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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고름이 살 되랴’, 지금은 아프지만 환부를 도려낼 때

등록 2018-03-31 09:07수정 2018-03-31 09:54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등단 50주년’ 소설가 윤흥길
“성경을 보면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 같아요.” 등단 50년을 맞은 윤흥길 소설가가 21일 오후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집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있다. 계단 옆엔 손주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성경을 보면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 같아요.” 등단 50년을 맞은 윤흥길 소설가가 21일 오후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집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있다. 계단 옆엔 손주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배춧국이 먹고 싶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본 탓일 게다. 도시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고향의 사계 속에서 친구들과 음식을 해먹으며 삶의 온기를 되찾는다는 얘기가 훈훈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난 뒤에도, 귓가에 온종일 맴도는 노래 한 구절처럼 된장 푼 배춧국의 잔상이 자꾸 떠올랐다. 텅 빈 시골집에 돌아와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이 끓여 먹는 첫 끼의 메인 메뉴. 눈 덮인 텃밭에서 언 배추를 조심스레 캐내서 성한 잎사귀를 골라 된장과 파 한 뿌리로 담백하게 끓여낸 배춧국 한 사발이 먹음직스러웠다. 어려운 요리가 아니니 언제라도 해먹을 수 있었지만 마트에서 산 배추로는 왠지 그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과 얼음을 툭툭 털고 땅에서 갓 뽑아낸 배춧잎이라야 채워질 수 있는 삶의 허기 같은 게 있다. 나를 배고프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배춧국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단조롭고 질박해도 좋으니 유효기간이나 성분표시 같은 거 따져보지 않고 생긴 모습 그대로, 하는 말 그대로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 것 같은 사람. 말과 글과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요즘 들어 대중의 신망과 존경을 받던 인물들이 안겨준 충격과 배신감의 반작용일까. 인터뷰이를 섭외할 때 성폭력 추문은 없는지, 평소 언행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어떤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불가피하고 정당한 스크리닝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전북 완주로 내려가던 날 신기하게도 눈이 내렸다. 며칠간 봄기운이 완연하더니 거짓말처럼 하얀 폭설이 대지를 덮었다. 눈 덮인 텃밭의 배춧잎을 구하러 나온 여정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서울에서 차로 세 시간여를 달려간 곳. 소설가 윤흥길(76)이 그곳에 산다. 도시가 멀지 않은데도 삼면이 서방산, 원등산, 만덕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오지처럼 고즈넉했다. 도착할 때쯤 비로 변한 날씨 탓에 우산을 쓰고 마중 나온 노작가의 모습 때문일까, 별로 짖지도 않는 순둥이 개 ‘마루’ 때문일까. 낯선 마을에 원로작가를 만나러 왔다는 긴장감보다 오랜만에 외갓집에 들른 것 같은 편안함과 반가움이 앞섰다.

윤흥길 작가는 올해로 등단 50주년이 된다. 1968년 한국일보 현상공모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전쟁으로 인한 혈육 간 적대와 화해를 그린 <장마>(1973), 변두리로 떠밀린 도시빈민의 삶을 다룬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 권력의 횡포를 해학과 풍자로 담아낸 <완장>(1983), 분단의 상처가 어떻게 용서되고 치유되는지 보여준 <낫>(1995) 등을 펴냈다. 그는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현역작가이다. 요즘도 5권 분량의 대하소설 <문신>을 쓰느라 밤을 새우고 아침에 잠이 드는 올빼미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만난 건, 오후 3시. 아침에 잠이 든 그가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고라니가 자고 가고 벌레와 나눠먹는 삶

그의 서재는 정갈하고 깔끔했다. 초기 작품을 쓸 때 사용하던 구식 타자기부터 워드프로세서, 구형 노트북 컴퓨터 등이 나란히 놓여 있고, 장식장 안에는 그가 쓰던 만년필이며 필기도구들이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서재엔 책상이 두 개가 있는데, 벽면에 붙여진 집필용 책상 위엔 컴퓨터와 함께 두께가 한 뼘이 넘는 두툼한 국어대사전이 있다. 오랫동안 사용한 듯 표지의 금박 제목은 닳아서 흐릿해졌고, 사전의 옆면은 손때 자국으로 얼룩졌다. 또 하나의 작은 책상은 성경을 읽는 곳이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역대상 4장 10절) 하는 성경 대목은, 올해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가정에 주신 말씀’이다. 윤흥길은 수시로 이 대목을 읽고 또 읽는다고 했다.

