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석영(왼쪽)과 정도상(오른쪽) 씨.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⑪ 정도상이 묻고 황석영이 답하다 ①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⑪ 정도상이 묻고 황석영이 답하다 ①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여섯번째 주자로 작가 황석영(왼쪽)과 정도상(오른쪽)이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전후 문단 상황과 89년 방북 사건을 중심으로 두 차례에 걸쳐 회고한다. 사진은 두 소설가가 지난 2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황 작가의 자택에서 만난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황석영은
황석영은 1943년 만주 창춘(장춘)에서 태어났다. 62년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70년 단편소설 <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도 뽑혔다. 71년 중편 <객지>를 발표했다. 74년부터 <한국일보>에 대하소설 <장길산>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했다. 89년 단신으로 평양을 방문한 뒤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했고, 그 뒤 망명 상태로 세계를 떠돌았다. 광주민중항쟁, 베를린 장벽 붕괴, 천안문 사태를 모두 직접 목격했다.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 함께했었다는 것은 이야기꾼에게는 축복이었다. 93년 귀국해 방북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공주교도소에 수감됐다가 98년 석방되었다.
언제나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에 주목하고 있으며, 산업화 시대의 시대정신과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대변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하고 있다. 최근 <황석영이 읽는 명단편 101선>을 마무리했다.
▶▶정도상은
정도상은 1960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87년 <십오방 이야기>로 등단했다. 88년 중편소설 <친구는 멀리 갔어도>를 발표하면서 문학적으로 주목받았다. 작품집으로는 <친구는 멀리 갔어도>, <아메리카 드림>, <실상사>, <찔레꽃> 등이 있고 장편 <누망>, <낙타>, <은행나무 소년>, <마음오를꽃> 등이 있다.
통일맞이 사무처장으로 일할 때, 89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에 합의한 남북한 통합 국어사전인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사업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참여하고 있다. 2005년에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 백두산 등지에서 개최된 남북작가대회, 가극 <금강>의 동평양극장 공연 때도 실무를 총괄한 평화통일 분야 전문가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서정적 묘사가 탁월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존재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찬 문학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황석영과는 평화통일 분야에서 일을 함께 하는 등 문단 선후배로서 각별한 교분을 나누고 있다.
‘100만 서명 선언’으로 엿먹여
이호철·백낙청 등 문인 61명 참여
그때 잡혀 중정 지하실 첫 경험 ‘자실’ 창립 행사 성명서 낭독 뒤
사복형사 몰려들어 문인들 연행
뒷계단으로 피해 체포는 면해
두고두고 ‘도망자’라 놀림당하기도
황석영은 자실 출범 이듬해인 1975년 4월 할복자결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열사의 추도 시위 때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 중이던 김근태 선생의 요청으로 추도문을 썼다. 사진은 2003년 12월 황 작가의 소설 <심청> 출판기념회 때 함께한 모습으로, 왼쪽부터 권영길·김근태 의원, 고은 시인, 황 작가, 손학규 지사, 이부영 의원.
<한겨레> 자료사진
1977년 12월 김남주 시인이 광주에서 만든 민중문화연구소 개소식 때 고은 시인과 백기완 선생의 초청 강연을 마치고 무등산장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초대 소장을 맡았던 김 시인은 이듬해부터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79년 체포돼 오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뒷줄 왼쪽 둘째부터 고은 시인, 백기완 선생, 한 사람 건너 황석영 작가, 문병란·송기숙 교수, 박석무 다산연구소장. 앞줄 왼쪽부터 김남주 소장, 최권행 교수. 작가회의 제공
1974년 11월18일 <동아일보>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을 알리는 ‘자유실천 101인 선언’ 사실을 사회면 윗부분에 2단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75년 1월 이른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맞선 언론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자 게재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편지’. 문인들은 그 시절 유신독재에 저항한 지식인들의 연대는 ‘깨어 있는 언론’에 의해 가능했다고 증언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심금을 울릴 글 써달라 요청받고
수년 감옥 갈 일이지만 거절 안해
김, 유인물 만들어 새벽에 사라져
과묵하고 침착한 언동 ‘깊은 인상’ 정 그 무렵 잊혀지지 않는 인연이 있었다지요. 황 그때 나는 우이동 버스 종점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방 두 칸짜리 그야말로 옛날식 한옥을 전세로 얻어 들어갔던 겁니다. 대문간에 양쪽으로 광과 변소가 있고 부엌이 마당 쪽으로 있으며 연이어 안방과 가운데 마루가 있고 건넌방이 있는,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한옥 같은 집이었습니다. 밤 아홉시나 되었을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가 나가서 문을 여니 신동수가 서 있었고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무슨 보따리를 가지고 서성거렸습니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갈색으로 보이던 그 사람이 바로 김근태였습니다. 그는 가끔씩 고교 동창이던 신동수와 접촉하면서 유신 선포 이후부터 도피 중인 상태였죠. 그의 경기고 동창인 손학규는 종로5가에서 맹렬히 투쟁 중이었고요. 손학규·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린 바로 그 사내였습니다. 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가 되어,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로 살았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김근태는 선구적으로 인천 지역에서 공장에 들어가 조용히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죠. 김근태는 유신시대 내내 한 번도 노출되지 않다가 83년 9월 한국 최초의 독자적이며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하면서 스스로를 공개했습니다. 그때 신동수와 김근태는 서울 농대생 김상진의 추도를 위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심금을 울릴 만한 선언문, 즉 김상진의 죽음을 위한 추도문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날 밤 심야에 써서 우리 집에서 등사로 유인물을 제작해 현장으로 나가 전달할 예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소주를 마시는 그들 옆에 엎드려 선언문을 썼습니다. 그 선언문을 누가 썼는지 밝혀지면, 나 역시도 수년 동안 징역을 살아야 하는 그런 일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가방과 보따리에 철필과 등사용지, 등사기와 잉크 등을 갖고 다녔어요. 하여튼 밤을 꼬박 새워 제작한 유인물을 들고 그들은 새벽녘에 사라졌습니다. 김근태의 과묵하고 침착한 언동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유신 막바지에 다시 며칠간 서울에서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정 다음 회에는 89년 방북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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