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아홉번째이자 마지막 주자인 문학평론가 구중서(오른쪽)와 시인 이은봉(왼쪽)이 80년대 참여문학운동을 회고하고 그 의미를 들려준다. 사진은 지난달 12일 서울 조계사 부근에서 만난 모습이다.
1996년 사단법인 전환 작업 주도
‘어용’ 우려에 정부 지원 50%만 받아
당시 민예총서도 찬반 논란 뜨거워
‘실천문학’에 글 써 법인화 논의 주도
2007년엔 ‘한국작가회의’로 개명
정부 ‘시국집회 불참 서약’ 요구에
지원금 거부하고 저항글쓰기 나서
후원금에 ‘회비내기’ 바람 불어
한동안 자체예산으로 운영비 충당
문학평론가 구중서(오른쪽)와 시인 이은봉(왼쪽).
이은봉 이시영 시인이 쓴 ‘1980년 여름 종로경찰서’(<은빛 호각>, 창비시선, 2013년)를 킥킥거리며 읽었는데, 당사자들은 그때 심각한 상황이었겠지요. 서대문교도소에서 얼마나 있었나요?
구중서 신경림 시인과 나는 두 달 남짓 만에 기소유예로 나왔어요. 조태일은 광주 출신이고 김대중 총재에게 인쇄물을 해준 것도 문제가 되어 몇 달 더 붙잡혀 있었고. 그 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는 선언의 단계를 지나 조직의 단계로 나아갔어요. 1984년 12월 재창립을 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 교수도 참여했죠?
이 예. 저도 자실 재창립할 때는 준비단계부터 참여를 했지요. ‘삶의문학’ 동인을 대표해서요.
구 그 뒤 민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87년 6월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잖아요? 6월항쟁의 승리는 시민혁명의 승리였어요. 그 열기를 타고 87년 9월 자실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칭하고 회원도 늘어나 발전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죠.
민족문학작가회의가 2007년 12월8일 제21차 정기총회에서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었다. 사진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로 이어진 40년간의 역대 명판들. 작가회의 제공
이 90년대 들어 선생님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죠? 95년 기관지 <내일을 여는 작가>를 창간할 때도 깊이 관여를 하셨구요.
구 그때 송기숙 회장에, 내가 부회장이었어요. 내게 기관지 발행과 사단법인 추진 작업이 맡겨졌어요. 문예지 <내일을 여는 작가>를 계간으로 창간했고, 96년 사단법인으로 전환했죠. 본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람들은 좀 결벽스러워요. 누군가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 것이 어용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래서 지원금은 소요예산의 50%만 받고 나머지 절반은 자체 조달을 하자고 제안했어요. 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문민화’라는 명분으로 전두환·노태우 등이 구속되는 단계였지요. 출범 이래 줄곧 민주화운동을 해온 민족문학작가회의로서는 충분히 국민의 세금으로 주는 문예진흥원기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어요.
이 사단법인화를 둘러싸고 우리 작가회의뿐만 아니라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차원에서도 찬반 논란이 뜨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앞서 93년<실천문학>가을호에서 선생님은 ‘문학·제도·역사’ 기고문을 통해 법인화 논의를 주도했지요.
구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문학운동의 내용도 보강하면서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꿨어요. 이제는 그 뒤의 얘기를 해야겠어요. 2010년 2월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 내가 이사장을 맡게 됐잖아요. 그런데 전임 최일남 이사장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는 과정인데, 하필 정부 쪽에서 ‘시국집회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라는 요구를 해왔어요. 그래야만 문광부의 지원금을 주겠다는 조건부였어요. 이사장 취임 총회에서 그 사실을 전했더니, 회원들 모두 그런 요구를 하는 이명박 정부한테서는 지원금을 받지 말자고 결의했어요. 만장일치였죠. 시위 참여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로 헌법적 권리잖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한국작가회의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지 않고,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펴나가기로 했어요. 그 뒤 실제로 한동안 한국작가회의는 정부 지원금을 거부했구요.
