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34) 미술단체의 분열과 국전 분규
1950년 2월 대한미술협회가 유명무실 상태였던 조선미술가협회의 후신으로 재결성됐다. 회장에 고희동, 부회장에 이종우·장발을 선출하고,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산하 단체로 들어갔다. 대한미술협회가 재결성된 배경은 바로 직전 김병기가 주도한 50년미술협회의 결성과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인의 조직화 작업에서 밀린 고희동 등이 미술권력의 쟁취를 위해 협회를 급조했기 때문이다. 고희동은 1915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이래 ‘서양화가의 효시’라는 선구자 호칭으로 평생 ‘화단의 어른’으로 대우받았다. 하지만 그는 귀국 직후 유화 붓을 버리고 다시 전통회화의 모필을 들었으나 그나마도 창작 활동은 저조했다. 대신 화단정치의 대명사로 군림했다. 특히 해방 이후 그는 문화계의 대표 인물로 부상했다. 문단에도 박종화 같은 소설가가 있었으나 위력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50년미술협회를 의식해서 고희동 등이 대한미술협회를 급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인가?
“한 달 사이의 두 단체 구성이어서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50년미술협회 조직에 앞장섰던 나 자신은, 대한미술협회 조직에 대해 의식한 기억이 없다. 유영국의 회고를 보면, ‘50년미술협회와 서울대 교수직 가운데 택일하라’는 장발의 압력에 교수직을 사퇴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유영국은 장발을 두고, ‘좌익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정말 장발은 똑똑한 사람만 보면 좌익이라고 보는 편견이 없지 않았다. 평안도 출신이라고 김창열을 복교시키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졸업장이 없는 그를 훗날 서울예고 교사로 채용하느라 내가 애를 먹기도 했다. 사실 50년미술협회는 우익 미술가가 좌익 미술가를 포용하기 위한 화합 의지가 강했다. 고희동은 내가 ‘김찬영의 아들’이라고 늘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친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종화의 집에는 초대받아 푸짐한 음식 대접을 받은 적도 있다.”
1954년 3월 대한미술협회는 휴전 이후 첫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그때 위원장에 고희동, 부위원장에 이종우와 도상봉을 선출했다. 하지만 6·25 발발 직후 도미했다가 그 무렵 귀국한 장발 부위원장을 배제했다 하여 반목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듬해 55년 5월 숙명여중에서 열린 대한미술협회 총회에서, 고희동에 맞서 장발이 위원장 후보로 나섰다. 장발 중심의 반고희동파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희동 쪽인 윤효중·도상봉의 이른바 홍대파와 서울대파인 장발의 대결 구도였다. 개표 결과 과반수에서 한 표가 부족한 채 고희동 우세로 나타났다. 하지만 과반수 부족임에도 재투표를 하지 않았다. 윤효중은 그날 밤 기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고희동 당선’을 발표해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장발파의 반발로 결국 고희동은 자진사퇴하면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고, 도상봉이 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 이때 대한미협의 임원은 이종우·김인승·이마동·김환기·윤효중·이응노 그리고 사무국장에 이봉상이었다. 위원은 노수현·배렴·장우성·박득순·박상옥·김병기·장욱진·김경승·이순석 등이었다. 그런데 도상봉·윤효중 체제의 대한미협은 반대파의 회원 12명을 ‘불순분자’라 하여 제명 처분했다. 그 제명당한 회원은 장발·배렴·김종영·박득순·김병기·노수현·권옥연·장우성·이순석·이규상·이세득·서세옥 등이었다. 