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가시나무 창작소(옛 피터슨 목사의 사택) 1층에 위치한 주방. 1980년 5월20일 피터슨 목사는 이곳에서 공수부대원을 피해 숨어든 광주시민들을 숨겨줬다. 호랑가시나무 창작소 제공
아널드 A. 피터슨 목사. 그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사택에서 계엄군이 헬기에서 기총소사(機銃掃射) 하는 장면을 봤다. 역사의 목격자였던 이 공간은 2013년 광주시민을 위한 문화창작소로 재탄생했다. 과거와 현재의 유의미한 공존이 있는 그곳이 3월5일 창립 5주년을 맞는다.
광주 남구 양림동. 100여년 전 미국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과 함께 광주에 서양의 근대 문물이 처음 들어온 곳이다. 광주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간에서 지금도 과거가 현재와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수령이 400년 넘은 광주시기념물 제17호 호랑가시나무 옆에는 1950년에 적색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다. 1층은 거실과 다용도실, 2층은 침실과 발코니, 지하실은 창고로 구성돼 있다. 이곳은 1975년부터 6년 동안 아널드 A. 피터슨 목사가 머물렀던 집이다. 그가 살기 전엔 1963년 미국에서 선교 목적으로 광주를 찾아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을 설립한 유수만 선교사의 보금자리였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양림동의 문화 실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의 기총소사 여부는 광주 학살의 진상을 규명할 중요 사안이었다. 고 피터슨 목사는 5·18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기총소사를 했다”는 사실을 증언한 인물이다. 그는 1973년 미국 남침례회의 선교사로 자원해 2년간 한국어를 공부한 뒤 1975년부터 1981년까지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며 ‘80년 광주’를 겪었다. 그는 다른 지역이나 미국으로 떠나지 않고 광주에 끝까지 남아 현장을 기록했으며, 바로 이 선교사 사택 2층 발코니에서 ‘헬기가 시민을 상대로 폭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역사학 교수이기도 했던 그는 1995년에 당시의 경험을 역사학자의 시선에서 정리한 회고록 <5·18 광주사태>(The Kwangju Incident)에서 광주 시민학살 현장과 헬기사격 장면을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1980년) 5월21일 오후 3시15분쯤에는 광주 상공에 몇 대의 전투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병원에 접수된 첫 사망자는 오후 3시 반쯤 들어온 중학교 여학생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2층 발코니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10일간 발생한 모든 사건 중에서 군중을 향해 군인들이 헬리콥터에서 발포하는 모습이 가장 잔인해 보였다.”(<5·18 광주사태> 중)
광주의 문화촌으로 유명한 양림동
100년 전 서양 문물 처음 들어와
옛것과 새것이 시대를 넘어 공존
작곡가 정율성·시인 김현승 등 배출
피터슨 목사가 5·18 참상 목격한 집
2013년 청년예술가 지원공간 변신
창립 5주년 맞아 영호남 작가 모여
광주 정신 기리는 협업 전시 예정
정헌기(47) 아트주 대표는 2005년 광주 양림동을 산책하다 우연히 이 사택을 봤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동화 속 앨리스처럼 홀로 다른 차원에 있는 건물 같았다. 많이 낙후돼 있어서 낮에도 사람들이 사택에 가까이 오기 꺼렸을 정도였다. 늘 건물이 비어 있다 보니 노숙인들이 몰래 이용하기도 하고 마치 흉가와 같았다.”
정 대표는
2013년 3월5일 이곳을
호남신학대학교(애초 이 대학이 선교사 사택으로 조성한 건물)로부터 10년간 임차해 작가 상주형 예술창작공간인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를 조성했다. 공간 명칭은 사택 곁에 있는 광주시 기념물 17호 ‘호랑가시나무’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지자체·문화단체 등의 도움 없이 사비를 들였다. 피터슨 선교사의 헌신을 예술가들의 문화 창작 활동으로 이어가는 동시에 광주 시민에게 새로운 문화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 의미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특히 이 사택이 위치한 양림동은 근대 문물을 상대적으로 일찍 접한 덕에 그간 예술가가 많이 나왔다”며 그 문화적 흐름을 이어가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중국의 ‘국민 음악가’ 정율성(1914~1976), ‘검은 머리의 차이콥스키’로 평가받는 정추(1923~2013)가 양림동에서 자랐다. 시인 김현승(1913~1975)이 유년기를 보내고 소설가 황석영이 대하소설 <장길산>을 집필하기도 했다.
정헌기 아트주 대표는 2013년 3월5일 피터슨 목사의 사택을 문화창작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그는 “광주 시민을 위해 헌신했던 피터슨 목사의 뜻을 이어 시민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포그니 기자
적벽돌로 지어진 건물 외관을 그대로 살린 이 선교사 사택은 청년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과거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차고는 전시실로 재탄생했다. 최소한의 유지비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 공간을 게스트하우스로 내놨다. 그동안 윤남웅(서양화), 천영록(한지공예), 윤태식(뮤지컬 감독), 프로젝트 그룹 모치타(패션) 등 국내외 예술가 36명이 입주해 창작 활동을 펼쳐왔다. 그 결과 이 창작소는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주관으로 열린 전국 워크숍에서 지역문화예술 특성화 지원사업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창작소가 알려지면서 기억에 남을 사람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방문했을 때를 정 대표는 떠올렸다. 그는 “(문 대통령이) 과거 선교사들의 봉사정신이 깃든 곳이라 이곳을 숙소로 택했다고 했다”며 “‘호남홀대론’이 일어 광주 민심이 바닥이었을 때여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던 다른 손님들조차 그를 냉대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차분히 보좌관들과 주변인을 배려하고 구석의 가장 불편한 의자에 앉아 문서를 검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피터슨 목사가 아마도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피터슨 목사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광주 시민들에게 사택의 대부분을 내주고 가장 작은 방에서 지냈다. 당시 미국 공군기지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한국 공군이 공격의 일환으로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세웠다”며 “당장 광주를 떠날 것”을 권유받았지만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았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광주 시내의 상황을 촬영하는 한편 공수부대원의 폭격을 피해 숨을 곳을 찾는 광주 시민을 위해 사택의 문을 활짝 열었다. 당시 피터슨 목사의 제자이자 신학대학생이었던 박상태(57) 목사는 “피터슨 목사는 굶주린 광주 시민을 위해 빵을 직접 굽기도 했다”고 말했다.
