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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한밤 불쑥 찾아온 김근태 요청에 밤새 김상진 추도문 써”

등록 2015-01-25 22:02수정 2015-04-27 22:15

작가 황석영(왼쪽)과 정도상(오른쪽) 씨.
작가 황석영(왼쪽)과 정도상(오른쪽) 씨.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⑪ 정도상이 묻고 황석영이 답하다 ①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여섯번째 주자로 작가 황석영(왼쪽)과 정도상(오른쪽)이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전후 문단 상황과 89년 방북 사건을 중심으로 두 차례에 걸쳐 회고한다. 사진은 두 소설가가 지난 2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황 작가의 자택에서 만난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황석영은

황석영은 1943년 만주 창춘(장춘)에서 태어났다. 62년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70년 단편소설 <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도 뽑혔다. 71년 중편 <객지>를 발표했다. 74년부터 <한국일보>에 대하소설 <장길산>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했다. 89년 단신으로 평양을 방문한 뒤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했고, 그 뒤 망명 상태로 세계를 떠돌았다. 광주민중항쟁, 베를린 장벽 붕괴, 천안문 사태를 모두 직접 목격했다.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 함께했었다는 것은 이야기꾼에게는 축복이었다. 93년 귀국해 방북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공주교도소에 수감됐다가 98년 석방되었다.

언제나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에 주목하고 있으며, 산업화 시대의 시대정신과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대변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하고 있다. 최근 <황석영이 읽는 명단편 101선>을 마무리했다.

▶▶정도상은

정도상은 1960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87년 <십오방 이야기>로 등단했다. 88년 중편소설 <친구는 멀리 갔어도>를 발표하면서 문학적으로 주목받았다. 작품집으로는 <친구는 멀리 갔어도>, <아메리카 드림>, <실상사>, <찔레꽃> 등이 있고 장편 <누망>, <낙타>, <은행나무 소년>, <마음오를꽃> 등이 있다.

통일맞이 사무처장으로 일할 때, 89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에 합의한 남북한 통합 국어사전인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사업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참여하고 있다. 2005년에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 백두산 등지에서 개최된 남북작가대회, 가극 <금강>의 동평양극장 공연 때도 실무를 총괄한 평화통일 분야 전문가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서정적 묘사가 탁월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존재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찬 문학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황석영과는 평화통일 분야에서 일을 함께 하는 등 문단 선후배로서 각별한 교분을 나누고 있다.

73년 박정희 개헌서명 중단 담화에
‘100만 서명 선언’으로 엿먹여
이호철·백낙청 등 문인 61명 참여
그때 잡혀 중정 지하실 첫 경험

‘자실’ 창립 행사 성명서 낭독 뒤
사복형사 몰려들어 문인들 연행
뒷계단으로 피해 체포는 면해
두고두고 ‘도망자’라 놀림당하기도

황석영은 자실 출범 이듬해인 1975년 4월 할복자결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추도 시위 때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 중이던 김근태 선생의 요청으로 추도문을 썼다. 사진은 2003년 12월 황 작가의 소설 <심청> 출판기념회 때 함께한 모습으로, 왼쪽부터 권영길·김근태 의원, 고은 시인, 황 작가, 손학규 지사, 이부영 의원. 
 <한겨레> 자료사진
황석영은 자실 출범 이듬해인 1975년 4월 할복자결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추도 시위 때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 중이던 김근태 선생의 요청으로 추도문을 썼다. 사진은 2003년 12월 황 작가의 소설 <심청> 출판기념회 때 함께한 모습으로, 왼쪽부터 권영길·김근태 의원, 고은 시인, 황 작가, 손학규 지사, 이부영 의원. <한겨레> 자료사진

황석영 그러니까, 1971년부터 얘기를 하죠.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당선되자마자 ‘유신’을 준비했던 겁니다. 이제 다시는 선거를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대중 후보한테 정말 아슬아슬하게 이겼거든요. 실제로는 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가 국가기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그 정도로 이긴 것이라면, 실제 투표에서 분명히 패배했을 겁니다. 그러나 군대, 경찰, 정보부, 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 정도의 조작은 아주 쉬웠을 겁니다. 그러니 박정희로서는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고, 다시는 선거를 치르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게 된 거라 이겁니다. 게다가 ‘김대중’이라는 무시무시한 득표력을 가진 야당 거물도 있고.

