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술꾼들이 슬슬 기지개를 켤 시간이다. 다음 포털의 ‘만화 속 세상’에서 <술꾼도시처녀들>을 연재하고 있는 미깡 작가를 홍대 앞의 한 일본식 술집에서 만났다. 도시 여자들의 음주생활을 그려온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로 소개한 곳은 정말 술집이었다. 술꾼 생태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아이디어가 태어난 곳이다.
“술집에서 직접 소재를 얻는 것은 아니고, 마시다 보면 켜켜이 쌓인 기억을 건드리며 새로운 이야기가 생각나죠. 북적이는 술집에선 주로 술마시는 풍경을 염탐한다면, 바에선 조용히 상념에 젖는 편이에요.” 먼저 사케 한 잔을 따라놓고 미깡 작가가 말했다. 술로 시작해 안주로 끝맺는 이야기를 그리다 보니 다른 테이블은 무슨 안주를 시키나 넘겨다 보고 주방도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소한 일상과 공감을 그리는 생활툰이 커가면서 웹 기획자, 자유기고가로 일하던 작가는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2014년 술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만화로 그리면 어떨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친 김에 그리기 시작했다. <술꾼도시처녀들>은 36살 동갑내기 친구 꾸미와 리우, 정뚱이라는 세 여자가 술 때문에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취중 만담과도 같은 만화다. 밝은 달을 보면 감자전에 막거리를 떠올리고, 술 깬 다음날 가방 속에서 술집 메뉴판을 발견하는 등 그야말로 술을 부르는 에피소드들로 독자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작가가 먼저 허리띠를 풀어놓고 독자들이 저마다 술 사고담을 털어놓는 바람에 댓글 창도 얼큰하게 취한듯 흥청인다.
세 여자의 ‘취중만담’ 그리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위해
실제 술자리에 수첩 들고 가
아이디어 정리·스케치도
적나라한 묘사 술집에서 탄생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작가는 실제 만나보니 외모는 만화속 꾸미와 비슷하고 성실한 성격은 정뚱처럼 보였다. 술마시는 세 여자는 모두 작가의 여러 얼굴인 셈이다. “‘마감주의자’에요. 매주 금요일 연재하는데 보통은 화요일, 늦어도 수요일까진 마감해요. 술도 성실하게 마시고 웹툰도 성실하게 그리는 편이죠.” 만화가로 데뷔한 뒤엔 혹시 아이디어가 떠오를까 해서 술자리에도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가끔 스케치를 할 때도 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으니 못그리면 못그리는 대로 펜과 물감으로 손맛나는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밤 9시, 미깡 작가의 오래된 단골집이라는 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혼자 바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단정한 주방을 건너다 보기를 좋아한다는 작가는 천상 술꾼이다. “회사 다닐 땐 늦은 오후 무렵 혼자서 한 잔씩 하는 일이 많았어요. 여자 혼자 술마시는 풍경이 익숙하지 않으니 진정 술이 고프고 마음이 고파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술집을 작업실로 꼽는다면 괜찮은 술집은 어떤 곳인지 기준도 있을 법하다. “당연히 안주가 맛있어야 하고, 주인이 적당히 친절하면서도 조금은 냉랭해야 해요. 테이블마다 간격이 있어서 각자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티브이가 있어도 안되고요. 티브이 채널은 순전히 주인 마음대로 정하잖아요. 단 시즌 때 야구 중계는 예외에요. 두산 경기라면!”
작가가 즐겨 찾는 홍대 앞 일본식 술집. 오성훈 제공
술 이야기를 빚는 작가인 만큼 음주철학 같은 건 없을까? “그냥 즐겁게 마시자는 주의죠. 술꾼 모델은 있어요. 아는 회사원인데 술 마시면서 자기 힘든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어요. 매번 좋은 이야기만 할 수 없고 속내를 털어놓지 않을 수도 없지만 절제하는 거죠.” 작가의 음주철학은 아무래도 ‘거리두기’로 요약될 법 하다. 절제하는 술꾼 선배는 만화에서 마 작가의 모델이 됐단다.
밤 12시, 집으로 가려던 작가 전화기가 울렸다. 근처에서 술 마시던 다른 웹툰 작가들이었다. 술자리가 섞이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작가는 처음으로 수첩을 가방 속에 넣었다. 작업을 끝내고 “술과 안주와의 케미(화학반응)를 찾아 본능적으로” 움직일 시간이다. <술꾼도시처녀들>은 11월5일부터 5번째 시즌으로 새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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