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여덟번째이자 마지막 주자인 문학평론가 구중서와 시인 이은봉이 자실 결성 전후 문단 상황과 80년대 참여문학 운동 등 회고담을 두 차례에 걸쳐 들려준다. 사진은 지난달 12일 서울 조계사 부근에서 만난 모습이다.
▶▶구중서는
193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3년 <신사조>에 문학평론 ‘역사를 사는 작가의 책임’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에는 문예지 <유심>을 통해 시조를 발표하기도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참여문학론, 리얼리즘문학론, 민족문학론 등을 제기하고 옹호하며 문학운동에 앞장서 왔다. 특히 70년 <창작과비평>에 평론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형성’을 발표한 이후 꾸준히 리얼리즘 주류론을 제창해 왔다. 이들 진보적인 문학이론에 입각해 평론집 <민족문학의 길>, <분단시대의 문학>, <한국문학과 역사의식>, <자연과 리얼리즘>, <문학과 현대사상>, <문학적 현실의 전개> 등을 펴냈고, 시조집 <불면의 좋은 시간>, <세족례> 등을 펴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가톨릭문화연구원 원장 등을 지냈다. 수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뒤 지금은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시·서·화를 함께 표현한 작품으로 꾸준히 전시회도 열고 있다. 2015년 2월 창간된 인문학 반년간지 <인문예술>의 편집에 참여하고 있다.
▶▶이은봉은
1953년 충남 공주(세종시)에서 태어나 숭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83년 <삶의 문학> 제5집에 평론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84년 창작과비평의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 외 6편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름> 등을 펴냈고, 평론집으로 <실사구시의 시학>, <진실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화두 또는 호기심> 등을 펴냈다.
한국작가회의의 이사, 감사, 사무총장, 부이사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구중서 평론가와는 작가회의 이사장과 사무총장으로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광주대 문예창작과의 교수로 후학을 키우는 한편 삶과 함께하는 문학, 현실과 함께하는 문학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왔다.
1970년 ‘사상계’ 4·19 10돌 특집서
참여문학 발전단계로 리얼리즘 역설
김병걸 임헌영 백낙청 염무웅 지지 속
반대하는 평론가 김현 등과는 대립각
1980년 자실 회의·지식인선언 직후
김대중 내란음모 참고인으로 불려가
먼저 와 있던 조태일·신경림 시인과
종로경찰서 3층 유치장 수감중
순경에게 소주 부탁해 나눠 마셔
1974년 1월7일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개헌지지를 밝힌 ‘문인 61인 선언’ 바로 다음날인 1월8일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문인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민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당시 ‘긴조 1호 발동, 개헌 논의 금지’를 알리는 <조선일보>의 속보판을 읽고 있는 시민들. <한겨레> 자료사진
이은봉 먼저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결성되기 이전의 문단 상황을 간략히 소개해주시지요.
구중서 다 알다시피, 한국작가회의의 출발점은 74년 11월18일 ‘자실’의 결성이죠. 문인들의 민주화 운동이 그때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60년 4·19혁명 이후 한국문학에는 종래의 경향과는 다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문단의 중심에서는 순수문학을 내걸고 자연적 서정, 무속적 정서, 기타 신변적 관심 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었지. 역사적 현실과는 관계가 먼 것이었는데, 4·19를 계기로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민주화의 대열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문단에서도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났다고 봐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 이전 1970년대 초반 <사상계>와 <창작과비평>을 무대로 전개된 ‘리얼리즘 논쟁’은 문인 민주화운동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오적 필화사건’으로 폐간된 ‘사상계’ 70년 5월호 마지막 호.
이 그 무렵 구체적인 작품 현황은 어땠는지요?
구 61년 최인훈의 소설 <광장>, 이호철의 <판문점>등이 발표되었고, 또 하근찬의 토속적이면서도 현실의식이 있는 <수난 이대><삼각의 집>등도 나왔어요. 이런 현상이 60년대 초 문학이 보여준 변모라 할 수 있죠. 그 무렵부터 ‘참여문학’이 자주 문단에서 거론되기 시작했구요.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 ‘금강’이 67년, 70년대 초에는 신경림의 시 ‘파장’ ‘농무’가, 황석영의 소설 <객지>가 이어졌고. 비평계에서도 60년대 들어 김병걸의 ‘순수와의 결별’과 김우종의 ‘순수의 자기기만’ 등이 발표되면서 참여문학이 추진됐어요. 60년대에는 내가 발표한 문학평론은 물론 동인지 <상황>에 담긴 내용들도 일관되게 참여문학과 민족문학을 추구했어요. 그러다가 참여문학이라는 것이 문학사적으로 좀 더 구체적인 논리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대두된 것이 리얼리즘이죠.