71년은 제가<창작과 비평>에 중편소설 <객지>를 발표한 해입니다. ‘객지’를 발표하고 나서 평론가 염무웅, 시인 조태일 등과 어울리던 때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소설가 한남철이 염무웅과 같이 있다며 좀 만나자고 해요. 그래서 나갔더니 소설가 이호철과 박태순이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독재체제가 노골화되는데 문인들도 뭐 현실적인 대안이 있어야 될 것 아니냐는 말들이 오갔습니다. 그래서 논의가 된 게 ‘문인공제회’라는 것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문인조합 같은 거죠. 그래서 원고료 받으면 얼마씩 공제해서 자금을 모으고, 그것으로 조직을 한번 굴려보자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정도상 문인공제회, 문인조합. 지금까지도 이뤄내지 못하고 있는 예술인 복지를 그때 벌써 생각하셨다니 대단합니다. 그런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의 출발은 74년이지 않습니까?

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됩니다. 그 무렵에 한국문인협회(문협) 이사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문인단체가 무조건 문협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문협의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소설가 이호철을 40대 초반인가 그랬는데 이사장 후보로 내세웠지요. 이것을 주도했던 문인들은 거의가 4·19 이후에 등단한 젊은 문인들이었어요. 이때는 뭐 김승옥, 이재하, 이성부 등등 뭐 하여튼 문단의 젊은 문인들은 대다수가 이호철을 이사장 후보로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했지요. 그랬는데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 문단의 권력을 가진 쪽에서 본다면 이게 일종의 반란 비슷한 거였던 겁니다. 물론 이사장 선거에서 떨어졌죠.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었죠. 저들 말대로 반란의 시작.

문협 이사장 선거에 후보로 출마한 것 자체가 반란의 시작이라니, 참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문협 이사장이 그토록 권력이 센 자리인지 몰랐습니다.

1977년 12월 김남주 시인이 광주에서 만든 민중문화연구소 개소식 때 고은 시인과 백기완 선생의 초청 강연을 마치고 무등산장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초대 소장을 맡았던 김 시인은 이듬해부터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79년 체포돼 오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뒷줄 왼쪽 둘째부터 고은 시인, 백기완 선생, 한 사람 건너 황석영 작가, 문병란·송기숙 교수, 박석무 다산연구소장. 앞줄 왼쪽부터 김남주 소장, 최권행 교수. 작가회의 제공
1977년 12월 김남주 시인이 광주에서 만든 민중문화연구소 개소식 때 고은 시인과 백기완 선생의 초청 강연을 마치고 무등산장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초대 소장을 맡았던 김 시인은 이듬해부터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79년 체포돼 오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뒷줄 왼쪽 둘째부터 고은 시인, 백기완 선생, 한 사람 건너 황석영 작가, 문병란·송기숙 교수, 박석무 다산연구소장. 앞줄 왼쪽부터 김남주 소장, 최권행 교수. 작가회의 제공
당시에는 대단했습니다. 문화권력 그 자체라고 할 수가 있었지요. 아무튼 73년 12월에 박정희가 개헌 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담화를 발표했어요. 그런데 74년 1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선언했으니 완전히 엿을 먹인 거죠. 이호철, 백낙청, 박태순, 김지하 등이 거의 망라되었고, 문인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비밀리에 서명을 다 받았어요. 분담해서 한 사람 앞에 10명씩 받아와라 이런 식으로 해서 나도 10명을 분담해서 맡았지요. 그래서 61명이 모인 겁니다.

