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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데모’ 반대했던 3인, 문단 대표로 ‘김대중내란음모’ 엮여

등록 2015-02-22 20:51수정 2015-04-27 22:01

왼쪽부터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고영직 교수.
왼쪽부터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고영직 교수.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⑮ 고영직이 묻고 신경림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여덟번째 주자로 시인 신경림(왼쪽)과 문학평론가 고영직(오른쪽) 교수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전후와 민족문학작가회의 대표 시절의 회고담을 들려준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13일 신 시인이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갇혀 지냈던 종로경찰서 뒷골목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이어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신경림은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동국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60년 동안 민중성을 시적으로 구현하는 시를 꾸준히 써왔다. 창작과비평사 편집 자문위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상임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으로 활약했다.

70년대 민중문학의 힘찬 전진을 예고하는 시집 <농무>를 비롯해 80년대 민요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한 <새재>, <달 넘세>, <남한강>을 펴냈다. 90년대 이후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의 여러 시집을 펴냈다. 산문집 <민요기행>, <시인을 찾아서>, <바람의 풍경>,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등 여러 저서가 있다.

“나는 길 속에서 자랐다”고 한 시인의 한마디는 자신의 시와 삶을 압축하는 표현이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다.

▶▶고영직은

196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92년 <한길문학>에 평론을 발표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 문예운동을 했으며, 신경림 시인이 결혼식 주례를 맡은 인연이 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대표, 인천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AALA)문학포럼 기획위원을 지내는 등 비서구 문학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했다.

편저로 <천상병 평론>(답게·2007)이 있으며, <희망의 예술>(솔·2007), <행복한 인문학>(임철우 외·이매진·2008), <경성에서 서울까지>(서해문집·2014) 등이 있다.

1973년 자비로 출판한 첫 시집 ‘농무’
만해문학상 받으며 ‘창비 시선’ 1호로
당시 문학운동 중심은 백낙청 ‘창비’

유신 극복 않고 문학할 수 없다 생각
내 일은 문단 지인들 참여 권하는 것
형사·정보부직원 3명 항상 따라다녀
명절때 시골까지 승용차 얻어타기도

이른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연초부터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7년 젊은 문인들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해 2월 신경림(가운데) 시인도 소설가 구중관(오른쪽) 등 문인들과 함께 전경들의 감시망을 뒤로한 채 도심 시위 현장에 나섰다. 사진 한국작가회의 제공
이른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연초부터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7년 젊은 문인들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해 2월 신경림(가운데) 시인도 소설가 구중관(오른쪽) 등 문인들과 함께 전경들의 감시망을 뒤로한 채 도심 시위 현장에 나섰다. 사진 한국작가회의 제공

고영직 1974년 선생님의 첫 시집 <농무>가 ‘창비 시선 1호’로 나왔지요. 그런데 원래는 73년에 자비 출판 형식으로 내셨다지요?

신경림 처음엔 아무도 시집을 내주겠다는 곳이 없었으니까. 그땐 상업출판 할 수 있는 사람이 서정주, 김광섭, 조병화, 유치환, 김남조 그리고 청록파, 뭐 그 정도였을 거야. 자비로 500부 찍었어. 그 이듬해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 ‘만해문학상’을 제정했는데 ‘농무’가 첫 수상작으로 뽑혔어. 그래서 다시 시집 500부를 찍었는데 반응이 좋으니까, 창비도 자신을 얻어 창비 시선을 시작하게 된 거지. 시도 팔릴 수 있구나 해서.

창비에 참여했던 분들이 자실에 그대로 참여하게 되잖아요?

그렇지. 사실 처음에 자실을 만든 것이 창비 중심이었으니까. 백낙청, 한남철, 조태일, 이문구, 염무웅, 박태순. 뭐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지. 그에 앞서 74년 1월 ‘문인 61인 개헌청원’을 주관한 것도 창비였고, 역시 백낙청씨가 그 중심에 있었지. 그때 모였던 명동성당 앞 카페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시간은 1월8일 오전 10시였어. 사실 내용은 별거 아니야, 부드럽고 약한 거였지. 그냥 대통령 직선제 같은 그런 개헌을 해달라고 한 거야. 그 일로 바로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문인 61명 몽땅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어. 그 사건이 발단이 돼서 ‘문인 간첩단 사건’도 터졌지.

최원식 선생은 한 평론에서 ‘자실은 카프(KAPF)의 복사판은 아니다’라고 했는데요?

물론이지. 세월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고. 나는 지금도 임화 말고는 카프에 정말 좋은 시인이 없다고 생각해. 카프는 어떤 면에서는 ‘싸가지 진보’의 문학이야. 자기 실생활하고는 관련 없이 머리로만 좌파 하는 사람들의 문학이야. 언어도 허풍스럽고 과장되고 왜곡돼 있고, 진실된 언어가 없어. 하여튼 위선적인 언어가 많아. 임화, 이찬의 시 정도가 아마 카프가 남겨놓은 자산이 아닐까.