결국 화단 분열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작년(1955) 5월 대한미협 정기총회가 개최되었을 무렵 현 대한미협 측에서는 전기 도(상봉)씨를 위원장으로 추대키로 하고 이의 공작을 윤(효중)씨가 전담하다시피 하였다는데 한국미협(그때는 한 단체였다) 측에서는 현 서울대학 조교수(대우)인 김병기씨 등이 동 대학 학장인 장(발)씨를 위원장으로 추대키로 하여 쌍방의 득표공작이 치열하였던바 이때의 결과는 장씨가 다수표를 얻어(당시 장씨 불출석)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때 윤씨의 맹렬한 반대공작으로 사태는 발전되어 재투표를 주장하여 도씨를 위원장으로 당선시키었다고 한다. 이러한 윤씨의 비밀공작에 격분한 김씨파(소위 서울대학파) 및 탈퇴한 서예 부문 인사들은 동월 21일 대한미협에 대한 ‘결별 성명’을 발표하고 따로 미술단체를 구성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서울대파인 한국미술가협회였다. 이런 일이 있자 이때부터 홍대파라고 일컬어진 대한미협 측에서는 즉시 그들을 반역분자라고 비난하고 제명 처분으로 응수하였다.”(<동아일보> 1956년 10월7일치)
한국미술가협회는 1955년 5월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협회의 ‘선언’은 진취적인 이념으로써 민족문화의 발전 향상, 순수한 제작 태도와 발표 기구의 확립, 새로운 세대의 진출 적극 지원, 국제 미술 문화의 제휴 도모 등이었다. 임원 선출에서 대표위원은 장발·김종영·임응식·장우성·이순석·손재형·이희태 등이었고, 위원은 서세옥·배렴·장운상·노수현·문학진·장욱진·이세득·김병기·이규상·김세중·한홍택·김정환·이순석·배길기·김충현·손재형·임응식 등이었다.
당시 김병기는 ‘새로운 구성 모색’이라는 신문 기고문에서, “역사가 증명하듯이 미술단체의 분립이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특히 근대미술의 다단한 성격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국미협을 옹호했다.(<동아일보> 1955년 7월30일치)
1950년 2월 대한미술협회 ‘급조’
김병기 주도 ‘50년미술협회’ 견제
장발 부회장, 유영국 불러 ‘압력’
“50년협회-서울대 교수 택일하라”
54년 대한미협 고희동 위원장 재선
미국에서 돌아온 장발 배제해 ‘불씨’
55년 총회 ‘과반수 한표 미달’ 파동
김병기 앞장 ‘한국미술가협회’ 결성
홍대파 ‘도상봉-윤효중 체제’ 주도
서울대파 12명 ‘불순분자’ 제명
김병기 “분립은 자연스러운 현상”
56년 국전 심사위원 선정 때 ‘격돌’
대한미협 ‘국전 출품 거부 선언’에
국회 진상조사단 나서 ‘수습’했으나
변관식, 반대파 노수현에게 대접 던져
-한국미술가협회 창립은 어떻게 진행됐는가?
“대한미술협회는 고희동 때 만든 것인데, 윤효중과 도상봉이 쥐고 있었다. 그들의 전횡을 두고 볼 수 없어 회장으로 장발 학장 추대를 도모하게 되었다. 월전 장우성과 내가 득표 운동을 하면서 선거를 했는데, 장 학장의 표가 제일 많이 나왔다. 어떤 기록에는 이런 사실과 달리 나와 있다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또 고희동과 장발의 대결 관련 기록도 있으나 잘 모르겠다. 위원장 선거는 도상봉과 장발의 대결이었고, 분명한 것은 장발의 득표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윤효중의 공작으로 장발 위원장 옹립은 불발되었다. 윤효중은 ‘이승만 동상’을 만들면서 경무대의 후광으로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렇다고 장발의 위세도 작지 않았다. 굳이 야당의 거물급 정치인 장면 박사가 친형이라 하여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장발 학장은 일찍 도쿄 유학과 미국 컬럼비아대학 출신으로 지성적 풍모의 미술가였다. 윤효중 측에서 현역 작가가 아니라고 장발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장발은 미술교육자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결국 대한미협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 한국미술가협회를 조직하면서 우리는 소외되었던 서예·사진·건축 분야를 포함시켰다. 미술이 아니라고 배척당하고 있던 서예 분야의 미술단체 입성은 획기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대 명필 손재형과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컬렉션을 포장하던 오동나무 상자의 표제 글씨를 자주 썼던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 무렵 김영주는 한 잡지에 ‘미술인의 양식에 호소함’이란 글로 화단의 분열을 비판하고 있다.