그 개헌청원 성명서를 종로에 있는 서울와이엠시에이(YMCA)에서 발표를 했는데, 현장에서 다 잡혀갔습니다. 모두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거기서 하룻밤 잤나? 다음날 모두 귀가시켜 주더라고요. 그런데 저놈들이 정말 무서운 것은 귀가를 시켜준 뒤 하루 이틀 사이에 중앙정보부에서 전부 개별적으로 하나둘씩 다시 연행해간 거예요. 나를 포함해 이문구, 박태순, 거의 다 잡혀갔습니다. 61명이 전원이었어요. 그때 중정 지하실을 처음 경험한 겁니다.

당시에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겠어요? 자고 나면 사건이 하나 터지고, 자고 나면 누군가가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리던 시절이니까요.

그때는 언론이 살아 있었어요. 요즘엔 탄압도 별로 없는데 언론이 죽었어요. 스스로 죽어버린 겁니다. 백낙청의 서울대 교수직 파면, 문인간첩단 사건 조작 등등 동아투위 사건이 터지기 전에 문인들을 먼저 칩니다. 중정도 아닌 보안대가 나서서 사건을 조작했어요.

자실의 등장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봄부터 시작된 탄압이 끝날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을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이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하며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합니다. 아마 10월 하순께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전국의 신문, 방송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운동에 돌입하여 반독재 투쟁에 힘을 보탭니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실을 창립하기로 하고 문인들을 모았습니다.

1974년 11월18일 <동아일보>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을 알리는 ‘자유실천 101인 선언’ 사실을 사회면 윗부분에 2단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11월18일 <동아일보>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을 알리는 ‘자유실천 101인 선언’ 사실을 사회면 윗부분에 2단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75년 1월 이른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맞선 언론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자 게재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편지’.  문인들은 그 시절 유신독재에 저항한 지식인들의 연대는 ‘깨어 있는 언론’에 의해 가능했다고 증언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75년 1월 이른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맞선 언론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자 게재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편지’. 문인들은 그 시절 유신독재에 저항한 지식인들의 연대는 ‘깨어 있는 언론’에 의해 가능했다고 증언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모두가 문학사를 빛낸 이름들입니다.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문학만으로요.

그렇지요. 우리는 문학으로 모인 사람들이지요. 사무실도 없었어요. 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사무실이었습니다. 번듯한 사무실도 없이 자실이 창립된 것입니다. 창립의 첫 행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지요. 장소를 지금 교보빌딩 자리에 있던 의사빌딩 로비로 정한 건 문협이 그 건물 3층에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문협에 한 방 먹이고 시작하려고 했던 거네요.

그런 셈이지요. 거리에서 성명서 낭독을 하면 당장 체포당하니까, 의사회관 로비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성명서 낭독을 맡은 나는 염무웅, 한남철과 함께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제일 안쪽에 서 있었습니다. 아마 성명서 낭독을 위한 단상으로 거기를 정한 것 같아요. 낭독을 끝내고 기자들에게 선언문을 나눠주고 있는데, 사복형사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문인들을 끌어내기 시작했어요. 밖으로 뛰쳐나가는 문인들도 있었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동대가 체포해버렸죠. 그런 소동이 벌어지는데 한남철이 나를 뒤로 쑥 끌더라고요. 계단으로 올라가자는 겁니다. 그래서 한남철, 염무웅과 나는 자연스럽게 문협 사무실로 올라갔어요. 그래서 우린 체포를 면했어요. 반면에 고은, 박태순, 조태일, 윤흥길, 이시영 등등 10여명이 잡혀갔습니다. 나는 그 뒤로 도망갔다고 놀림을 많이 당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문인들이라 조직 활동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문인이란 근본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들이잖아요. 이를테면 건수 하나를 끝냈으면 모두 흩어지잖아요. 다음에 부르면 잘 오기나 하나요. 큰 건수가 있어야 고개나 내밀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날마다 만나는 게 그 간사 몇 명입니다. 그것을 고은 시인이 다 감당을 했죠. 고은 시인을 중심으로 해서 이문구, 박태순, 나, 양성우 등등이었죠.