이 그 무렵 제가 사무총장으로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한국작가회의는 지난해 11월22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창립 40돌 기념행사를 열고 ‘문학과 희망의 백년대계’를 선포했다. 백기완, 홍성우, 임재경, 함세웅, 고 김근태, 신학철, 전인권, 개그콘서트, 윤선애, 주홍미, 조영선, 박태순씨에게 ‘작가의 벗’이란 공로패도 증정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구 맞아요. 2010년 2월 나와 함께 소설가 김남일이 사무총장으로 임기를 시작했는데 그해 5월 위암으로 수술을 하게 됐어요. 퇴원을 한 뒤에는 오랫동안 요양을 하느라 복귀가 어렵게 되자 사무총장을 다시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어요. 그래서 2011년 2월 총회에서 이 교수에게 남은 임기 1년을 맡기게 된 거죠. 무보수 자원봉사로 참 수고가 많았어요.
이 마침 안식년이어서 기꺼이 도울 수 있었지요.
구 아무튼 2010년 총회에서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기로 선언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어요. 뜻밖의 후원금이 들어온 거예요. 그때까지 받았던 정부 지원금이 1년에 기껏 3400만원이었는데, 회원인 평론가 김병익이 혼자서 그만큼을 회비로 냈어요. 여의사인 김지영 내과원장은 문인도 아닌데 1000만원을 기부했고, 인사동 예술인들의 후원자를 자처해온 김명성 아라아트센터 대표도 1000만원을 내놓았어요. 그는 80년대부터 시인들과 함께 광화문 뒷골목에서 <시인통신>이라는 무크지(부정기 간행물)를 만들었고 시를 쓰기도 했죠. 그래서 5400만원이 모인 거예요.
이 회원들 사이에서도 ‘회비 내기’ 바람이 분 덕분에 은행자동이체(CMS) 납부 비율도 아주 높아졌구요. 그때 자동이체 회원이 600명에서 700명, 700명에서 800명으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고 들었어요. 아마 지금은 1000명이 넘을 거예요.
구 그렇게 작가회의는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운영비를 감당할 수 있는 체제로 안정될 수 있었어요. 전화위복이었죠. 그때부터 내내 ‘저항의 글쓰기 운동’도 추진했어요. 지원금이 끊겨 기관지를 내지 못하는 대신 회원들이 글을 써서 거리에서 직접 발표를 했어요. 대학로의 한 공원에서 시낭송회를 여는 방식으로 ‘저항’과 ‘시위’를 한 거죠.
2011년부턴 강정 해군기지 반대
각종 매체에 연속 칼럼 게재
임진각서 제주까지 도보 순례도
겨울 칼바람 속 비장함 보여줘
작가회의 단결된 행동은 ‘전통’
2011년 12월26일 파주 임진각에서 출발한 작가회의의 ‘글발글발 평화릴레이’ 답사단이 마지막날인 2012년 1월20일 주민들과 함께 서귀포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건설 현장을 향해 걷고 있는 모습. 작가회의 제공
이 이듬해에는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으로 작가회의도 바빠졌지요?
구 2011년 봄부터 작가회의 회원들이 지속적으로 각종 매체에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칼럼을 썼어요. 급기야 그해 12월에는 작가들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어요. 임진각에서 출발해 서해 쪽 경로를 따라 제주도까지 걸어가는 도보순례를 했어요. 구간별로 교대를 해가며 릴레이식으로 연인원 500명의 작가들이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동참한 거죠.
이 ‘생명평화걷기-글발글발 평화릴레이’ 때 사무총장으로 저 역시 임진각에서 출발할 때, 제 고향인 세종시 구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주시에서 강정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참여했지요.
구 나는 임진각에서 출발할 때 참가했어요. 이어서 장정의 행렬이 계속됐는데, 멀리 동쪽 강원도 지역의 회원들도 기꺼이 달려왔어요. 작은 깃발은 배낭에 꽂고 큰 플래카드는 손으로 들고 걸었어요. 마침 겨울이라 눈이 많이 내린 날도 있었는데, 백설 위를 걷는 그 모습이 비장하면서도 장엄했어요. 그 뒤 개인적으로도 강정마을에 간 적이 있구요.
이 작가회의의 단결된 행보는 하나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구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한국 문단의 유능한 작가들이 거의 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라는 겁니다. 또 그들이 기꺼이 특별회비 등을 내면서 작가회의가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겁니다. 회원들이 경조사 때마다 상부상조하는 미덕도 남다르지요. 김남일 사무총장의 투병을 위해 모금을 했을 때도 대단했어요. 공개적으로 모금한 것도 아닌데, 그냥 입소문을 전해듣고 2300만원이나 모였어요.