70년에 김지하 시인이 <사상계> 5월호에 시 ‘오적’을 발표했습니다. 김 시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충격이었고, 감동이었지. 물론 지하의 지금 행적은 비판할 수 있겠지만, 60~70년대에 걸친 그의 문학적 업적이라든가 실천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해.

72년 유신체제 분위기를 표현한 선생님의 ‘폭풍’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 겨우내 우리는 두려워서 떨었다/ 자전거포도 순대국집도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실 출범 과정에서는 어떤 일을 주로 맡으셨어요?

그때 유신체제를 극복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문학을 할 수 없다, 우리 문학은 지금 군사통치하고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다 하고 있었어. 나는 기성문단의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참여를 권하는 일을 주로 했지. 진짜 큰일은 이문구, 박태순, 염무웅, 백낙청이 가장 많이 했고. 자실 출범 초기 고은이가 활약을 많이 했는데 그땐 ‘스타’였지, 기성문단에도 아는 사람이 많았고.

그해 9월 자실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출범했다. 앞서 그해 2월 자실 정기총회에서 ‘김남주 시인 석방 촉구 성명서’를 낭독했던 채광석 집행위원은 6월항쟁 직후 7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사진 한국작가회의 제공
그해 9월 자실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출범했다. 앞서 그해 2월 자실 정기총회에서 ‘김남주 시인 석방 촉구 성명서’를 낭독했던 채광석 집행위원은 6월항쟁 직후 7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사진 한국작가회의 제공
자실 결성 이후 79년 박정희가 죽기 전까지 힘든 시기였지요?

고생 많이들 했어. 간사 이상으로 참여한 사람들한테는 담당자(형사)들이 여럿 붙었어. 그때 내가 살던 안양에 한명, 사무실이 있던 서울 남대문경찰서에도 한명, 중앙정보부 또 한명까지 모두 세명이 내 담당자였지. 그래서 셋이 번갈아서 오는 거야. 가령 추석 때 시골 가잖아? 담당자가 시골까지 따라와. 내가 버스로 가니까 그도 당연히 버스로 갈밖에. 할 수 없이 담당자가 동네 업자 승용차를 징발해 와. 시골서는 “자네 출세했구나! 자가용 타고 오다니” 이러는 거지. 허허. 이 형사가 밥도 사주고 해야 되니까 죽을 맛이지. 거지한테 붙어 가지고.(웃음) 술집 가서 술 먹고 있으면 아는 사람이 “자네, 서울 가서 잘됐네” 하거든, 그러다 “이 사람, 따라온 형사야” 하면 어마 뜨거라 도망가버리지. 하하.

그때 이문구 선생의 일화가 많았지요?

이문구는 형사랑 아주 친해서 여관방에서 같이 자고 그래. “담배 사오라” 그러면 형사가 사다 주고, 술 사오라고 해도 술심부름하고 그래. 허허. “고스톱 좀 할 건데” 하면 화투도 사오고. 거의 머슴처럼. 허허. 형사들이 보니까 글 쓰는 사람들 돈도 없고 거지 같고, 사람들 마음만 풍족하고, 이거 뭐 그 담당자들 얘기가 그래, 파리 하나 못 죽일 사람들이 뭘 하겠느냐고.

이문구 선생의 인간적 풍모가 느껴집니다.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구속되셨죠?

아, 그렇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한 귀퉁이에 끼여 갔는데, 문단에서 나랑 조태일·구중서 셋이 끌려갔잖아. ‘5·18’ 며칠 전에 청진동 경주집에 모여 회의를 했는데, 우리도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어. 그때 반대를 강하게 한 게 우리 셋이었어. 우리는 귀찮아서, 목소리도 작은 우리 같은 사람들 나가봐야 표도 안 나니까 데모하지 말자고 했어. 그런데 그 셋만 잡혀간 거야.(허허) 구속을 시켜 놓고 검사가 우리한테 “왜 구속됐냐?”고 물어. 그래서 “우리가 어찌 아느냐”고 했지. 검사 대답이 문단에서 몇 사람 ‘비례대표’로 잡혀왔다는 거야.(하하)

상황은 심각한데 그 표현은 재밌네요.

훗날 풀려나서는 우리가 ‘문단 대표’로 갔다 왔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지. 그때 아마 두 달 좀 넘게 있었나? 조태일은 광주 출신이라고, 혹 무어가 있나 해서 더 붙잡아 놓았어. 아무 관련도 없기는 마찬가진데.

5·18 직전 청진동 문인 모임 갔다가
조태일, 구중서와 함께 구속
검사 왈, ‘문단 비례대표’로 왔다고
80년대엔 민요연구회·민요시 등
민요 통한 반독재민주화운동 펼쳐

6월 항쟁 이후 젊은세대와 의견차
내겐 더 좋은 문학하는 게 중요
말하자면 난 늘 온건파였지

80년에 그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자실은 사실상 와해된 상태 아니었나요? 생활은 어떠셨어요?