고은 시인은 그때 <창작과 비평>과 관련이 없는 문인이었다면서요?

고은 시인은 ‘창비’에서 활동한 문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문학 그 자체였습니다. 이문구가 제일 먼저 나한테 소개를 했지요.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이문구가 ‘황형, 인사드려’라고 해서 인사를 했지요. 막상 만나보니 그 열정이 대단해요. 매일 나와서 사람 찾아다니고 만나고, 고은 시인이 자연스럽게 중심이 된 겁니다.

그리고 이시영과 송기원은 막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도 열정이 참 대단했어요. 이시영은 중앙대를 졸업하고 어느 학교에서 교사를 했었고, 송기원은 그때도 학생이었어요. 송기원은 종로경찰서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완전 투사로 변했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시위를 주도했어요. 그래서 김동리한테 찍혔습니다. 그 전까지 시도 당선되고 소설도 당선되고 해서 김동리·서정주가 아주 예뻐했습니다. 굉장히 좋게 보고 있었는데, 퇴학을 당해 흑석동 연못시장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지내던 차에 나와 고은 시인이 송기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네가 우리 일꾼이 되어야겠다’ 이런 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술 마시고 놀았지요. 아침에 해장국까지 사 먹이고 그랬죠. 가끔은 연못시장에서 잔 것도 같네요. 그러면서 이시영은 자연스럽게 말하자면 자실의 총무 비슷한 노릇을 하게 됩니다. 연락은 이시영이 하고, 송기원은 앞에서 뛰어다니고 그랬죠. 이시영과 송기원은 자실의 움직이는 사무실이었어요. 그들은 참으로 위대한 짝이었습니다.

우이동 집서 수배중인 김근태 첫만남
심금을 울릴 글 써달라 요청받고
수년 감옥 갈 일이지만 거절 안해
김, 유인물 만들어 새벽에 사라져
과묵하고 침착한 언동 ‘깊은 인상’

그 무렵 잊혀지지 않는 인연이 있었다지요.

그때 나는 우이동 버스 종점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방 두 칸짜리 그야말로 옛날식 한옥을 전세로 얻어 들어갔던 겁니다. 대문간에 양쪽으로 광과 변소가 있고 부엌이 마당 쪽으로 있으며 연이어 안방과 가운데 마루가 있고 건넌방이 있는,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한옥 같은 집이었습니다. 밤 아홉시나 되었을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나가서 문을 여니 신동수가 서 있었고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무슨 보따리를 가지고 서성거렸습니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갈색으로 보이던 그 사람이 바로 김근태였습니다. 그는 가끔씩 고교 동창이던 신동수와 접촉하면서 유신 선포 이후부터 도피 중인 상태였죠. 그의 경기고 동창인 손학규는 종로5가에서 맹렬히 투쟁 중이었고요. 손학규·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린 바로 그 사내였습니다. 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가 되어,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로 살았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김근태는 선구적으로 인천 지역에서 공장에 들어가 조용히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죠. 김근태는 유신시대 내내 한 번도 노출되지 않다가 83년 9월 한국 최초의 독자적이며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하면서 스스로를 공개했습니다.

그때 신동수와 김근태는 서울 농대생 김상진의 추도를 위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심금을 울릴 만한 선언문, 즉 김상진의 죽음을 위한 추도문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날 밤 심야에 써서 우리 집에서 등사로 유인물을 제작해 현장으로 나가 전달할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소주를 마시는 그들 옆에 엎드려 선언문을 썼습니다. 그 선언문을 누가 썼는지 밝혀지면, 나 역시도 수년 동안 징역을 살아야 하는 그런 일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가방과 보따리에 철필과 등사용지, 등사기와 잉크 등을 갖고 다녔어요. 하여튼 밤을 꼬박 새워 제작한 유인물을 들고 그들은 새벽녘에 사라졌습니다. 김근태의 과묵하고 침착한 언동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유신 막바지에 다시 며칠간 서울에서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다음 회에는 89년 방북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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