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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낙랑유적 조사, ‘고대사 전쟁’의 씨앗으로

등록 2016-04-05 18:59수정 2016-04-11 14:45

1909년 세키노와 야쓰이가 찾아간 평양 석암리 고분의 조사 전 모습.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으로 촌부들과 목동, 소들이 무덤 주위에 보인다.
1909년 세키노와 야쓰이가 찾아간 평양 석암리 고분의 조사 전 모습.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으로 촌부들과 목동, 소들이 무덤 주위에 보인다.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④ 평양 일대 고분발굴
옛 한나라의 지방행정조직인 ’낙랑군’은 지금 국내 강단, 재야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대사 전쟁의 뜨거운 불씨다. <사기> ‘조선열전’을 보면,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는 군사를 일으켜 고조선을 무너뜨린 뒤 강역 여러곳에 행정조직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그것이 곧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이다. 기존 학계의 통설로는 한반도 북부 평안,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았던 진번, 임둔, 현도군이 현지민들의 저항으로 20~30년만에 없어지거나 만주 일대로 옮겨갔고, 고조선 중심부 평양 일대에 들어선 낙랑군만이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흡수될 때까지 400여년간 존속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한사군이 정말 한반도 북부에 있었는지, 그 중에서도 핵심인 낙랑군이 평양 중심의 서북지방 일대에 있었는지, 아니면 만주의 요동, 요서에 있었는지를 따지는 위치 논란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쟁 이래로 유구한 전통을 이어왔다. 이미 조선 전기 <세종실록>과 <고려사>의 지리지 등에서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다른 군들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는 추정이 제기됐다. 조선후기에는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한백겸, 정약용 등과 낙랑군의 요동설을 주장하는 이익이 서로 다른 논고를 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낙랑군으로 초점을 좁혀 이 행정조직의 성격과 이후 삼한과 삼국의 형성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놓고 재야, 강단사학계는 물론, 강단의 문헌사, 고고학계에서 논쟁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그만큼 낙랑군 설치 전후의 역사가 고조선과 마한·진한·변한의 삼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강역, 정치, 문화적 성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오늘날 낙랑군 논란은 20세기초 세키노 다다시와 야쓰이 세이이쓰, 이마니시 류 등의 일본 학자들이 벌인 평양 일대의 한나라식 벽돌무덤과 토성 등 유적,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기본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당시 일본학자들은 이 유적들을 한나라가 점유했던 낙랑군 유산으로 기정사실화했고, 이런 견해가 오늘날도 국내 문헌사,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정설로 수용되고 있다. 반면 국내 재야사학자들은 일본 학자들이 식민지배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역사 왜곡과 조작을 자행했다며 그들의 조사내용을 부정해왔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시작된 평양 부근의 낙랑 유적 조사가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위한 의도를 깔고 있다는 점은 양쪽 모두 수긍하는 쪽이다. 그러나 일본 학자들이 당시 벌인 현장 조사 내용을 전면 부정할 것인지, 수용한다면 어디까지 사실로 인정할 것인지는 아직도 쟁점으로 남아있다. 사실 논란이 여지껏 정리되지 않는 것은 국내 학계가 일본학자들의 조사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온 허물도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1909년 세키노와 야쓰이가 대한제국 정부의 부탁을 받고 벌인 최초의 관 주도 고적발굴조사는 후대 한사군, 낙랑군 논란의 발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야쓰이 비망록 컬렉션에 있는 기행엽서와 촬영일지 등을 보면, 야쓰이 일행은 그해 9월까지 경성과 개성을 조사하고, 황주를 거쳐 10월9일 밤 평양에 도착한다. 그 뒤 이들은 한달여간 평양 일대의 고대 유적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면서 처음 석암리 일대의 낙랑고분을 굴착조사한다. 야쓰이가 당시 일본 역사지리협회에 보낸 엽서를 보면, 일행은 “원래 금강산에 오르기 위해 원산 방면으로 가려했지만, 이 경우 3주나 걸리므로 생략하고 함경, 강원, 전라도 등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이 실제로 경성, 개성, 평양, 의주 등의 서북지방 쪽 답사로를 먼저 택한 것은 1900년 앞서 조선을 답사한 야기 쇼자부로의 조사 경로를 대체로 따라간듯한 인상이 짙다. 앞서 19세기말 청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하야시 다이스케, 나카 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등의 학자들이 한사군 위치에 대한 논고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정복해야할 조선’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야쓰이의 머리 속엔 한사군으로 대표되는 고대 조선 핵심부의 역사적 실체를 발굴조사로 고증하려는 목적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곧장 발굴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10월10일부터 나흘간은 평양 시내에서 기자묘와 기자 정전의 표석, 보통문 등을 답사하고 실측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이런 와중에 솔깃한 정보가 세키노와 야쓰이 앞으로 날아들었다. “평양시내 남쪽 대동강변에 오래된 고분들이 흩어져있으니 함께 가보자”는 <평양일보> 사장 시라카와 쇼지의 제보였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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