2010년 2월20일 정기총회에서 한국작가회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집회 불참 확인서 요구와 관련해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는 대신 ‘저항적 글쓰기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총회에서 바뀐 신구 임원진의 기념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정희성, 박용수, 신경림, 최일남, 구중서 신임 이사장, 고은, 박석무. 뒷줄 맨 왼쪽 이은봉. 작가회의 제공
이 2011년에는 지금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정우영 시인이 암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을 했었어요. 그때도 알음알음으로 모금이 이뤄져 치료비를 보탠 적이 있어요. 김해자 시인이 아팠을 때도, 송경동 시인이 다쳤을 때도 비공식적으로 모금해서 도울 수 있었구요.
구 송 시인은 2011년 부산의 한진중공업 노동자 해직 철회 시위 때 ‘희망버스 운동’을 조직하고 투쟁에 앞장서느라 여러 차례 다치기도 했어요. 모금도 몇 차례 해서 2600여만원을 모았어요. 마침 내가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자리에서 그 돈을 송 시인에게 전달했는데, 서로 끌어안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느꼈지요. 이 시대에도 작가회의가 인정과 의리와 순수한 창작 열정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구요.
이 얘기를 잠시 거슬러 올라가서, 71년 선생님이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창조>잡지를 만드실 때의 사건들도 자실의 전사(前史)가 아닐까 합니다.
구 ‘창조’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던 월간지로 발행인이 김수환 추기경이었어요. 내가 편집주간을 맡아, 72년 4월호에 김지하의 담시 ‘비어’(蜚語)를 실어 문제가 됐었지요. ‘비어’는 김지하가 ‘오적’(五賊) 이후에 쓴 대작인데, 사실은 ‘오적’보다 작품성이 더 있었어요.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이십여일 시달림을 당했어요. 잡지는 물론 전부 회수되었고. 그런 일이 있고 난 직후 ‘10월 유신’이 터졌지요. 그래도 계속 잡지를 간행했는데 핍박이 심해져서 자진 정간을 하고 말았어요. 요즈음 작가회의 젊은 회원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거예요. 초창기 작가회의 회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경찰서뿐 아니라 남산의 중정으로도 끌려가고, 심지어 군 보안사로 연행되는 사례도 있었어요. 개인적인 얘기를 하기는 쑥스럽지만, 나같이 온건한 사람도 여러 번 연행을 당했으니까.
이 74년 일본에서 간행된 잡지 <한양>사건으로도 조사를 받으셨지요?
구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이라고 대대적으로 조작 발표했지요. 난 참고인으로 서빙고 보안사에 연행되었는데 수사관이 지하실에서 전기의자에 태우겠다고 협박을 하더군요. 차라리 교도소에 가겠다고 버텼지요. 혐의를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부터 문인들이 사회 참여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역사의식을 바탕에 둔 리얼리즘 문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오늘날까지 계속된 겁니다. 리얼리즘을 주류로 다른 경향의 문학을 포괄해야 걸작이 태어나는 겁니다.
이 50년대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 작가회의와 <창비>문학의 핵심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금은 모더니즘이 다시 나와 작가회의 중심의 리얼리즘에 대해 반발을 하는 듯싶어요. ‘창비시선’도 그것을 수용하고 있고요. 이른바 미래파라는 것도 그런 흐름이 아닌가 하는데요. 지금의 시단이 새로운 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있지 않으냐는 거지요.
구 지금 우리 문학에 모더니즘이 중심이 될 당위성은 없어요. 좋은 의미의 리얼리즘을 계속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리얼리즘은 끝이 없는 거니까. 리얼리즘이 문단의 주류가 되어야 해요. 리얼리즘의 총체성·전형성·전망, 이 세 가지를 견지하면 좋은 문학이 나올 수 있어요. ‘전망’ 안에 상상력과 이상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리얼리즘이 주류를 견지하는 게 중요해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면서, 엇나가고 파괴하고 싶어하는 어떤 개성적 자유는 다양성으로 보고 말이죠.
이 선생님의 여러 가지 말씀을 숙고하겠습니다. <끝>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