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다섯번째 주자로 양성우(왼쪽) 시인과 이승철(오른쪽) 시인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이후 75년 ‘겨울공화국’ 시낭송 사건과 77년 장시 ‘노예수첩’ 필화 사건 등을 중심으로 유신독재 시절의 수난과 저항의 문단사를 두 차례에 걸쳐 회고한다. 사진은 두 시인이 지난 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76년 쓴 저항시 ‘노예수첩’이
일본 잡지 ‘세카이’에 소개되자
국가모독죄로 잡아넣더군요
‘문학언어와 법률언어의 충돌’로
불릴만큼 재판과정이 치열했는데
공판기록이 사라져 안타까워요
이승철 1976년 초 중국문제연구소에서 일할 때 한국의 정치현실이 ‘노예 상태’라는 것을 착안하여 ‘노예수첩’이라는 장시를 썼는데 그 때문에 ‘필화사건’을 또 겪게 됐지요.
양성우 75년 ‘겨울공화국 시낭송 사건’ 이후 <창작과 비평>과 <대화> 말고는 내 작품을 실어주는 잡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미 저항문학의 유통방식처럼 지하에서 시를 유통시켜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장시 ‘노예수첩’과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 등을 쓴 뒤 은밀히 이를 복사해 손에서 손으로 유통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서울과 광주 지역의 지인들에게 시를 건네주면 그들이 이것을 재복사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포했지만,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다카사키 소지 교수가 ‘노예수첩’을 일본 시사잡지 <세카이>(세계·이와나미서점 발행)에 갖다줘 77년 6월호에 전격적으로 실리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세카이’에 시가 실린 사실을 몰랐기에 평상시처럼 출근하다가 77년 6월13일 오전 9시께 대한성서공회가 있는 종로서적 건물 입구에서 체포됐어요. 남산의 중앙정보부 5국 지하실로 끌려갔죠.
이 그때 중정에서 조사받은 내용과 이 사건으로 구속돼 재판받게 되는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양 중정으로 끌려가니, 수사과장이란 자의 책상 위에 나에 대한 관련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심문 첫날 정보부 요원들이 군홧발로 다가오더니, “다시는 글을 못 쓰게 해주겠다”면서 내 오른손을 짓밟아대는 바람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엄지를 제대로 못 씁니다. 정보부 사무실 벽면을 쳐다보니, 커다랗게 ‘양성우 국제간첩단 사건’이란 조직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나에 대한 기획수사를 오래전부터 해온 것입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내가 만난 일본인 교수와 미국인 여교수,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 등 외국인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나와 식사하는 장면, 다방에서 차 마시는 사진이 조직표 이름 옆에 붙어 있었죠. 중정은 1주일 동안 억지로 사실을 꿰어맞춰 ‘국제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으나, 기독교계의 반발이 거세어지고, 내가 혐의 사실을 부인하자 장시 ‘노예수첩’이 <세카이>에 실린 것을 ‘형법상 해외출판물에 의한 국가모독죄’라고 적용했고, 검찰은 ‘우리는 열 번이고…’를 광주의 이기홍 변호사에게 건네준 것을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며 77년 6월 하순 나를 구속기소했습니다. 이때 신경림 선생이 당신의 친구인 정춘룡 변호사에게 부탁해 내 변호인 자격으로 처음으로 면회를 왔고, 이후 홍남순, 홍성우, 조준희, 황인철 변호사가 공동변호인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재판과정이 아주 치열했는데, 지금 그 공판기록이 사라져 매우 안타깝습니다.