이 70년대 초의 리얼리즘 논쟁이 그렇게 시작된 거군요.
구중서의 ‘한국 리얼리즘문학의 형성’ 평론이 실린 ‘창비’ 70년 여름호.
구 월간 <사상계>가 70년 4월호에서 4·19혁명 10돌 기념특집을 하면서 한국문학의 현 단계와 관련해 성찰과 전망을 함께 논의해 보자고 해서 나도 좌담에 참여했어요. 그때는 김수영 시인이 50년대의 모더니즘문학으로부터 변모해 참여문학 성향의 시를 쓰고 있었는데, 김수영 시의 이러한 변모를 토대로 나는 리얼리즘을 주장했지요. 유럽 근대사에서도 시민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리얼리즘문학이 1830년대에 대두한 것을 상기하면서 참여문학의 원리론적 발전 단계로 리얼리즘이 필요하다고 봤으니까요. 이런 내 주장에 대해 평론가 김현은 지금의 한국 문단에서는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게 당위성이 없다고 반박했어요. 김현은 발자크가 시민민주주의로 인해 리얼리즘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귀족계급의 시각에서 신흥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에서 “망할 놈의 현실” 하는 투로 리얼리즘을 했다고 주장했어요. 발자크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현상으로 리얼리즘을 한 것이라고 그는 얘기한 거죠. 곧바로 나는 <창작과비평> 70년 여름호에 <사상계>의 리얼리즘 논쟁을 정리하는 가운데 ‘한국 리얼리즘문학의 형성’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발표했어요. 그러면서 김병걸, 임헌영, 백낙청, 염무웅, 구중서 등에 의해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대열이 형성된 거죠. 리얼리즘을 반대하는 대열에는 김현, 원형갑 등이 있었고.
‘4·19’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박정희·김종필 등 군인들이 ‘혁명’이라고 강변하며 군사통치를 계속 강화해 나가잖아요? 결국 80년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했는데, 바로 그 무렵 자실의 간사회의가 열렸어요. 지금의 청진동 종로구청 앞에 있던 ‘경주집’이라는 추어탕 전문식당으로 기억해요. 지금 같은 비상상황에 문인과 문단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를 논의했지요. 문학은 문인운동만으로 소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좋은 작품을 창작해 작품으로 발언을 하고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각성이 내게는 늘 있었어요.
이시영의 시에 담긴 당시 한 장면
“사람은 셋인데 수갑이 둘밖에 없는
거야/가운데 낀 신경림 시인이
나와 조태일 큰 걸음 따라잡느라
오리처럼 심하게 뒤뚱거렸지”
1980년 5월15일 발표된 ‘지식인 선언’에 서명했던 문인들은 ‘5·17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조작) 사건’에 엮여 수난을 겪었다. 특히 시인 신경림과 고 조태일, 문학평론가 구중서 등 3명은 ‘문인 대표’로 옥살이를 했다. 사진은 82년 12월15일 창작과비평사에서 주관한 ‘제1회 신동엽창작기금’ 전달식 때로, 왼쪽부터 조태일(옆얼굴)·이문구·인병선(신동엽 시인 부인)·구중서·정해렴(창비 편집부장)·이시영씨 등이다. 창비 제공
이 광주항쟁 때 자실과 우리 문단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구 자실 간사회의 직후 80년 5월15일 ‘지식인 선언’이 나왔어요. 자실에서는 소설가 이호철 선생이 앞장을 섰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정부를 맡은 최규하 내각에 대해 ‘과도기를 단축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등의 건의문을 제출하기 위해 이 선생이 백지를 들고 다니면서 서명을 받았어요. 그 무렵 김병걸 선생의 따님이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자실 회원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여서 서명들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이 이 사건으로 구속된 회원들도 있었지요?
구 나도 물론 ‘지식인 선언’에 지지 사인을 했어요. 80년 5월31일 신군부 세력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고 서대문에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는데, 어느 날 그 본부장인 전두환 육군 소장 이름으로 합동수사본부에서 호출장이 왔어요. ‘김대중 내란음모(조작) 사건’ 참고인으로 출석하라는 내용이었어요. 서대문으로 나갔더니, 계엄령하에서 연 자실의 청진동 간사회의와 ‘지식인 선언’ 서명이 모두 계엄포고령 위반이라는 거였어요. 나는 참고인이었는데도 며칠을 갇혀 있었어요. 그런 뒤 수사관이 한명씩 불러내더군요.
이 이호철 선생은 어찌 되셨나요?
구 이 선생은 다른 쪽으로 불려갔는데 물론 나중에야 알았죠. 때가 되자 식사를 하라고 했어요. 일렬로 죽 서서 식판을 들고 밥을 받아 와 벽을 등지고 앉았는데, 밥을 먹기가 싫지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누군가 식판을 내 앞에 놓으며 “먹어야 해요” 하고 말했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문학평론을 하던 김우창 고려대 영문과 교수였어요. 거기서 천관우 선생도 만났지요.
