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평양 석암동 9호분에서 나온 금제 띠고리 장식. 낙랑계 고분 출토품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석암동 9호분의 대표 유물 중 하나인 동종. 제사 때 술을 따르는 용기다.
석암리 고분에서 확인된 중국계 귀틀무덤(목곽묘)의 내부 모습. 땅을 깊이 파고 목곽을 먼저 놓은 뒤 그 안에 주검이 들어가는 관과 부장품을 넣는 소곽을 짜넣은 얼개다.
1909~1915년 통감부 탁지부와 조선총독부 내무부의 위촉을 받아 세키노 다다시, 야쓰이 세이이치, 구리야마 혣이치 등이 벌인 조선고적조사는 예비조사 성격이었다. 이 조사 성과를 기초자료 삼아 1916년부터 5개년 단위로 총독부의 고적조사가 20년대 중반까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1915년 개관한 총독부 박물관의 수장품을 채우고, 조선사를 타율적인 종속 과정으로 틀지우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오늘날까지도 한·일 학계에서는 당시 예비조사의 주역이 세키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총독부 고적조사의 기본 윤곽과 방향을 요약한 야쓰이 비망록의 내용이 새롭게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고적조사의 방향을 기획한 실제 주역은 야쓰이라는 점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건축사적 맥락을 찾는데 주로 신경을 썼던 세키노와 달리, 야쓰이는 애초부터 일본 진구왕후의 삼한정벌설과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발자취 파악에 조사의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실제 조사과정에서는 평양 석암동 고분의 발굴과 대방태수 장무이 무덤의 발견, 대동강 부근 토성리 낙랑계 토성의 발견 등 예상밖의 성과가 이어지자 흥분한 야쓰이와 세키노는 총독부 조사사업의 방향을 낙랑계 유적의 발굴과 성격 규명 쪽으로 확실히 틀게되었다. 처음부터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도굴하듯 파낸 서북지방의 고분 발굴이 역설적으로 한반도 고대사는 중원 왕조의 영향력 아래 시작될 수 있었다는 왜곡된 식민사관을 정립하는 기틀이 되었던 셈이다.
1916년 조사를 앞두고 야쓰이는 고적조사 5개년 계획의 기획안을 작성한다. 이때 만든 원래 안이 비망록 중 일부로 전해진다. 그 내용은 낙랑 유적의 대규모 조사부터 우선 진행한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세부계획들이 놀랍다. 조사 1년 만에 낙랑군과 대방군 고분 200기, 고구려 고분 100기를 도합 1만5000엔을 들여 발굴하고, 2년째에 신라고분 100기, 임나고분 100기, 백제고분 50기를 조사하며 3년째에 옥저·예맥 등의 고분 100기와 고려고분 300기를 판다는 구상이다. 당시 발굴 수준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될 만큼 허황된 목표였다(실제 진행된 발굴 규모는 목표의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수준에 머물렀다). 야쓰이가 첫해 발굴조사 대상으로 낙랑과 대방고분을 지목했고, 유례없이 대규모의 발굴계획을 잡아놓은 점만 봐도 당시 일본 학계가 중국 왕조의 식민지로서 한사군의 실체를 찾는 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세키노에겐 고조선 유적을 찾는 것이 조사를 시작할 당시 주된 목적 중 하나였으나, 낙랑군설이 부각되자 조사 대상에서 고조선을 완전히 배제하고 야쓰이와 함께 낙랑유적 띄우기에 몰두하게 된다.
1916년 시작된 총독부 고적조사는 평양 석암동 9호분 귀틀무덤을 포함한 10기의 고분을 파는 대발굴 사업으로 막을 올렸다. 예비조사에 이어 세키노와 야쓰이가 주역을 맡은 조사단은 첫 발굴 대상인 석암동 9호분부터 대박을 터뜨렸다. 현재 국보 89호로 지정된 금제동물문 띠고리 장식과 현란한 무늬의 칠기류, 거울, 제사용 술을 바치는 용기인 동정, 장식철검 등 눈이 휘둥그레질 유물들이 쏟아진 것이다. 금제 띠고리 장식은 중국 중원에서 발굴 사례가 없고 전세계에도 서너점밖에 없는 낙랑계 유적 최고의 보물로 유명하다. 호화로운 문양이 수놓아진 칠기는 중국 내륙 깊숙한 쓰촨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활발했던 중원과 주변의 교역 상황을 알려주는 유물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진·한대 고대무덤에 대한 발굴이 본격화되지 않아 칠기와 금제장식 등의 한나라계 고급 유물들이 출현한 유적지는 평양 일대의 고분이 거의 유일했다. 사상 처음 한나라 때의 고급 유물들을 발굴한 일본 학계 연구자들은 국제적인 주목까지 받게되자 기고만장해져서 더욱 왜곡된 관점을 쌓아나가게 된다. 낙랑은 곧 한나라이며 조선 또한 한의 강역이라는 설을 확고한 사실처럼 과대포장해 전파하게 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와 간섭만 받아왔던 한반도 전역을 남부의 고토를 되찾은 일본이 결국 해방시켜줬다는 아전인수식의 논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야쓰이가 1909년 처음 발견했던 평양 일대 2~3세기 벽돌무덤은 발굴이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지만, 주민들이 살림집의 토대로 쓰기 위해 벽돌을 빼가는 일들이 많았다. 이를 의식한 발굴팀은 이후 목곽이 깊이 매장되고 도굴이 어려운 기원전 1세기~기원후 1, 2세기 선대의 귀틀무덤 조사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배경 아래 1916~1917년 수십여기의 평양 일대 중국계 귀틀무덤에 조사가 집중되면서 여지껏 본적 없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중국 한대 유물들이 쏟아졌다. 중원의 변방인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주로 문헌만으로만 알려졌던 한나라 문화의 화려한 실체가 갑자기 등장하자 일본 학자들은 낙랑군이 서북한 일대에 있었다는 가설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신봉하게 된다. 국내 강단 고대사학계에도 공고하게 정착된 ‘낙랑군=평양’ 등식은 이때 성립된 것이다.
야쓰이는 1916~1917년 조사 뒤 평양 일대 발굴에서 물러나 그의 원래 숙원이었던 남부의 신라 백제 임나 유적 발굴로 관심을 돌린다. 그러나 그의 조사를 통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 물증으로 떠오른 낙랑계 유적들의 조사는 이후에도 수십년간 조선 고적조사의 총아로 군림한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발발로 1930년대 말부터 다른 지역 조사는 중단됐는데도 평양 일대 고분과 토성에 대한 발굴 조사는 계속 진행됐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야쓰이 비망록이란?
정인성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입수한 야쓰이의 조선 고적 조사 관련 문서 1만여점의 컬렉션. 1909년 첫 고적 조사 당시 답사일지와 촬영 목록, 각종 메모와 경비 영수증까지 포함돼 일제강점 초기 고적 조사의 세부를 살필 수 있는 일급 사료다.
금제 띠고리 장식을 확대한 사진. 금 알갱이를 이어붙인 누금기법과 정교하게 새김된 용들의 엉킨 형상이 찬탄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