피터슨 목사 사택의 지하실은 현재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예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포그니 기자
‘그밤’ 선교사 사택으로 모여든 시민들
피터슨 목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1980년 5월20일 저녁 광주 시민 5명이 사다리를 타고 2층 발코니로 들어오더니 “대학교에 진학하는 자녀들을 사택에서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에서 붙잡은 학생 3분의 1을 무차별 살상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던 때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사택은 공수부대원으로부터 피신해온 광주 시민 13명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같은 주택 단지에 있던 다른 선교사 가정으로 보내야만 했다. 선교사 사택단지 내의 숲에 숨어 지내는 사람도 수십명이나 됐다.
5월27일 새벽 3시30분께 공수부대원들이 광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택이 위치해 있던 언덕도 이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피터슨 목사도 자동소총 소리에 놀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에 앉아 있을 때 포탄 소리는 훨씬 가까이 들렸다. “그날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들이 도시에 들어서면 선교사 사택 단지가 그들의 목표물이 될 거다. 이곳은 숲이 우거진 언덕에 위치해, 저항하는 사람들이 숨기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훗날 잘못됐을 경우 아내에게 보여줄 마지막 편지를 적어 침실 장롱의 미닫이문 뒤에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5·18 광주사태> 중) 당시 피터슨 목사의 공포가 깃든 지하실은 현재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예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3월5일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는 창립 5주년을 맞는다. 이날을 기념해 창작소는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 영호남 청년작가 15명이 모여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는 협업 작품을 전시한다. 광주항쟁 이후 정치가 쪼갠 지역 간 갈등을 치유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정 대표는 “피터슨 목사가 광주 시민이 위태로울 때 기꺼이 보호하고 당시 참상을 목격해 기록을 남겼던 헌신을 본받아, 앞으로 이 공간에서 지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사회문화적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터슨 목사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사역지를 대전으로 옮겨 1990년 선교사 생활을 은퇴하고 영구 귀국할 때까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교회 역사를 강의했다. 1995년 회고록 출간에 맞춰 방한한 것 외에는 2015년 타계할 때까지 다시 한국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의 유가족들이 28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5·18기념재단이 오는 5월 주최하는 광주항쟁 관련 행사에 부인 바버라 피터슨 여사와 아들 브렌트 피터슨이 참석할 예정이다. 바버라 피터슨 여사는 지난해 8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피터슨 목사)은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도 계속해서 ‘아이들을 구해야 해’라고 외쳤다”며 “(병을) 앓으면서도 (광주를) 계속 잊지 못했다”고 말했다.
광주/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피터슨 사택 정원에 설치된 철제 작품 <김현승 벤치>(정헌기·2015년 작). 고 김현승 시인은 목사의 아들로 생전에 양림동 선교사 단지에서 양림산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호랑가시나무 창작소의 1층에 위치한 거실. 2016년 총선 때 문재인 대통령(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이 왼편 구석에 놓인 작은 의자에서 서류를 검토했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연세대 설립자로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 원요한 신부(1922~1994)가 연주했던 오르간. 현재 피터슨 사택에 남아 있다. 김포그니 기자
1950년에 적색 벽돌을 사용해 서양식으로 지어졌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1950년대 만들어진 차고. 당시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이 공간은 2013년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실로 변신했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2009년 정헌기 대표는 피터슨 선교사 사택 정원에서 ‘동물 없는 예술동물원’이라는 주제로 ‘아트주’(artzoo) 전시를 진행했다. 그는 “이 사택을 문화공간으로 설립하기 전 시도했던 일종의 문화적 실험이었다”고 말했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피터슨 사택 전경. 피터슨 목사는 “1980년 5월 이 사택의 2층 발코니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헬기로 시민을 폭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광주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선교사 단지에는 과거 선교사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서서평은 독일 출신 선교사로 1912년 광주 양림동에서 고아들을 돌보며 ‘어머니’라 불렸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피터슨 사택 정원에 설치된 철제 작품 <김현승 벤치>(정헌기·2015년 작). 고 김현승 시인은 목사의 아들로 생전에 양림동 선교사 단지에서 양림산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김포그니 기자
1980년대 피터슨 선교사 등 미국 선교사들이 이용했던 차고는 현재 문화 전시실로 재탄생됐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
1980년 5월27일 피터슨 목사는 선교사 주택 단지가 군인들의 목표물이 될 것을 예상하고 유서를 적어 이 방에 있는 장롱 미닫이문 뒤에 붙여 놓았다. 김포그니 기자
1980년 5월20일 피터슨 목사의 사택은 공수부대원으로부터 피신해온 광주 시민 13명으로 가득 찼다. 근처 숲이 우거진 곳에 숨어 지내는 사람도 수십명이나 됐다. 호랑가시나무창작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