시인이 배후로 몰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두 달 만에 다시 수감되자 이호철 작가를 비롯한 자실 회원들이 서울 화곡동 시인의 자택에서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작가회의 제공
선생님께서 직접 공장지대에 접근하여 야간 노동학교 교장을 하신 게 이때인 거지요?

70년대 후반기의 나는 나 자신을 제어할 장치가 없는 듯이 전방위적으로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어. 왜 그랬는지 모를 지경이었지. 문단, 재야, 그리고 노동운동 그 어디에도 가 있었어.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의 지하실을 빌려서 노동학교를 차린 것도 그때였지. 사실 그때 나는 와이에이치 사건 직전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가 시민 불복종 운동의 하나로 진술 거부를 하다가 고문을 받아 고막이 파열된 상태였어. 그런데 또다시 와이에이치 사건으로 투옥되었지. 박정희 사망 이후에야 병보석으로 나올 수 있었어.

그때까지는 ‘실천문학’이 시중에 나와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창간호를 읽던 중에 80년 5·18을 맞았거든요. 출간 시기가 정확히 언제쯤일까요?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 시대인데 그 신군부에 의한 계엄 치하에서 그 봄은 겨울의 다른 이름이었지. 이런 사정으로 ‘실천문학’은 80년 내가 감옥에서 나온 뒤 창간하게 되는데 창간사도 쓸 수 없었어. 왜냐하면 계엄군 사령부에서 나온 장교들이 서울시청에 상주해서 출판물 검열을 맡고 있어서였어. 내 ‘벽시’ 작자의 이름도 그래서 ‘무단’(舞丹)이라는 가명을 붙였어. 애초의 의도대로 만들 수 없는 응급 창간이었던 셈이지. 그때 표지 색깔을 주황색으로 했더니 다른 문학 세력들은 빨갱이에 가까운 색이라 해서 비난했지.

그 가명도 ‘붉은 춤’이라는 뜻이니, 검열관이 기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자실은 1970년대 후반 유신독재에 맞선 투쟁의 와중에도 문학적 성취를 담아내고자 문예지 발간을 추진해 80년 3월 <실천문학>(초판본 표지·위 사진·전예원 펴냄)을 창간했다.  작가회의 제공
자실은 1970년대 후반 유신독재에 맞선 투쟁의 와중에도 문학적 성취를 담아내고자 문예지 발간을 추진해 80년 3월 <실천문학>(초판본 표지·위 사진·전예원 펴냄)을 창간했다. 작가회의 제공
이렇게 나온 ‘실천문학’이 부정기 간행의 곡절을 거쳐 실천문학사가 설립되지. 이문구가 운영을 맡아서 큰 고생을 했어. 이 설립은 백낙청의 냉철한 판단이 또 하나의 시대적 문학운동을 조직적이고 지속적이도록 유도해낸 것이기도 해.

백 선생님은 창비를 지키기도 힘들었던 때인데…, 그렇게 바쁘게 헌신했던 세대가 그 숨막히는 와중에도 줄기차게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이 자못 놀랍습니다.

오늘에 이르는 우리 문학운동 40년의 역정이야 온갖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된 것이지만 이것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문학적 성취로서의 보편성 실현과 현실에의 문학적 자기구현을 이루어낸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겠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그리고 오늘의 ‘한국작가회의’는 그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 획득의 긍지가 뜨겁게 살아 있다고 믿고 있네. 문학이란 해답에 들어 있지 않고, 문제로 달려오는 가치의 실현이라고 한다면 이 문학운동의 공동체는 이후 40년은 더 해야 하겠네. 왜냐하면 우리 문학과 실천의 자취가 아무리 찬란하다 하더라도 그것의 미래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하나의 추모 서사가 되고 말겠지. 그래서 이제까지의 진실조차도 한낱 가설이라는 영점에 서서 우리의 나아갈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겠네.

우리 문학과 실천 40년의 역정
다른 나라에선 찾기 힘들어
하지만 앞으로 40년 더 이어가야 해
이 성취가 미래에 반영 안되면
하나의 추모 서사가 되고 마니까