그래도 80년대에는 활달하게 글을 썼어. 전두환 정권이 엄청난 폭압정치를 했지만, 허술한 데도 많아서 글도 많이 쓰고 그랬어. 자실 친구들이 강연도 많이 다니고. 수요가 급증해서 우리가 대학을 거의 휩쓸었어, 대학 강연을. 가보면 박태순, 고은, 이문구, 염무웅, 조태일, 뭐 이런 사람들을 맨날 만났어. 사람들도 많이 왔어. 지금하고는 달라. 400~500명은 기본으로 모였어.

1974년 첫 시집 <농무>로 수상한 ‘제1회 만해문학상’ 시상식 자리의 ‘창비’ 백낙청 편집인(왼쪽부터)과 신동문 발행인, 수상자 신경림 시인. 신 시인은 84년 결성된 민요연구회(아래 왼쪽)와 더불어 민요시 운동을 펼치며 <새재>(아래 오른쪽) 등 여러 민요시집을 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첫 시집 <농무>로 수상한 ‘제1회 만해문학상’ 시상식 자리의 ‘창비’ 백낙청 편집인(왼쪽부터)과 신동문 발행인, 수상자 신경림 시인. 신 시인은 84년 결성된 민요연구회(아래 왼쪽)와 더불어 민요시 운동을 펼치며 <새재>(아래 오른쪽) 등 여러 민요시집을 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83년 창비에서 <민중문화와 제3세계>라는 책을 번역해 내셨죠. 81년 11월4·5일 일본 가와사키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내용입니다. 조세희 선생과 함께 초청받으셨던데 왜 안 가셨어요?

못 갔지. 여권을 안 내줘서. 제3세계 문학 쪽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오히려 세계문학의 새로운 길 같은 걸 거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걸 막연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까. 70년대 후반부터 남미 작품들도 좀 구해서 보고 그랬지. 그때 남미는 해방신학이 상당히 퍼져 있었고,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도 거기서 활동하셨던 분이지. 아마 그런 생각을 가진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세계아알라(AALA)라는 걸 만든 거겠지. 어쨌든 그때부터의 출국금지가 김영삼 정부 들어설 때까지 이어졌으니까.

84년 무렵부터 민요연구회 활동과 더불어 민요시운동을 하셨습니다. 89년 <민요기행>도 냈고요.

신 시인은 84년 결성된 민요연구회(아래 왼쪽)와 더불어 민요시 운동을 펼치며 <새재>(아래 오른쪽) 등 여러 민요시집을 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신 시인은 84년 결성된 민요연구회(아래 왼쪽)와 더불어 민요시 운동을 펼치며 <새재>(아래 오른쪽) 등 여러 민요시집을 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말하자면, 그때 박해가 심하니까, 문화운동의 하나로 민요라는 걸 통해 반독재운동도 하고 자유화·민주화운동을 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야. 민요연구회가 여러 지역과 대학에 생겨나고, 상당한 활동도 했어. 나는 민요가 지닌 여러 가지 미덕을 시 속에 재현함으로써 민족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시의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 해서 한 것도 있고, 다른 한 가지는 민주화운동에 일정 부분 기여해야겠다는 목적도 있었지. 그래서 <새재>도 쓰고, <남한강>도 썼지. 근데 나는 민요는 즐겁게 듣고 그랬지만, 민요조의 시를 쓰는 건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워. 민요는 이미 한 시대 지나간 옛말이요 정서이기 때문에 그걸 되살리기는 어려운 거야. 살아 있는 문학이 되기 힘들었지.

87년 6월항쟁 직후인 9월17일 자실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편되어 새로 출범합니다. 그 직전 작고한, 채광석 선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와 갈등이 심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지. 젊은층들은 이 격동기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역시 ‘문학은 문학’이라는 문학주의가 있었고. 그때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발전하면서 두 번째로 회장을 맡았지. 그때 나는, 자실이 말하자면 투쟁을 앞세운 문학단체였다면,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좋은 문학을 하고 민주화에도 또 기여를 한다는 목적을 가져야 한다, ‘더 좋은 문학’을 하는 목적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말하자면 온건파야, 나는 늘 온건파였지.

팔순에도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펴내는 등 활발히 시작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젊은 후배들에게 한말씀 해 주시죠.

요즘 젊은 사람들의 시를 읽으면 삶의 냄새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좀 다른 얘긴데, 작년 제이티비시(JTBC)에서 방영한<유나의 거리>(김운경 극본)라는 드라마를 즐겨 봤는데 우리가 문학에서 잃어버렸던 삶이 거기에 나오더라고. 요즘 문학에는 다 없어진…. 말하자면 옛날의 리얼리즘에서 보던 삶 같은 걸 볼 수 있어서 참 재밌더라고. 깡패, 꽃뱀 뭐 이런 못사는 사람들 속에 진짜 삶의 이야기가 있고, 따스한 정도 있고, 정의도 있고 그래. 덮어놓고 옛날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오늘의 우리 문학이 그러한 성격을 조금은 회복했으면 좋겠어. 성석제의 <투명인간>이던가? 거기에 그런 게 있던데.

선생님께 드라마 <유나의 거리>얘기를 들을 줄 미처 몰랐네요.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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