―한쪽엔 국어대사전, 한쪽엔 성경이군요.(웃음) 이렇게 깔끔한 서재는 처음 봅니다.

“이사 온 지 4년밖에 안 됐으니까요. 제가 평생 처음으로 마련한 서재예요. 마누라가 집 지으면 남편 서재 만들어준다고 벼르고 별러서 장만한 거라서.”

―그럼 그동안은 서재 없이 어디서 작업하셨어요?

“단칸방 살 때는 애들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에 작업했어요. 그때 든 집필습관이 지금까지 바뀌질 않아요. 완전 야행성이죠.(웃음) 단칸방을 면한 후에는 거실에 책상 놓고 작업했어요. 여기가 평생 처음 갖는 내 전용공간이죠.”

―여기 이사 온 게 4년 전이라면, 2014년인가요? 촌에 와서 살아보니 어떠세요?

“박경리 선생이 집요하게 말씀하신 게 ‘작가는 땅을 밟고 풀잎을 만지면서 살아야 한다. 생명을 부단히 접촉하고 살아야 좋은 작품 쓴다’는 거였어요. ‘예, 알았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하곤 실행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는데, 살아보니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여기 와서 별별 새들을 다 봐요. 사람이 문 열고 나가도 도망치지 않고 까딱까딱하면서 날 유심히 바라봐요. 아침에 깨보면 데크 위에 작은 딱새가 떨어져 죽어 있기도 해요. 유리창에 비친 풍경을 실경으로 착각해서 날아와 부딪친 거죠. 우체통 안에 새가 둥지를 만들어놓고 가기도 하고요. 텃밭에 농약을 안 치니까 온갖 벌레들, 달팽이들 노상 접하는데 일일이 손으로 잡아내다가 ‘에잇, 그냥 차라리 나눠 먹자’고 그냥 놔둬요.(웃음) 족제비, 청설모, 다람쥐도 흔하게 보고, 고라니는 바로 앞 수수밭까지 내려와 자고 가고요.”

―동화 같은데요.

“동화도 썼어요. 지난해에 <문신>을 쓰다가 갑자기 심혈관계 이상이 와서 한동안 손을 놓고 못 썼는데, 다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무렵 손주 보여줄 생각에 동화부터 썼어요. 그러다 보니 다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우리 정호(손자)가 네 살인데, 요번 작품(문신)만 끝나면 1~2년 동안 동화만 집중적으로 써서 읽히려고요. 주변에 동화 소재가 널려 있으니까.”

―손주가 그렇게 예쁘세요? 벽마다 사진이 빽빽하네요.

“우리 아들딸 태어날 때마다 공교롭게도 내가 실직을 했어요. 그 덕에 시간이 나니까 애들 데리고 놀아주고 노래도 해주고 책도 읽어주고 내 딴엔 굉장히 정성 들여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손주가 생기니까 자식하곤 또 그 마음이 다르더라고요. 성경 잠언에도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다’란 말이 나오는데, 노년의 삶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손자 같아요.”

손주 얘길 하는 것만으로 그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대대로 단명한 집안이라, 살아서 손주를 본 건 그가 4대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군에서 제대하기 한 해 전 돌아가셨다. 무능력한 가장에, 한없이 엄하기만 한 아버지였다.

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공모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 당선돼 등단
지금도 왕성한 활동 중인 ‘현역작가’
5권 분량 대하소설 ‘문신’ 집필 중
밤새우고 아침에 잠드는 올빼미 생활

일제강점기 은행서 일한 ‘엘리트’ 아버지
완고한 성품에 툭하면 사표를 던졌다
반항과 일탈의 연속이었던 유년기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수시로 가출
소매치기 패거리에 끌려갔다 도망쳐

어려운 형편에 유명인 전기 대필 유혹
아들딸, ‘지금까지 잘 버텨왔으니
하지 마세요’라며 만류하고 나서
“아이들 실망시키지 않게 작품
쓰는 게 나의 첫번째 목표”

