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32) 포로수용소의 이쾌대와 월북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월20일 서울을 떠난 후 5, 6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3수용소에 있습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 그리고 무엇보담도 한 푼 없는 당신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없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오. 나는 이곳 포로수용소에서 나를 두둔해주는 친지들의 덕택으로 잘 있습니다. (…) 이곳 부산은 남방인 관계로 기후도 따듯합니다. 내 걱정 과히 말고 모쪼록 당신 건강에 조심해 주시오. 이곳 나의 희망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건강입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흰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1950년 11월11일 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가 부인(유갑봉)에게 보낸 편지이다. 구구절절 아내 사랑과 가족애로 넘쳐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포로 석방 때, 이쾌대는 서울의 가족 품을 버리고 북행을 선택했다. 분단은 월북작가와 월남작가라는 희귀한 용어를 만들었다. 가장의 월북 이후 남은 가족은 가시밭길의 나날이었다.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사회활동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부인은 홀로 포목점을 하면서, 남편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남편의 분신인 작품 전부를 목숨으로 간직했다.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처 이후 ‘이쾌대 신화’ 창조의 원동력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평양 정권에서 이쾌대가 대우받으면서 작가 활동을 활발하게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평양 발행 미술가 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조선력대미술가편람>(리재현 엮음)의 초판에 이쾌대 항목은 아예 누락되어 있었다. 하지만 1999년 증보 개정판의 서문에 특기할 만한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시기 창작 공로가 있는 문석오, 리쾌대 등 미술가들도 놓치지 말고 소개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는 대목이다. 이런 표현은 금기 작가였던 이쾌대의 정치적 복권을 의미한다. 월북작가라 하여, 혹은 김일성 정권과 거리를 두었다 하여, 남과 북에서 동시에 ‘금기 인물’이었던 화가 이쾌대. 20세기 대표적인 화가임에도, 분단조국은 남과 북에서 역사적 인물을 ‘방기’하는 어둠의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불행한 시대의 불행한 일이었다.
“내 채색들 처분해 아이들 주리지 않게”
1950년 11월 ‘포로’ 이쾌대 ‘마지막 편지’
가족 사랑 절절…‘북쪽’ 선택 미스터리 형 이여성 화가·언론인·학자·정치가
여운형 참모로 활약하다 월북…영향 준듯 남쪽 부인 모든 작품 지켜 ‘88년 해금’
북에서도 숙청…99년 김정일 지시 ‘복권’ “5급 수준 나와 달리 ‘싸움 바둑’ 고수”
피란 시절 거제수용소 관련 사진작업
“하지만 그가 포로인 줄 상상도 못해” 1948년 조선미술문화협회전 함께 출품
“이쾌대만큼 대작 그릴 화가는 없었다”
-부산 피란 시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이쾌대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쾌대가 포로수용소에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런 얘기를 들은 바도 없었다. 한때 나는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사진 현상 작업을 부업으로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는 미군들의 사진 현상 일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포로들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알 수가 없었다. 거제도 포로들은 국제법에 의해 대우를 비교적 잘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은 굶주리고 초라했지만 오히려 포로들은 늠름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이쾌대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만나기도 했듯이,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키는 큰 편은 아니었지만 사실 거인과 같았다. 대구의 대부호집 아들로 친형 이여성과 함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월북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쾌대와의 개인적 일화 가운데 생각나는 것은?
“해방 이후 조선미술문화협회는 이쾌대가 주도한 단체였다. 1948년 11월 제3회전을 동화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전시장에서 개최할 때, 나도 출품했다. <황혼>이란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옆으로 기다란 화폭에 노점의 할머니 행상과 서 있는 말을 그린 풍경이었다. 그때 이쾌대는 <조난>이란 대작을 출품했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었다. 폭격 연습으로 피해 본 독도 어민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그림에 대하여 박고석은 ‘민족의 비애’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했다.
이쾌대는 내 누이동생을 모델로 하여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누이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메이퀸’으로 뽑힐 만큼 미모가 출중했다. 오늘날 그 작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고보니 소설가 이태준도 내 누이를 모델로 하여 쓴 소설이 있다.
1950년 이쾌대의 미술연구소가 남산에 있을 때, 자주 찾아가 어울렸다. 그때 우리는 바둑을 많이 두었다. 바둑 몇 단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이쾌대의 바둑은 실력파 고수였다. 나의 바둑 실력이 겨우 5급 정도여서 그와 맞수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바둑은 ‘싸움 바둑’이었다. 당시 나는 신포석 바둑에 관심이 많았다. 바둑판의 네 구석 중심으로 집짓기를 시작하는 전통 방식보다, 신포석은 바둑판 가운데의 천원(天元)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바둑이었다. 귀퉁이는 돌 2개만 있어도 집 하나를 지을 수 있지만, 중앙은 4개를 놓아야 집 하나를 지을 수 있어 그만큼 불리한 방법이었다.