이미 지나온 자리에서 젊은 날을 회고하듯이 아스라이 돌아보기는 쉽지만 그러한 시대를 정작 현실로 마주하고 있을 때는 곤혹스러웠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리라 봅니다. 제일 어려운 난관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는데 자실이나 작가회의의 세월 거기에 내 삶의 부침도 함께했는데, 특히 자실 내내 운영경비는 약간의 회비 말고는 대책이 없었다네. 70년대 후기 이런 사정을 간파해서 외국에서 기독교 후원금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경로와 다른 후원의 뜻이 닿아 왔지. 이건 자실에서는 아무도 모른 일이었네. 그때 독일문화원(괴테하우스)의 원장이 한국 민주화운동에 깊이 공감했고 나의 문학운동도 물질적으로 지원하고자 했는데 내가 사절했어. 그 대신 서양 술은 여러 번 받아서 백기완이랑 마셔버렸지. 또 이화여대 교수 이효재를 통해서 미국 쪽의 후원금이나 재미동포들의 갹출금이 오는 것도 무척이나 경계했어. 그 무렵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김재준 목사가 어쩌다 캐나다의 한 지원자금을 받은 것이 정보당국에 포착되어 북괴 자금 운운의 혐의로 무척 고초를 겪은 적이 있었는데, 그런 사태에 나도 과민했던 것이라네. 또 그때 막 문화계를 어용화할 의도로 생겨난 문예진흥 기구를 통해서 내게 거액을 지원하겠다는 중앙정보부 2국의 종용도 계속되었어. 지금이야 생각이 바뀌어 국민이 낸 세금이므로 응당 받아서 문학의 공금으로 활용할 명분이 컸으나 그때는 그런 돈이 ‘박정희 유신정권의 돈’이라고 단정하는 결벽이 심했거든. 뒷날 작가회의의 지원금을 볼모로 이명박 정권의 예술위원회에서 ‘투항 조건’을 내걸었을 때 총회장에서 최일남이 ‘그까짓 것 아예 받지 말자’는 통쾌한 발언을 했는데 그때 나 역시 지난날의 결벽이 떠올랐지.

문공부의 등록허가 절차를 피할 수 있는 비정기간행물인 무크 형태였으나 신군부 계엄사령부의 검열은 피할 수 없어 창간호 본문 곳곳이 삭제된 채 나왔다.  작가회의 제공
문공부의 등록허가 절차를 피할 수 있는 비정기간행물인 무크 형태였으나 신군부 계엄사령부의 검열은 피할 수 없어 창간호 본문 곳곳이 삭제된 채 나왔다. 작가회의 제공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재정문제로 겪을 고통이 클 수밖에 없었을 텐데요?

내게 인세를 준 출판사가 세무감사를 당하고, 내 글을 실어준 잡지사에 중정 요원들이 출입해 감시하는 바람에 문학 수입도 줄어드는 형편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시집, 산문집이 제법 오래도록 팔려서 그 인세의 일부를 자실 경비로 충당했어. 이런 습관은 70년대 말 노동운동에 투신했을 때 술 담배도 끊고 내 돈으로 노동학교 강사들의 거마비를 충당한 것으로도 이어졌어. 그런데 이런 모든 나의 사적인 것의 공적인 이행은 그때 독신생활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네. 만약 내게 처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내 집이 수많은 사람의 거처가 되고 농성장이 되고 술집 밥집 노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이야기들은 80년대 세대가 등단할 때 이미 신화이자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너무나 가파른 시대를 격류처럼 굽이쳐 흐르던 때라 선배세대에 대한 예의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새 하늘을 여는 듯이 소란스럽게 굴던 저희 후배들의 입에서도 ‘7, 80년대 정신’이라는 용어가 언제나 하나로 묶일 만큼 한 몸 한 정신임을 느끼고 있었으니 훗날 선배세대와 냉정하게 선을 긋던 풍조와는 좀 달랐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른바 진보진영의 탁상이론들이네. 우리가 7, 80년대 이루어온 민주화 과정의 상당한 진전들에 대해 그 실체나 실상의 체온으로 접근해 분석하지 않고, 저 서구의 담론을 그대로 직역한 사회경제적 관점으로 유신 중단의 의미를 급조하고 그 과시적 성장이론을 관념화하는 작태들 말이네. 나는 그들을 문학의 한 반이론적인 직설로 타도해 마지않았다네. 80년대 사회구성체 이론에도 짜증투성이였네. 친구 박현채와의 질긴 우애도 그의 난해·경직된 ‘민중경제론’과는 별도의 것이었다네.

저는 골수의 문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과학의 식민지가 되기를 자처하듯이 조급한 관념적인 흐름에 말려 들어간 한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돌아보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 미숙함은 지금에 와서 많이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놓치지 말아야 할 치열성의 한 발로였던 측면도 버릴 수 없습니다. 이제 이 단체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주역들에게도 한 말씀 해주셨으면 합니다.

없네. 지금은 21세기라는 것, 이전보다 훨씬 복잡사회라는 것들을 깨달을수록 이 시대의 아이는 이 시대의 울음을 울어야 한다고 생각해. 단 하나를 지적하고 싶네. 언어에의 책임 말이네. 이게 무척 어렵다네. 언어는 늘 위험하다네.

다시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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