“고름은 아껴둬도 살이 되지 않아
빨리 짜내야 새살이 돋는다는 얘기”
“우리 사회 휩쓸고 있는 미투운동은
환부 도려내는 외과수술 과정,
미투 운동에 희망을 걸고 있다”

내게 소설은 또 다른 가출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강경상업학교를 나와 은행과 관청에서 꽤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인텔리였으나 강직하고 완고한 성품에 직장생활을 진득이 버텨내지 못하고 툭하면 사표를 쓰고 나왔다. 1942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윤흥길은 아버지를 따라 익산으로 옮겨갔지만 가장의 잦은 실직으로 가족들의 생활은 갈수록 곤궁해졌고 어렵게 장만한 무허가 판잣집이 헐려서 시청 창고에서 난민 아닌 난민 생활을 한 적도 있다. 윤흥길은 그의 자전적 소설 <궁상반생>(窮狀半生)에서 그에게 업힌 채 약 한 첩 못 쓰고 홍역으로 죽어간 동생에 대해 아프게 회고하기도 했다. 그의 유소년기는 극도의 궁핍과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일탈의 연속이었다.

―가출도 하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수시로 했죠. 아주 상습적이었어요.”

―아버지 때문에요?

“아버지를 실망시키려고요.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제일 실망시킬 만한 게 가출이었으니까.(웃음) 걸핏하면 좋은 직장에 사표 턱 내고 나와서 식솔들 고생시키고, 그러면서도 장남인 나한테는 유독 엄격하기만 하셨어요. 학교에서 1등 한 성적표를 들고 기분 좋게 집에 가면 하시는 말씀이 ‘가서 매 해오너라’ ‘종아리 걷어라’였어요.”

―왜요?

“지난번 1등 할 땐 평균이 몇 점이었는데, 이번에는 몇 점이 떨어졌다고….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빗나가기 시작했어요.”

―가출하면 어딜 가요?

“대전도 가고 서울도 가고. 여기저기 밥 얻어먹고 식당 같은 데서 심부름도 하고. 한번은 서울역 대합실에서 새우잠 자다가 쓰리꾼(소매치기) 패거리한테 붙잡혀 가서 염천교 밑에서 소매치기 기본 배워가지고 실습 나간다고 강제로 원주로 끌려가기도 했어요. 마침 원주 가는 그 기차에 반공학생웅변단이 탔는데 손가락 깨물어 혈서 쓰고, 정차하는 역마다 내려가서 반공연설하는 청년들이었어요. 그 사람들한테 달려가서 구해달라고 해서 겨우 빠져나오기도 했고요.(웃음)”

판잣집 철거민들의 생활, 자존심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무기력한 가장, 전쟁통에 사망한 외삼촌과 동생 이야기, 위악과 비행으로 세상에 맞서는 소년기 체험은 훗날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 연작과 <장마> <내일의 경이> <양> 등 여러 작품의 소재로 차용되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 덕에 마음을 다잡은 윤흥길은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어느 곳에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학이면 무전여행을 다니며 세상을 겉돌았다.

―파란만장하셨네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장이 되니까 가출할 수도 없고… 대신 무전여행을 다닌 거죠.(웃음) 문학을 조금 일찍 시작했더라면 좋았을걸. 소설이란 형식 자체가 일종의 가출이거든요. 내 삶의 세계를 떠나서 상상의 세계를 섭렵하는 거니까. 소설을 일찍 알았더라면 젊은 시절에 그렇게 방황하지 않고 고생을 덜했을 것 같아요.”

―소설은 언제 처음 쓰신 거예요? 원래 문학에 뜻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죠. 익산에 춘포초등학교 교사로 있을 땐데 66년 1월1일이었어요. 숙직교사여서 학교에서 신년을 맞았는데 그날 서울신문 1면에 장편소설 공모 당선자에 대한 기사가 큼직하게 실렸어요. 전북 김제 사는 강석근 작가였는데 <한국인>이란 소설로 당선되었죠. 당직하던 동료교사가 ‘당신도 소설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해보라’고 권유하더라고요. 그 말에 자극받아서 숙직 끝내자마자 서점에 달려가 문학입문서들을 구해서 습작 공부를 시작했죠.”