일본의 이누카이(犬養) 총리대신은 중국의 소년기사 오청원(우칭위안)을 데리고 와 양자처럼 길렀다. 오청원은 신포석을 구사하는 바둑을 두었다. 그는 제일 불리한 것으로 알려진 천원에 먼저 돌을 두었다. 네 모퉁이 중심의 전통 포석보다 새로운 삼연성(三連星) 바둑을 두었다. 아방가르드를 선호하는 나도 삼연성 바둑을 두었다. 균형 맞추는 것이 삼연성 바둑이라 할 수 있다. 이쾌대는 코너 중심의 싸움 바둑을 두었다. 그의 바둑은 중국이나 일본식과 다른 ‘싸움’ 중심이어서 위력적이었다. 일본 바둑은 돌을 놓아둔 채 계가했다. 바둑의 세계는 세상에서 제일 복잡미묘하다. 귀국 이후 나는 일제말 전쟁 시기에 바둑을 열심히 두었다. 시국에 협력할 수 없어 바둑돌로 시름을 달랬다. 당시 ‘외도가 항일운동’이라고 객기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항정신이 어느 정도 깔려 있기도 했다. 친일이냐 아니냐 혹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시국에서 바둑은 모진 세월을 견뎌내게 했다.”
-화가로서의 이쾌대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이쾌대는 대가풍 작가이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정통파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아니, 그의 미술이 본류에 해당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쾌대만큼 서사성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작업을 한 화가가 없다. 이쾌대만큼 대작을 그릴 화가도 없었다. 대부분의 화가는 소품 위주로 작업했는데, 캔버스의 규격만 작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는 이야기도 작은 것이었다.
해방기에 그린 이쾌대의 <군상> 연작을 보면, 참으로 치열하고 수준 높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대단한 작품이다. 인체 표현을 그렇게 실감나게 할 수 있는가. 화면 구성도 그렇지만 뛰어난 걸작이다. 특히 ‘깨진 접시’ 표현 같은 데서 여타의 화가와 다른 기량을 보게 된다. 깨진 접시는 그의 작품 <상황>(1938)에도 나오지만, 표현력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는 동시대의 화가는 없다. 깨진 접시의 표현 기량도 대단하지만, 그것의 상징성 또한 깊다고 보인다. 깨진 접시는 관념이 아니고 현실의 표현이다. 정말 훌륭한 화가라 할 수 있다. 특히 인물화 부문에서는 압도적이다. 사실 사실화는 무궁무진 재미있는 분야이다. 하나하나 다 재미를 넣을 수 있다. 그것도 끝이 없다. 하지만 추상화는 끝이 있을 수 있다. 추상은 관념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쾌대의 친형 이여성은 화가, 언론인, 학자, 정치가 등으로 활동한 유명인사였다. 특히 이여성은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여서 이쾌대는 물론 후진들에게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1935년 이여성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말씀’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현실 조선의 과학적 파악자인 예술가-우리의 예술가는 유한자를 위한 사치품의 제조자가 아니오, 민중의 피와 살을 돋우며, 그 감각과 기분을 살리면서 또 생활과 활동을 향도하고 붙들어 주는 존재가 아니면 아닐지니 조선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여 그 마음의 소리를 밝게 듣는 예술가가 요구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신동아>, 1935년 9월)
-이쾌대의 월북에 이여성의 영향도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이여성은 조선복식사를 쓸 정도였고, 또 역사를 연구하여 역사기록화를 그리기도 했다. 학문과 예술을 아는 보기 드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여성은 여운형과 손을 잡았고 그의 문화부장 격, 즉 참모 노릇을 했다. 그의 사상은 이쾌대에게도 영향을 주어 월북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나는 해방 전 이여성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연 내용에 ‘옥충주자’(玉蟲廚子) 이야기가 있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옥충주자는 일본 사람 주장처럼 일본 제작이 아니고 한반도 작품이라는 주장이었다. 당시 일본인의 주장은, 일본은 옥충이 있으나 한국은 없기 때문에 현재의 ‘옥충주자’는 일본 제작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여성은 한반도의 옥충은 너무 잡아 없어졌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작품의 양식 등을 예로 들면서 백제 미술을 강조했다. 7세기 백제계 작가의 법륭사 건립 당시 옥충주자라 했다. 이여성의 저서 <조선미술사 개요>(평양국립출판사, 1955년)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 줄 안다.”