1984년 12월 채광석·김정환·김사인 등과 더불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출범에 참여한 양성우 시인은 85년 4월 자실 대표를 맡았다. 양 대표가 서울 공덕동 조광다방 건물 3층에 있던 자실 사무실에서 자실 총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 재판 당시의 풍경을 박태순 선생은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운동 30년사>에서 “문학언어와 법률언어가 충돌한 사건이었다. 문학은 체제의 구속력으로부터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검찰관의 강퍅한 법리에 맞서 양성우는 광야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양성우 시인은 ‘노예수첩’, ‘우리는 열 번이고…’ 두 작품으로 구체적이며 직접적으로 반독재 투쟁을 소리 높여 외쳐 부름으로써 70년대 저항문학의 한 극점을 이루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결국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또한 옥중에 있을 때 출간된 시집 <겨울공화국>으로 고은, 조태일 시인이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양 검찰로 넘겨지던 날, 정보부 직원이 흑석동 집에서 압수해 온 내 원고 뭉치를 보자기에 싸놓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니,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도 된다고 하기에 고은 선생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고 선생이 중정으로 왔을 때 원고 보자기를 넘겨드리면서 “이건 책으로 펴내도 된답니다”라고 말씀드렸고, 이 원고를 바탕으로 77년 8월 시집 ‘겨울공화국’(화다출판사)이 간행됩니다. 시집이 나오자 치안본부가 이를 문제삼아 고은·조태일 시인을 구속했고, 이시영·임정남 시인도 조사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고은·조태일 시인은 문인들의 석방탄원에 힘입어 한달 만에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시국사범들이 “유신헌법 철폐하라! 구속자 석방하라!” 구호를 외치며 단식하거나 교도소 철창을 긁어대며 투쟁했습니다. 그런데 교도소 쪽과 검찰은 이것을 내가 주동한 것으로 혐의를 씌워 청주교도소로 이감시켰고, 추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 때문에 나는 3년형과 별도로 2년형이 추가로 선고돼 ‘징역 5년형’의 장기수가 된 겁니다. 청주교도소에서 하혈을 하는 등 악성치질로 몇 달간 고생했는데, 문인들의 탄원서에 힘입어 간신히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기도 했었죠.
그 무렵 자실에서 발간하던 계간 <실천문학>의 폐간에 항의해 자실 사무실에서 농성하는 문인들. 왼쪽부터 이문구·고은·양성우·유인택.
옥중에서도 반정부 구호 외치자
징역이 2년 늘어 5년 장기수 됐죠
아내와 그때 옥중결혼했어요
84년 ‘자실’이 재출범한 뒤
채광석 간청에 대표 맡았지요
성명서 발표하랴 시위·농성하랴
하루도 편할 날 없던 때였어요
문학친구로서 유대가 강했기에
함께 맞서 싸울 수 있었지요
작가세계에도 ‘의리’는 중요해요
이 78년 9월 ‘반정부 구호사건’ 추가 재판이 청주지법에서 열릴 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소속 문인들과 기독교계 인사들이 방청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난 죄요, 또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죄요, 그리고 또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시인이 된 죄요, 그리고 또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사랑한 죄다”라고 말씀한 최후진술이 훗날 부인이 펴낸 옥중서간집에 기록돼 있더군요. 그때 구속문인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문학행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양 내가 ‘겨울공화국’을 처음 낭송했던 그곳,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79년 2월에 ‘양심범을 위한 문학인의 밤’이 열렸고, 수감 중인 자실 문인들, 나를 포함해 김지하·문익환·송기숙 선생의 석방을 촉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등포시립병원에서 수술을 받던 4월 하순에도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옥중 문학인의 밤’이 열렸다는 것도 아내가 보낸 편지로 알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저의 구명운동에 적극 앞장서준 문인들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이 79년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선생님은 영등포교도소에서 그리고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투옥된 전남대 송기숙 교수는 청주교도소에서 석방됩니다.
양 ‘자실’과 ‘국제펜클럽’ 등 국내외 문인들이 끊임없이 석방운동을 해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구속된 지 25개월 만에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중정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석방환영 열기를 막기 위해 새벽 3시께 출감시켰습니다. 마중나온 집사람만 살짝 불러내어 정보부 차에 태우더니 잠실시영아파트 집에 나와 함께 내려놓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영등포교도소 앞에서 날 기다리던 문인들은 허탕을 쳐야 했구요.