“주의주장이 다르지 않고 가치평가에의 기준이 다르지 않은 집단행동은 아무리 예술의 자유를 내건들 미술문화건설을 위해서는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작품경향에 있어서 범주의 차위(差違)를 발견할 수도 없다면, 하나의 세력권으로 단정받아도 변명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만약에 대한미협이 기왕의 구성 요인을 그 유일한 개념으로 삼고 그룹 형성이나 이질의 의견을 참작하지 않았다면, 그 분열의 온상을 마련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반공을 위한 집결의 이유와 작품행동을 위한 이념의 집결은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작품행동을 위한 주의주장은 종합적인 회원의 질의 집결에서는 자연히 싹틀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대한미협이란 집단행동에서 작품행동을 위한 이념의 분립 과정으로서의 한국미협이란 집단행동을 그룹 형성으로는 간주할 수 없을진대, 오늘의 결과에 나타난 분열의 책임은 그릇된 이념설정을 꾀한 한국미협에 있음을 알 수 있다.”(<신미술> 1956년 11월)
미술단체의 양분은 ‘국전’이란 먹이다툼에서 본격화되었다. 1956년 9월 제5회 국전을 앞두고 정부는 심사위원 구성을 예술원 미술분과에 의뢰했다. 심사위원 명단을 본 대한미협은 이의제기를 했다. 회원 수와 비례하여 한국미협 소속 심사위원이 많고,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장발 같은 이가 포함됐다고 항의한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 명단은 동양화부에 노수현·장우성·배렴(한국미협 측)과 이상범·고희동·허백련·김은호(대한미협 측), 서양화부에 장발·박득순·장욱진(한국미협 측)과 이종우·이병규·도상봉·이마동(대한미협 측)이었다.
대한미협은 해촉 대상 심사위원으로 배렴·장우성·장발·장욱진·손재형을 지목했다. 대한미협의 도상봉 위원장과 윤효중 부위원장은 최규남 문교부 장관을 방문하여 그들의 뜻을 전했다. 이들의 요구는 다수파의 의견을 무시한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 조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교부는 민족예술의 발전을 위해 합심해야 할 처지에서 분파적 문제는 유감이라면서 대한미협의 요청을 무시했다. 이에 대한미협은 ‘국전 거부’를 선언했다. 장발과 윤효중의 치열한 싸움은 한층 가열됐다. 결국 국회에서 ‘국전분규진상조사단’까지 구성됐다. 언론보도는 대한미협의 국전 출품 거부는 미술계의 치욕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대한미협 소속 박고석조차도 ‘대한미협의 처사는 온당치 않다’고 비판했다. 결국 정부는 국전 개최의 무기한 연기를 발표했다.
장발과 윤효중의 반목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윤효중은 장발을 두고 ‘작품 하나 내지 않는 사이비 작가’라고 비판했고, 장발은 윤효중을 두고 ‘동상 건립만 일삼는 청부업자’라고 공격했다. 이른바 서울대파와 홍대파의 싸움이었다. 대한미협의 도상봉은 문총 산하의 유일한 미술단체는 대한미협이며, 반공노선으로 뭉친 단체 이외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반하여 한국미협의 장발은 민주국가에서는 이념이 다른 단체는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응수했다. 그런 와중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대한미협을 비판했다. 10월 하순 문교부는 사태를 수습하고 경복궁미술관에서 국전을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애초의 심사위원에 몇 명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심사 도중에 이른바 ‘냉면 그릇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점심식사 자리에서 소정 변관식이 심산 노수현을 향하여 냉면 그릇을 던져 상처를 입힌 것이다. ‘국전’ 세력인 노수현·배렴·이상범 등에 대한 변관식의 분노였다.
-화단 분열과 국전 분규 등 얼룩진 50년대 후반의 미술계였다. 어떤 감회가 드는가?