“사물이나 생활에 있어서 그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같이 중요한 것이나 더욱이 우리 미술가들의 창작 사업에서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선차적인 문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예술적 표현은 그 사회와 현실적 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창작가들은 현실 생활의 각양한 그 사회 현실들을 통하여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창작가의 정신세계를 진감시키는 어떠한 현상 이것이 구체적 대상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본질적인 내용을 옳게 파악하면 할수록 대상에 대한 창작적 의욕이 치열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 정열과 의욕의 약동이 미약하다면 거기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 예술 창작에 있어서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거기 따르는 감동성의 고도한 감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제 현상들에 대한 미추의 감정은 같은 올바른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강약은 있을지언정 공통적이다. 때문에 이러한 감동성을 가진 작품이라야만 인민들의 감정 세계를 울릴 수 있으며 그들의 투쟁 의욕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것이다.”(이쾌대, ‘심금을 울리는 작품’, <조선미술>, 1958년 5월)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53년 8월 남북 포로 교환 때 북으로 간 이쾌대는 남쪽 미술사에서 지워졌으나 민주화로 해금된 뒤 1991년 신세계미술관 ‘월북작가 이쾌대전’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5년 8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해방 70돌 기념으로 덕수궁에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대규모 전시회까지 열어 근대미술사의 주역으로 위상을 되찾게 됐다.
1932년 이쾌대와 결혼한 부인 유갑봉은 ‘월북작가’ 가족이란 이유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남편의 모든 작품을 지켜냈으나 ‘해금’을 보지 못한 채 80년 별세했다. 앞줄 왼쪽부터 유갑봉, 이쾌대, 어머니 윤정열. 뒷줄 왼쪽부터 형수 박인애(성악가), 이여성, 아버지 이경옥씨. 막내 아들(한우)이 빠져 있어 50년 이전 가족 사진으로 보인다.
1950년 11월 ‘포로’ 이쾌대 ‘마지막 편지’
가족 사랑 절절…‘북쪽’ 선택 미스터리 형 이여성 화가·언론인·학자·정치가
여운형 참모로 활약하다 월북…영향 준듯 남쪽 부인 모든 작품 지켜 ‘88년 해금’
북에서도 숙청…99년 김정일 지시 ‘복권’ “5급 수준 나와 달리 ‘싸움 바둑’ 고수”
피란 시절 거제수용소 관련 사진작업
“하지만 그가 포로인 줄 상상도 못해” 1948년 조선미술문화협회전 함께 출품
“이쾌대만큼 대작 그릴 화가는 없었다”
이쾌대(앞줄 오른쪽부터 다섯번째)는 해방공간 서울 돈암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김진항·김창열·권진규 등 수십명의 제자를 키웠다. 50년에는 이해성과 함께 남산시립미술연구소로 재개관했다. 김병기는 남산 시절 즐겨 두었던 이쾌대 특유의 ‘싸움 바둑’을 기억한다. 사진은 47년 9월 연구소 개관 기념 때 찍은 것으로 제자 김서봉이 공개했다.
김병기는 해방공간에서 자주 교유했던 이쾌대의 작품들 가운데 <상황>과 <조난>을 가장 걸작으로 꼽는다.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8년 <무희의 휴식>에 이어 그린 <상황>은 다양한 인물의 극적인 표정과 자세 그리고 ‘깨진 그릇’까지 탁월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1946년 북한 전역을 돌아본 이쾌대는 48년부터 조선미술문화협회를 통해 <군상1-해방고지>. <창공>, <조난> 등 2m 폭이 넘는 대작을 발표했다. 특히 해방의 혼란을 딛고 일어서는 민중의 결연한 의지를 묘사한 4부작 <군상> 시리즈는 뛰어난 인체 묘사력과 완벽한 구성으로 이쾌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쾌대의 형 이여성(이명건)은 일찍이 독립운동에 나선 진보적 지식인으로, 해방공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 48년 월북했으나 50년대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8월16일 해방 기념 연설회장인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이상백, 여운형 위원장, 이여성의 모습. 사진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제공
김병기는 해방 전 이여성의 강연회에서 ‘백제 옥충주자’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7세기 백제계 작품으로 알려진 일본 호류사(법륭사)의 옥충주자.
이쾌대는 형과 더불어 북한에서도 행적이 사라졌다가 1999년 김정일의 지시로 복권된 뒤에야 북한미술사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1965년 병사설이 유력하지만 일부에서는 87년 사망설도 나온다. 사진은 1957년 모스크바 ‘제6회 세계청년축제’에 출품한 <3.1운동>으로, ‘군상’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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