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일곱번째 주자로 소설가 박태순(오른쪽)과 전성태(왼쪽)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때부터 40년 동안 줄곧 문인운동사 기록을 담당해온 박 작가의 회고담을 들려준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충북 충주 수안보에서 모처럼 상경한 박 작가를 전 작가가 동서울터미널에서 마중하는 모습이다.
이어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박태순은
박태순은 1964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공모에 입상하여 등단했다. 그의 60년대 소설 중에서 4·19혁명을 소재로 한 <무너진 극장>과 서울 변두리 난민촌을 무대로 한 연작소설 <외촌동 사람들>의 하나인 <정든 땅 언덕 위>를 대표작으로 꼽는다.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했고 80년에 무크지 <실천문학> 창간을 주도했다. <팔레스타나 민족시집> 등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80년부터 자실 운동 사료를 수집하여 85년 계간 <실천문학>에 자료집을 냈고, 98년 한국작가회의 기관지 <내일을 여는 작가>에 자실문예운동사를 발표했다. 이어서 2004년 한국작가회의 30돌에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운동 30년사>(전 3권)를 출간했다.
94년부터 충주 수안보로 거처를 옮겼고 인문문화공동체로 ‘국토학교’를 이끌며 국토기행문집 <작가기행> <국토와 민중> <나의 국토 나의 산하>(3권)를 펴냈다. 신동엽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요산문학상, 단재상, 한국 출판문화 저술상을 받았다.
▶▶전성태는
전성태는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실천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1~2002년 한국작가회의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예운동 30년사>를 집필하던 박태순 선생과 연을 맺었다.
소설집으로 <매향>(실천문학사), <국경을 넘는 일>(창비), <늑대>(창비),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창해)가 있으며, 신동엽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그 외 평전 <김주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3인 인권 르포집 <길에서 만난 세상>(우리교육) 등을 냈다..
‘긴조 9호’ 로 유신은 정점 치닫고
노동자-청년-지식인 연대도 변화
문학인들, 민주구국헌장 대거 서명
노동인권헌장 제정에도 참여하며
자실이 민중생존권운동으로 전환
민중에 의한, 민중의 문예를 추구
197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 3돌을 맞아 채택한 ‘제3선언문’을 계기로 문학운동은 다양한 기획 행사를 통해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한편 사회 전반의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선두에 나선다. 78년 6월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 사건으로 전남대 교수들이 구속되고 해직당하자 11월13일 자실과 해직교수협의회 등 7개 단체가 연대해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모습. 작가회의 제공
전성태 선생님은 1974년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에 실무적인 역할을 맡았던 창립 회원의 한 분이셨고, 자실이 10돌, 20돌, 30돌을 맞을 때마다 충실한 기록자로서 그 자취를 정리해 남기셨죠. 그래서 지난해 11월22일 한국작가회의가 40돌 기념식에서 ‘특별감사패’로 선생님의 공로를 기렸습니다. 후배들이 작업한 40년 기록을 보신 소회가 어떠신지요?
박태순 졸업한 사람으로서 새삼 무슨 감회가 있을까요. 94년 수안보로 내려온 이래 초야에 묻힌 방외인을 자처하고, 잡음의 문학보다 침묵의 문학을 좇아 살았어요.
전 그래도 어렵게 서울로 걸음을 하셨으니 한 말씀 해주시죠.
박 40돌 기념행사에 즈음하여 서울을 오르내리며 이런 생각들은 했어요. 문학이 말이에요, 미래의 독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걸 공유지의 문학이라 말하고 싶은데 작가회의가 40년을 정리하며 어렵사리 공유지 마련을 시도하고 있으니 젊은 작가들이 공유지와 사유지의 문학을 한껏 누렸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들더군요. 이 바람에는 박정희 유산 계승의 독재문화는 철저할 만치 강고함에도 그 촉감 능력이 둔탁해져 간다는 관찰도 포함되지요. 문학사적 견지에서 살피면, 근대문학 입구 쪽에 있던 시인 이상의 예에서 보듯 온갖 탈봉건의 갈등과 정체성 혼란에 사회적 핍박 뒤범벅이었는데 그에 못지않게 근대의 출구 벗어나기의 고역이 막심하게 가로막혀 있네요. ‘개발근대’ 당시의 악질적인 무기들을 골라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고 봐요. 근대의 출구라는 것, 이건 아직은 문학적 통찰이겠는데 문인들의 ‘선구’ 역할이 여전 유효합니다.
전 유신 탄압이 극에 이르다 종말을 맞은 79년에도 선생님은 자실 조직의 막후에서 문지기 노릇을 하고 계셨죠. 70년대 문예운동의 줄거리를 어떻게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시대 환경이 달라진 새로운 세대에게 말입니다.