그 뒤 수사관한테 불려가 혼자 앉아 신문을 받았는데 무슨 종이 한장을 보여주더라고요. 들여다보니 ‘지식인 선언’이야. 수사관이 왜 이런 선언을 했느냐기에, 그 내용이 뭐 나쁜 게 있느냐고 되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는 서류를 탁 덮어버리면서 말하더군요. “당신, 곧 구속영장이 떨어져도 좋다는 뜻이지!” 그러더니 곧장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보냈어요.
그때는 전국의 감옥이 다 만원이라 영장이 떨어질 때까지 경찰서 유치장에서 대기를 해야 했어요. 형사를 따라 백주대낮에 쇠고랑을 차고 합동수사본부에서 서대문경찰서까지 걸어가게 한 다음 택시를 태워 종로경찰서로 넘기더군요. 종로에 갔더니 신경림·조태일 시인이 먼저 와 있는 거예요. 앞서 나왔듯이, 나까지 그렇게 세 사람이 ‘자실 대표’로 갇힌 셈이었어요. 유치장의 잡범들하고 같이 지내던 두 시인은 그 와중에도 내가 들어가자 반갑다고, 좋다고, 잘 왔다고 야단이었어요. 거기서 며칠을 있다가 영장이 떨어져 서대문교도소 미결감으로 다시 갔어요.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은 다 이야기할 수도 없어요. 그래도 그것이 역사의 이면이고 당대의 실상이잖아요? 그때 김수환 추기경이 어떻게 내 행방을 알고 영치금을 보내주셔서 크게 감동했지요. 종로경찰서장을 통해 보낸 거였어요. 바로 그날 3층 독방으로 우리 셋이 옮겨졌는데, 돈이 생기니 그나마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내가 복도의 순경을 불렀어요. 창살 밖 복도에 큰 주전자를 두고 그 주둥이에 컵을 거꾸로 꽂아서 철창 안에서 물을 따라 마시도록 돼 있었는데, 순경에게 부탁을 했어요. “주전자의 물을 다 비우고, 소주를 몇 병 사다가 좀 부어 줘요.” 순경이 대답하더군. “누구 목을 떼려고 그런 소리를 합니까? 안 돼요.” 그래도 내가 거듭 설득했어요. “당신도 알잖아. 우리가 무슨 죄인이야. 물 마시듯 조금씩 마실 테니 술 좀 사다 줘요.” 그렇게 말하고는 돈을 넉넉히 주었죠. 그랬더니 이 친구가 정말 그렇게 해줬어요. 소주 두 병을 사와 주전자에 부어준 거죠. 물론 안주는 없었지만, 우리 셋은 돌아가면서 소주를 따라 마시고는 적당히 취했어요. 취하기라도 해야 견딜 것 아니겠어요. 시간도 잘 가고. 그렇게 취한 채로 유치장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지냈어요. 신축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 천장이 시커먼 시멘트였지 아마?
이 그래서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는 얼마나 있으셨나요?
구 나는 한 주일 정도 있었어요.
이 정식으로 재판을 받으셨나요?
구 아니에요. 서대문교도소로 넘어갔다가 재판은 받지 않고 한 달쯤 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어요.
이 그건 그렇고, 74년 11월 자실의 101인 선언에 앞서 ‘61인 선언’이 있었지요?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개헌지지 선언이었지요?
구 유신헌법 개헌지지 선언은 명동의 코스모폴리탄 다방에서 했어요. 이희승, 안수길 선생도 나오셨어요. 60여명의 문인을 대표해 백낙청 교수가 선언문을 낭독했고. 자실 결성 10개월쯤 전이죠. 이 ‘61인 문인 선언’이 발표된 바로 다음날 1월8일에 ‘긴급조치 1호’가 나온 것을 보면 유신정권도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이 앞서 80년 6월에 종로경찰서 유치장으로 끌려갔다가 서대문교도소로 넘어갔다고 했는데, 그 장면을 이시영 시인이 시로 쓴 게 있지요.
구 그래요. 이시영의 ‘1980년 여름 종로경찰서’라는 제목의 시죠. ‘영장이 떨어져 백주에 서대문교도소로 넘어가야 했어./ 종로경찰서 마당에서 차를 타러 가는데 수갑을 채우는 거야./ 사람은 셋인데 수갑이 둘밖에 없는 거야./ 가운데 낀 신경림 시인이 나와 조태일의 큰 걸음을 따라잡느라 오리처럼 심하게 뒤뚱거렸지.’ 2003년 창비에서 나온 이시영의 시집 <은빛 호각>에 실려 있어요.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