“사실 민주국가에서 모든 예술가가 참여하는 획일화된 예술단체를 조직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다양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민주사회에서 그런 조직이 왜 필요한가. 다만 우리는 북한의 예술단체와 대응하기 위해 시대적 요청에 따라 조직을 했다고 본다. 전쟁 이후의 혼란기에서 예술가의 사회적 위상이 자리잡을 때, 과도기의 현상으로 미술단체가 나왔고, 의견 불일치로 분열되기도 했으나, 그 역시 민주사회에서 커다란 허물은 아니라고 보았다. 전후 미술가의 활동 무대가 없었을 때, 국전의 위력은 대단했다. 국전 때문에 단체의 반목이 더 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55년 국전 이후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아방가르드 미술을 선호했던 나로서는 보수적 아카데미즘의 온상인 국전과 잘 맞지 않았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한국전쟁 직후 화단은 ‘국전’이라는 제한된 활동 무대를 놓고, ‘고희동-홍대파’와 ‘장발-서울대파’가 대립하면서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로 분열된다. 사진은 1953년 12월25일 ‘제2회 국전’ 개막 기념으로 대통령 이승만(앞줄 가운데)과 당대 화단의 대표인물들이 함께했다. 둘째 줄 왼쪽 둘째부터 이종우·이시영 부통령·손재형·장발·고희동·이봉상, 셋째 줄 왼쪽부터 노수현·김종영·장우성, 셋째 줄 맨 오른쪽 김환기, 한 사람 건너 박종화, 맨 뒷줄 배길기, 한 사람 건너 배렴·이마동·윤효중 등이다.
1955년 5월 대한미술협회 총회에서 윤효중과 더불어 ‘재투표 파동’을 주도해 위원장을 맡은 도상봉. 고희동에게 유화를 배운 그는 백자 항아리가 있는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사진은 임응식 작가 작품이다.
1955년 서울대 미대 부교수로 재직한 김병기는 장발 학장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한국미술가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그해 7월30일치 <동아일보>에 한국미협 대표로 기고한 ‘새로운 구성 모색’.
1955년 7월30일치 <동아일보>에 김병기의 글과 나란히 실린 대한미술협회 사무국장 이봉상의 기고문 ‘집단행동과 미협’.
홍익대 교수 윤효중은 1955년 이승만 80회 탄신 경축 동상 조각가로 뽑히면서 대한미협의 실세로 서울대파에 맞섰다.
윤효중이 제작한 이승만 동상의 제막식이1956년 8월15일 남산에서 열렸다. 국가기록원 사진.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간 뒤 8월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철거당했다.
1955년 6월15일 남한산성 서장대에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청동 봉황새를 조각해 세운 ‘이승만 박사 송수탑’도 윤효중의 작품이었다. 경기도지사 이익흥이 이승만의 팔순을 기념해 기획한 것으로 개막 행사 때 함태영(오른쪽) 부통령이 참석했다.
한국미술가협회는 1955년 창립 전시회가 대한미협의 반대로 무산된 뒤 56년 9월21일 휘문고 강당에서 ‘제1회 대한미협전’을 열었다. 입선작인 권영우의 동양화 <모델>(사진)과 응용미술 특선작 김교만의 <성모>가 <경향신문>에 실렸다.
1955년 6월10일 경복궁 국립미술관에서 대한미술협회 창립 10돌 겸 이승만 대통령 팔순 기념 제7회 전시회가 개막했다. 고희동(맨 왼쪽) 위원장의 안내로 이승만(오른쪽)이 팔순 축하 작품들을 둘러 보고 있다.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
1940년 5월 28~31일 조선미술관 창립 10돌 기념으로 열린 ‘십명화가 산수풍경화전’에 선정된 당대 최고 미술작가들.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박승무 이한복 이상범 최우석 노수현 변관식 이용우의 사진과 약력이 <동아일보>(1940년 5월27일치)에 실렸다. 1955년 10월 국전 심사 중 갈등으로 ‘냉면 놋대접’을 던진 심선 변관식과 거기에 맞아 머리가 터진 심선 노수현은 동연사 동인이었지만 ‘앙숙’ 사이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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