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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이가 처음 꺼내고 이마니시가 굳힌 한반도낙랑군설

등록 2016-06-14 16:18수정 2016-06-15 00:58

1909년 평양 석암리 고분을 야쓰이 세이이치와 함께 발굴한 세키노 다다시 도쿄제대 교수(왼쪽). 그는 1910년 이 유적의 성격을 놓고 낙랑군 무덤이란 반론을 제기한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오른쪽)를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이후 철저히 배격했다.
1909년 평양 석암리 고분을 야쓰이 세이이치와 함께 발굴한 세키노 다다시 도쿄제대 교수(왼쪽). 그는 1910년 이 유적의 성격을 놓고 낙랑군 무덤이란 반론을 제기한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오른쪽)를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이후 철저히 배격했다.
야쓰이 조선발굴비사 9회
석암동 무덤 출토품 논란3
“그 무덤은 분명 한나라의 낙랑군 무덤일 거요. 수년 전 만주에서 일로전쟁(러일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을 데리고 비슷한 벽돌무덤을 판 적이 있소. 거울과 동전, 토기 등 파낸 유물들도 거의 같소이다.”

세키노 다다시의 고구려 무덤설을 뒤엎는 도리이 류조의 직설에 발표회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도리이는 거침없이 반론을 이어나갔다. “고구려 도읍터인 압록강변 집안의 무덤들도 살펴봤소. 대부분 사각형 평면에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든 적석총들입디다. 선생이 평양에서 발굴했다는 무덤과는 구조가 다르오. 어떻게 그 무덤이 고구려 것이겠소?”

도리이의 정연한 반론이 계속되자 회의장 여기저기서 고성이 터져나왔다. “당신이 뭘 안다고….” “조선 유적 조사의 최고 권위자에게 감히 무슨 소린가!”

청중은 대부분 세키노의 제자이거나 학문적으로 비슷한 길을 걷는 미술사·건축사 연구자들이었다. 전공자가 아닌 인류학자 도리이가 뜻밖의 근거를 들이대며 고구려설을 정면으로 치받자 분노한 청중은 야유와 항의를 보내며 발언을 가로막으려 했다. 도리이는 말년인 1954년 펴낸 자서전 <어느 노학자의 수기>에서 이에 대한 상세한 회고를 털어놓았다. 그는 출석한 청중들이 “당신의 설을 취소하라” “조선 연구의 지존에게 무례한 태도가 아니냐”고 질책을 퍼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학계 초유의 소란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세키노와 야쓰이 세이이치는 1909년 석암동 갑분에서 2세기께 한나라 계통의 벽돌무덤과 연호문경, 칠기류 같은 주목할 만한 유물들을 찾아내고도 평양은 고구려 도읍이란 선입관에 갇혀 고구려 무덤일 것이란 막연한 결론으로 유적의 성격을 미봉해버렸다. 도리이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단신 배를 타고 만주 전장에 잠입해 한대 무덤과 고구려 도읍 집안을 샅샅이 조사한 그는 고구려 적석총 무덤과 평양의 한나라계 무덤이 구조상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석암동 고분이 평양의 고구려 무덤에 선행하는 낙랑시대 것이라는 견해를 일찌감치 끌어냈던 것이다.

당시 일본 학계는 도리이의 반론을 묵살하는 데 급급했다. 도쿠시마 시골 출신의 도리이는 대학을 나오지 않고 중국, 만주, 대만 등지의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교수가 된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도리이의 반론은 철저히 ‘왕따’를 당하게 된다. 급기야 도쿄제대 쪽이 인류학과 박사학위 논문 심사위원을 도리이의 의견을 무시하고 선정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도리이는 교수직을 내던지고 학교를 나오는 수모까지 겪었다. 이런 일들이 평생 한으로 남았던 듯 도리이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대동강변 일대 무덤이 한족 무덤이라는 게 나중에 확정됨으로써 내 학설은 결국 정치가들(세키노와 추종세력을 지칭한 듯하다)과의 논란 끝에 승리했다. 그러나 나의 반대가 분노를 샀는지 이후 매년 벌어진 대동강변 학술조사에 나는 전혀 동료가 되지 못했다. 세상은 실로 기묘해서 학벌세력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무섭구나….”

도리이는 1910년 논전 이후 학계에서 매장당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반론을 귀담아듣고 좀더 구체적인 논거로 낙랑군설을 실증하려 한 주류 학자도 있었다. 야쓰이의 학문적 맞수인 이마니시 류였다. 그는 도리이의 반론이 내심 의미심장하다고 여기고 자신이 1909년 하기노와 함께 조사한 석암동 을분 출토 유물들을 도쿄대 연구실에서 정밀분석했다. 어느 날 칠기용기 유물의 테두리에서 철침으로 긁은 듯한 ‘王’(왕)이란 글자를 발견한 그는 이 글자를 무덤에 묻힌 사람의 성씨로 추정하게 된다. 이 왕씨가 고구려 문헌사 기록에는 없고, 낙랑군 관련 문헌사 기록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데 주목한 이마니시는 1912년 초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는 <동방학지>에 이 글자의 발견 사실을 소개하면서 낙랑군의 왕씨성을 가진 한인(漢人:중국인)들과 관련된 것일 수 있다는 보고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 간단한 보고가 대동강변 석암동 무덤의 성격논쟁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실제로 1911년 세키노와 야쓰이의 조사에서 낙랑군 남쪽에 있었다는 대방군 태수 장무이의 무덤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됐고 뒤이어 13년 대동강변 토성리에서 한나라계 토성터가 확인되면서 이마니시가 제기한 낙랑군설은 일본 학계에서 정설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세키노도 13년부터 보고서·논문에 슬그머니 낙랑군을 명기하지만, 그의 글이나 이마니시의 논고 어디에도 단초가 된 도리이의 학설은 이후까지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결국 석암동 고분군은 세키노의 고구려설에 맞선 도리이의 반론과 이마니시의 학설 수정, 후속 발굴을 통해 식민사관의 한반도역사 타율성론을 뒷받침하는 낙랑군 한반도설치설의 근거로 굳어지게 되었다. 한반도 최초의 공식적인 근대 발굴조사가 벌어진 평양 석암동 고분은 일본 학계의 치열한 내부 논쟁과 학맥간 암투를 거쳐 낙랑군의 실체로 등장한 셈이었다. 이런 학설상의 반전은 1910~20년대 계속되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유적 조사과정에서, 총독부가 낙랑군설을 뒷받침하는 평양 일대 무덤 발굴에 가장 핵심적인 역량을 쏟아붓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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