1979년 4월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옥중 문학인의 밤’에서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양성우 시인의 상황을 보고하는 아내 정정순씨. 직계가족만 면회를 할 수 있어 78년 5월 혼인신고로 옥중결혼한 두 사람은 79년 8월 석방 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석방 한달 뒤 79년 8월 옥중결혼을 했던 신부 정정순과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강당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문단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뒤 80년 4월에 옥중에서 썼던 원고를 모아 시집 <북치는 앉은뱅이>를 출간했고,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몇 달 동안 수배생활도 했습니다. 84년 12월19일 자실이 채광석 시인과 <5월시>, <시와 경제>, <삶의 문학>, <분단시대> 동인 등 젊은 문인들 주축으로 재출범합니다. 이때 선생님은 박태순·황석영·이문구·조태일과 함께 자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85년 4월 대표로 추대됩니다. 그해 85년은 전두환 정권의 탄압이 최고조로 이르던 시기였습니다. 미문화원 점거농성 투쟁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고, 광주항쟁의 진실을 담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자 발간으로 풀빛출판사 나병식 사장과 작가 황석영이 경찰에 연행됩니다. 또한 무크 <민중교육> 출간 사건으로 고광헌·유상덕·홍선웅·강병철·황재학·전무용 등 다수의 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나게 되고 김진경·윤재철 시인과 실천문학사 송기원 주간이 구속되었습니다. 8월23일에는 계간 <실천문학>이 ‘언론기본법 위반’으로 폐간되고, 8월27일에는 자실의 기관지를 펴낸 이삭출판사(대표 소병훈)의 출판등록이 취소됩니다. 이어 12월에는 창작과비평사의 출판등록이 취소되구요.
양 자실이 재출범할 때 채광석·김정환·김사인이 ‘트리오’로 활약을 했습니다. 채광석은 가장 활동적인 문인으로서 매우 설득력 있게 논리를 펴내어 젊은 문학인들을 규합했습니다. 사무실 임대료도 내기 힘든 상황에서 정말 모두들 열심히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87년 7월 채광석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떠났는데,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면서 자실을 이끌었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튼 문인들이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다고 결의하여 자실 깃발을 다시 들어 올리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박태순·이문구·임정남·이시영·송기원·채광석 등과 재출범을 앞두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그리 결정된 것이죠. 85년 내가 대표를 맡을 처지가 아니었으나 그 누구한테 대표직을 떠맡기기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채광석의 간청에 못 이겨 그 자리를 수락했습니다. 그때 모두가 다 열심히 싸운 시기였습니다. 정말 문학인의 사명을 다하려고 몸을 던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명서 발표와 농성과 거리투쟁 등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양성우 시인은 일본 잡지 <세카이> 1977년 6월호에 장시 ‘노예수첩’이 실린 뒤 체포돼 ‘국가모독죄’로 두번째 수감됐다. 사진은 85년 3월 출간된 시집 <노예수첩>(풀빛출판사), 역시 금서로 묶인 까닭에 초판은 희귀본이 됐다.
이 6월항쟁 이후 87년 9월 자실이 ‘민족문학작가회의’(민작)로 확대·개편됩니다. 그 뒤 선생님은 제도정치권으로 가게 되잖아요.
양 6월항쟁 때 자실은 대통령 직선제 쟁취 투쟁을 위한 거리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6·29 선언 이후 선배 그룹에 의해 자실이 이제 범문단 조직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때 민작으로 재출범하는 취지의 하나로 “외국의 문학단체와 나란히 할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인단체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이 설득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후 내가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문인들과 공개적으로 이야기가 되었고, 88년 4·26 총선에 출마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이때 ‘민통련’ 조직에서 함께 활동했던 임채정·이해찬·이부영 등이 제도정치권으로 진입하는 문제가 논의되었고, 88년 2월 재야인사 97명이 평민당에 입당합니다. 그해 2월17일에 ‘노예수첩 사건’으로 공민권이 박탈된 지 11년 만에 사면 복권이 됨으로써 13대 총선에 출마해 서울 양천갑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고, 이후 한동안 정치권에 몸담았습니다.
이 끝으로 한국작가회의 40돌을 맞아 후배 문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양 문학이라는 한길, 같은 길을 평생 함께 가는 사람들끼리의 ‘의리’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작가의 세계, 문학인의 세계에도 ‘의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문학적 이념을 갖고 모이기도 했으나, 돈독한 문학친구로서 서로 유대가 강했기에 부당한 체제와 맞서서 함께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 문학인은 작품으로 말해야 할 때가 온 것이고, 40년이라면 뿌리가 깊은 조직인데, 회원들끼리 서로 아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돌이켜 보니 싸움의 시절에 나는 글을 쓰는 한 사람의 전사(戰士)이고자 했습니다. 이름 없이 죽고, 가랑잎에 묻히고자 했던 늙은 전사로서 그 어려운 시절에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모든 영광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