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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쓰이 문서’란? 초창기 한반도 고적조사 핵심 참고자료…메모·사진목록 등 1만점

등록 2016-02-29 18:54수정 2016-03-02 10:58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① 경주발굴 첫발은 ‘진구왕후에 대한 미몽’
‘야쓰이 비망록’으로도 불리는 야쓰이 문서는 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의 고서점가 등에서 입수해 연구중인 1만점 가까운 조선고적조사 관련 컬렉션이다. 야쓰이의 외동딸이 보관해오다 최근 그가 숨지면서 현지 고서시장에 나왔던 이 컬렉션에는 ‘계림기행’으로 이름붙인 1909년 첫 고적조사 당시의 조사 일지와 사진촬영 목록을 비롯해 대학시절 연습문, 이력서, 주요 메모, 급여서류, 각종 조사경비 영수증 등이 포함돼있다. 지금도 공백이 많은 일제강점 초기 고적사업의 면모를 복원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연구자료들로 평가된다. 1909년 조선 고적조사를 시작하기 전 야쓰이의 학창시절부터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도보’를 편찬하는 과정, 1921년 부친의 병환을 이유로 갑자기 고향 와카야마로 돌아간 뒤 정계에 들어가 고적조사를 지원한 행적까지 두루 파악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 교수는 컬렉션 중에서도 경주, 평양, 나주 반남 고적들의 미공개 사진들과 사진목록 등의 가치가 각별하다고 짚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 고적들을 찍은 수만여점의 유리건판 자료들과 관련 문서들이 남아있는데, 이 자료들이 상당부분 야쓰이의 촬영본과 사진기록 작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두 자료의 정밀한 비교검토를 통해 일제강점기 전후의 고적조사와 문화재 정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설명이다.   

야쓰이는 1909년 고적조사에 처음 참가할 당시엔 조사단장 세키노의 실무 조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진구왕후의 한반도정벌설과 임나일본부설을 유적발굴로 실증하려는 그의 의도가 개입되면서 조사범위가 건축물을 넘어 고분과 역사유적 등으로 확대됐고, 그는 점차 조사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떠맡게 된다. 1909년부터 1915년까지 매년 세키노와 함께 벌인 예비조사를 마치고 1916년 총독부가 조선고적조사 5개년 계획을 입안할 당시 기획을 주도한 것은 야쓰이였고, 그가 세운 조사계획을 바탕으로 20년대 이후 경주와 평양 등에서 신라, 고구려, 낙랑 유적의 대대적인 발굴성과가 이어졌다는 게 정 교수의 분석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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