박 유신압제라든지 독재라든지, 아무튼 그런 유형의 절대권력은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등장할 수는 없어요. 근대권력은 복합적인 사회관계로부터 조성되는 것이라 하여 사회과학자들은 실체설이 아니라 관계설로 분석해주잖습니까? 그런데 유신권력은 어땠나요? 군국주의 시절처럼 막무가내로 군림만 하려 한, 그래서 문인들이 실존적으로 항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체였거든요. 수난사-저항사와 함께 항쟁사의 훈련 기회를 파란만장한 한국 근대사는 제공해왔는데도 말이에요.
전 이를테면 ‘4·19’를 통과한 사회에 어떻게 유신과 같은 권력이 들어설 수 있느냐 하는 회의감도 느껴집니다. 사회 모순과 갈등에 맞서는 여러 방향의 시민 불복종 운동에 대한 조화롭고 슬기로운 답안지 마련이 곧 근대민주정치의 핵심일 텐데 왜, 어찌하여 유신시대는 무턱대고 완강하고 완고한 국가 폭압통치 국면을 노출했을까요? 선생님의 기록 중에는 국가사회와 시민사회의 내전 양상이라는 표현도 있던데요.
박 우리는 김주열 전태일 김상진 박종철 이한열 등의 청춘 삶에 ‘열사’ 칭호를 부여하는데 지사와 의사(義士)들이 꽃피우고자 했던 연대기를 제대로 기려서 계승하는 기록 사업이 문인에게 부여되어 있기도 합니다. 물론 문학의 날개가 녹아버린 이카로스 문인들을 비롯한 범생들은 더욱 많았지요. 그 정신을 어찌 이어받아야 할지 헤아리기도 해야 하고 말이지요. 74년 연초의 유신헌법 개헌 요구에서 촉발되어 자실 출범과 함께 문학예술 민주화운동의 조직화에 나섰던 70년대 작가운동은 대체로 3단계 심화 확대 과정이라, 살피게 됩니다.
79년 2월5일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소심당에서 열린 ‘양심범을 위한 문학의 밤’ 행사에서 발표 중인 박태순 작가. 작가회의 제공
전 선생님께서 70년대 문학운동을 순수문학-참여문학-실천문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요약한 바 있는데 그걸 의미하시는 건가요?
박 변혁운동은 민중의 생존권 싸움과 지식인의 사회운동 결합 양상으로 전개되는 거라는데 한국 문학이 전대미문의 사회변혁 상황에 맞닥뜨린 거였지요. 사회변동-문화변동 양상이 워낙 극심했던 질풍노도였던 것이니, 고상한 문사 문학보다는 지식인층과 민중층의 주변부가 문학의 현장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펜이 칼보다 강해야 하고 붓끝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라 하는 사회의 요청이 당시만 해도 호령 목청이었고요. 재야운동과 문학운동이 전체운동과 부문운동의 연대 양상이다가 자실이 조직되면서 문학운동이 전체운동의 양상을 띠게 되고, 그리고 이러한 운동문학은 지식인운동의 범주라기보다는 민중 생존권 싸움의 사실문학, 보고문학, 풍자문학 방향을 짚어내게 됩니다.
전 통상 작가가 작품으로 독자를 만나는 문학행위와 다른 코드인 실천문인운동이라는 ‘운동문학’이 요즘 세대에게는 실체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어요.
박 70년대로 들어서면서 분야별 지역별로 조성되는 사회운동단체들과는 성격이 다른 ‘재야운동본부’가 형성되는데 71년 봄의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처음이었고, 그리고 74년 11월 하순의 민주회복국민회의에는 야당 총재가 개인 자격으로 가입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단계의 재야운동은 덕망가 운동의 한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75년 5월13일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의 이른바 ‘긴조 전성시대’가 그만치 반민주체제의 국가병영사회였으니 더 강력한 스펙트럼의 응집이 마련돼야 한다는 거지요. 긴조 전성기의 개막은 언론인들의 대량 강압 퇴출에 이어 마이크로미디어인 정기간행물과 도서출판서적 판금 조치로 나타났고, 불순문인 명단을 작성해 각종 매체의 편집자들에게 뒷전으로 돌리기도 했어요. 도청·연금 등 감찰 상황은 더욱 심해지고 말이지요. 이어서 ‘이오덕 필화 사건’이라는 것으로 창작과비평 출판사 탄압과 ‘이문구 필화 사건’도 겹치고 ‘대마초 연예인’이라는 오명의 연예인 탄압과 금지 가요곡 명단도 발표되지요. 질식할 것처럼 숨 막히는 찜통사회에서 문학하는 죄 무엇으로 갚으려느냐, 낄낄거리는 낯짝들이 악몽 속에 계속 보이고 말이지요.
