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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거다!” 야쓰이는 경주 봉분을 파헤쳤다

등록 2016-03-08 20:39수정 2016-03-10 10:56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② 경주 고분 조사 <1>
야쓰이 세이치가 1909년 처음 발굴한 경주 서악리 석침총의 서쪽 면의 모습. 사진 ‘조선고적도보‘
야쓰이 세이치가 1909년 처음 발굴한 경주 서악리 석침총의 서쪽 면의 모습. 사진 ‘조선고적도보‘
천년 신라의 고도인 경주 분지 벌판과 산자락 구릉에는 언덕 같은 고분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신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문화유산들이다. 이 신라 고분들은 어떤 경로로 20세기 초 근대기에 신라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 된 것일까. 역설적으로 그 배경에는 도쿄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20세기 초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진구왕후의 신라정벌설을 입증하는 물증을 찾기 위한 첫 기획으로 신라 고분 발굴이 전폭적으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신라정벌설 물증을 찾으려
고분 발굴 열망에 불타던 그는
1909년 경주 서악리로 갔다
4개의 봉분을 보자 눈이 번뜩
곡괭이·삽으로 파고 또 파고…

도굴같은 발굴작업 한나절에
높이 2m 텅 빈 석실이 드러났고
주검 돌베개에 토기조각까지
근대 발굴 사상 처음으로
6세기말 석침총 마주한 순간이었다

야쓰이가 발굴한 석침총 출토물들. 왼쪽부터 돌베개와 토기 조각, 토기 뚜껑들이다. 사진 ‘조선고적도보‘
야쓰이가 발굴한 석침총 출토물들. 왼쪽부터 돌베개와 토기 조각, 토기 뚜껑들이다. 사진 ‘조선고적도보‘
1909년 9월부터 세키노 단장과 함께 조선 고적 조사에 나선 야쓰이 세이치가 진구왕후의 미몽에 들떠 신라 고분 발굴에 착수한 것은 조사의 끝물인 같은 해 12월10일이었다. 야쓰이의 촬영일지를 보면, 앞서 조사단은 8일 오후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경주에 도착했다. 이날 일행은 경주 들머리 어귀의 건천읍 근처에서 도로 공사 중 파괴되거나 도굴돼 토기 파편이 굴러다니는 금척리 고분을 보고는 간단히 현장상황을 기록했다. 이미 고분에서 다량의 고고유물이 출토된 것을 보고 촬영했다는 기록이 나와 그때 이미 신라 고분의 출토품들이 떠돌아다닌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전국적으로 일인들의 사주를 받은 도굴꾼들이 평양, 개성, 경주 등지의 고도에서 고분에 대한 도굴을 자행해 곳곳의 고분들이 폭탄을 맞은 듯 구덩이가 뚫리는 참상이 빚어지는 즈음이었다. 뒤이어 경주 시내에 여장을 푼 이들은 9일 우선 분황사를 들러 폐허처럼 잡풀이 자라 방치된 9층탑의 주위를 조사하고 사진을 찍은 뒤 10일 경주 서쪽의 진산인 선도산 줄기 자락의 서악리로 갔다.

이들은 이날 오전 곧장 경주시내를 빠져나와 형산강 건너 김유신의 무덤을 답사한 뒤 오후에 서악리 근처에 이르렀다. 서악리는 6기의 큰 고분이 선도산 산줄기 아래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주위 숲속과 벌판에는 태종무열왕 비와 김양의 무덤을 비롯한 숱한 대소 고분들이 흩어진 신라 문화유산의 또다른 보고였다. 봉분이 인상적으로 도드라진 고분군 자체가 산세와 어울려 빚어내는 색다른 진경에 아마도 야쓰이는 탄성을 터뜨렸을 것이다. 3년 전인 1906년 도쿄대 대학원생 신분으로 경주 수학여행을 왔던 동료 이마니시 류가 서악리 고분의 풍경을 보고 “선도산의 한 갈래 봉우리에 능묘가 중첩돼 산 모양을 바꿔놓을 정도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며 찬탄했던 대로였다.

야쓰이는 서악리 고분군 앞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거북이상이 섬세하게 용이 조각된 비의 머리(이수)를 떠받친 한국 고대 비석의 최고 명품 태종무열왕 비와 길 건너편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김양, 김인문의 무덤을 돌아보며 그는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일지에 피사체의 내역을 적어 내려갔다. 이마의 땀을 쓸어내리며 작업에 몰두했던 야쓰이는 점심을 먹은 뒤 서악리 언덕에서 망중한에 젖어 남쪽을 바라다보았다. 대나무와 송림이 간간이 보이는 민둥산 장산 자락 능선에 눈에 확 뜨이는 네개의 봉분이 다가왔다. 고분 발굴의 열망에 불타고 있던 야쓰이의 눈빛이 번득거렸다. “그래 이거다!”

관의 지원을 받는 공식 고적조사사업으로는 최초의 신라 고분 조사인 서악리 석침총 발굴은 이렇게 시작된다. 야쓰이는 네개의 봉분 가운데 우선 아래쪽에서 두번째 봉분(나중에 돌베개(석침)가 나와 석침총으로 불리게 된다)을 점찍고 당장 조선인 인부 몇몇을 불러 곡괭이와 삽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치밀한 사전 준비도 없이 즉흥적으로 봉분 위쪽에서 아래쪽을 파들어가는 도굴에 가까운 발굴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한일병합을 앞두고 이미 식민지로 전락한 당시 조선에서는 무장한 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얼마든지 이런 식의 즉흥적 발굴이 가능했다. 이런 ‘파고보자’식 발굴은 당시 일본에선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땅을 그들의 고고학 실습장처럼 농단했다는 비판을 후대 학계로부터 받게 된다.

야쓰이가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현장 발굴 결과는 어떠했을까. 당시 정황을 보여주는 희귀한 기록이 하나 남아 있다. 야쓰이가 이듬해인 1910년 일본 고고학회의 잡지 <고고계> 8편에 실은 ‘한국 경주 서악의 일 고분에 대해’란 논문이 그것이다. 이 글에는 당시 한반도 근대 고분 발굴의 시원이 된 석침총 발굴 상황과 석침총의 위치 등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가 실려 있다. 이 논문을 보면, 야쓰이는 인부를 동원해 봉분의 꼭대기에 구멍을 뚫고 아래로 파내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절 작업 끝에 삽날에 걸린 것은 석실의 천장 뚜껑돌이었다. 뚜껑돌을 걷어내고 아래로 내려가니 높이가 2m를 조금 넘는 석실이 나타났다. 네 벽과 천장에 회칠이 얇게 되어 있고 회칠한 모래 위에 진흙이 덮인 바닥에는 주검을 누이는 시상대와 머리를 받치는 돌베개, 그리고 토기 조각들이 떨어져 있었다. 6세기 말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돌베개가 나왔다 하여 석침총으로 이름 붙인 신라 고분의 실체가 근대기 처음 야쓰이라는 젊은 일본인 학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고침/1일치 26면에 실린 연재 1회 내용 가운데 세키노 조사단이 경주에 도착한 날짜를 12월12일에서 12월8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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