1977년 12월 평화시장 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기로 결성된 대책위에서 제정 발표한 ‘한국노동인권헌장’. 이창복 초안에 송건호·박태순이 교열 보완했다. 작가회의 제공
전 그러다가 76년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이 나오고 긴조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지 않습니까? 문학운동에서도 중요한 전기가 되는 시기인데,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박 76년 3월1일의 민주구국선언(문익환 초고, 윤보선·김대중 교열 작성)으로 ‘긴조 만능’만은 아니게 되지요. 그리고 이듬해 77년 3월에도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기로 하여 윤보선·정구영·양일동·함석헌·천관우·윤형중·지학순·박형규·정일형·조화순 등의 각계 인사들과 함께 문학 동네에서도 고은·김병걸·장용학·이문구·양성우·박태순 등이 서명했는데 고은은 4월15일부터 21일까지 6일간, 이문구는 14일에, 그리고 김병걸과 나는 15일에 연행되어 수일간 조사를 받았지요. 이해에는 미국 3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카터 정권의 유신독재 비판과 함께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벌어지고, 그런가 하면 글로벌스탠드의 양심법정에서 김지하 법정투쟁이 전개됩니다. 민주·민족·민중의 3민 선언문들도 쏟아져 나오는데 노동자-청년학생-지식인의 연대 양상이 달라집니다. 2월의 방림방적 6천여 여성근로자의 노동쟁의를 비롯하여 7월24일의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구속 및 평화시장 노동교실 폐쇄 사태로 ‘평화시장사건 대책위원회’가 결성됩니다. 이 위원회는 12월23일에 ‘한국노동인권헌장’을 발표하는데 이런 헌장은 처음 제정된 것으로, 이창복 초안에 송건호·박태순이 교열 보완했어요.
전 한국노동인권헌장 제정에 참여하면서 문인으로서 특별한 감회가 있으셨겠군요?
박 그럼요. 노동운동이 재야 민주화운동의 정중앙에 자리 잡기 시작하는 것이고 노동시, 노동소설 못지않게 노동문화의 바른 개념 정립에 문학 몫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자실이 덕망가 운동보다는 구체적 직접적으로 인간해방 문예와 민중생존권 운동으로 전환되는 단계에 이르지요. 뒤이어 78년 1월23일에는 ‘인권운동협의회’가 새로 발족해요. 원로 중심이 아니라 각계 운동권의 실무진 협의체 구성으로 됩니다. 시인 조남기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는 종로5가 케이엔시시(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매주 한 번씩 회합을 갖고 2층 강당에서는 목요기도회와 금요기도회 집회가 열립니다. 이 협의회는 당대의 실무진 운동가들이 운집했던 참으로 대단한 플랫폼이었어요.
무교동 음식점서 연 3돌 기념식서
자실 제3단계 진입 공표한 이후
‘구속자를 위한 문학의 밤’ 등
행사에 많은 인파 몰리며 열띤 호응
유신압제가 민주시민 훈련시킨 셈
78년 4월24일 자실과 통일문제연구소 공동 주최로 서울 소공동 성공회 본당 대강당에서 열린 ‘민족문학의 밤’ 행사 순서 안내문. 작가회의 제공
전 그런데 77년 6월에는 양성우의 ‘노예수첩 필화 사건’과 함께 고은·조태일 체포 구금 사건, 12월에는 ‘리영희 필화 사건’으로 창비사, 한길사의 출판탄압이 벌어지는 등 엎치고 덮친 격으로 복잡다단합니다. 그런가 하면 조영래·장기표·김명식·박양호라든가 유동우·석정남·이총각·임진택·김민기 등의 문예활동, 곧 민중을 위한 문예 아니라 민중에 의한 민중의 문예를 지향하고 추구하는 그러한 생산양식도 선생님의 실록은 주목해서 관찰했어요. 그것이 곧바로 게릴라 출판 형식이라 할 무크운동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박 무엇보다도 77년, 이해의 11월18일 무교동의 태화관 음식점에서 거행된 자실 창립 3돌 기념식이 중요한 전환 마련의 모임이었지요. 염무웅의 사회, 박태순의 경과보고에 이어 고은이 발표한 성명서의 제목이 ‘자실 제3선언문’이었지요. 제1선언은 물론 74년의 창립성명서이고 75년과 76년의 2단계를 거쳐 이제부터는 제3단계로 진입한다는 공표가 되는데 주목해봐야 하는 문학 문건이라 살핍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실 기획의 각종 행사에는 대단한 인파가 몰려드는 관행이 생겨나는데, 전체 운동의 앞지르기 선도와 뒤풀이 신명마당의 몫을 도맡게 됩니다. 이재정 신부의 배려로 성공회 소공동 본당에서 열린 78년 4월의 ‘민족문학의 밤’을 비롯한 ‘구속자를 위한 문학의 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들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는 ‘김지하 문학의 밤’이 대단한 열기의 호응이었어요. 뼈가 있는 농담 한마디 할까요? 유신압제가 민주시민 훈련을 시켜준 측면이 있어요(웃음).
전 유신이 종말을 고하는 79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80년대 문학운동으로 이월되는 과정도 기대됩니다. 한숨 돌리고 그 숨막히는 연대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