가장 무서운 독자는 아들과 딸

습작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원광대 국문과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대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대학 수업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됩니까?

“나한텐 도움이 됐어요. 현대문학에 대한 공부보다는 방언학, 민속학, 무속학 같은 쪽을 공부한 게 소설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죠.”

―원광대 졸업하고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학교로 옮기셨는데 곧 그만두셨죠? 결혼하고 아들이 태어나던 해인데….

“우리 아버님이 자식들 고생시킨 게 직장 때려치우는 버릇 때문이어서, 전 안 그러려고 했어요. 근데 저도 좀 다니다 보면 싸우게 되고 엎어치게 되고 그러더라고요. 교사 그만둔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우셨어요. ‘결국 너도 그러는구나’ 하시면서.(웃음)”

―그때 사모님은 교사로 재직 중이셨나요?

“결혼하면서 그만뒀죠.”

―그럼 뭐 먹고 살아요?

“내가 어떻게든 생계는 책임지겠다고 하니 집사람도 수용을 했어요. 실직자로 지내다가 ‘일조각’이란 출판사에 편집사원으로 취직했는데 중요한 공부를 거기서 많이 했죠. 이기백 선생의 한국사 실록, 김열규 선생의 민속학도 보고, 심지어 조경학, 산부인과 과학, 방사선 과학까지…. 참 좋은 직장이고 대우도 굉장히 좋았어요. 월급을 원하는 대로 올려주겠다고도 하고 퇴직을 만류하기도 하고요. 근데 그 무렵 여기저기서 원고 청탁이 들어오는데 그걸 다 수용 못하니까 억울하고 아까운 거예요. 돈이 궁하면 교정 알바라도 하겠다, 작정하고 좋은 직장을 때려치웠죠.”

둘째 예니가 태어나던 해였다. 이후 윤흥길은 전업작가로 살았다. 건강이 나빠져서 글을 못 쓰면 생활비가 끊겼고, 집을 줄여서 빚을 갚아야 했던 적도 있다. 부인이 건강식품 외판원으로 나서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돈 되는 글’에 문학을 팔진 않았다.

―유명인의 전기를 써달라는 청탁도 많이 받으셨다면서요. 왜 안 하셨죠?

“난 할 생각이 있었어요.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 빚이 많아서 집안 형편이 특히 어려울 때였는데, 뭐라도 해서 처자식을 벌어 먹이고 싶다는 유혹이 들더라고요. 집사람한테 얘길 하니까, 애들한테 물어보자고 해요. 애들 앉혀놓고 ‘지금 우리 집 사정이 어려운데 이거 하나 쓰면 앞으로 한동안은 걱정 없이 작품 쓸 수 있는데 어떻게 할까?’ 하니까 아들도 딸도 그러더라고요. ‘지금까지 고생하면서 잘 버텨오셨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하지 마세요’라고.”

―아, 정말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나한테는 제일 무서운 독자가 아들, 딸이에요. 작품을 쓸 때마다 내 자식들이 나중에라도 아버지가 아무개라고 할 때 그거를 부끄러워하고 감추려고 하면 나로서는 작가로서도 실패하고 아비로서도 실패한 것이다, 아이들 실망시키지 않게 작품 쓰는 게 나의 첫번째 목표다,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참 고마웠지요.”

기복이 심한 살림살이에도 부인은 그의 잦은 병수발과 생활고를 묵묵히 견뎌주었고 아이들은 각자 자기 진로를 찾아 잘 커주었다. 완고하고 강직해서 꽉 짜인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는 윤흥길과 그의 아버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윤흥길은 부인이나 자녀들과 크게 불화하거나 충돌한 적이 없다고 했다.

―비결이 뭡니까?

“부부싸움 한번 하려고 해도 뭐 시간대가 맞아야지. 난 밤에 일하고 이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 교회 가니까.(웃음) 이만큼 사는 게, 난 다 아내 기도발 덕분인 것 같아요. 내가 볼 때 하나님은 페미니스트야, 남자들 기도는 잘 안 들어주시는데 여자들, 어머니들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 것 같거든요.(웃음)”

나는 미투에서 희망을 본다

―70년대 유신정권에 반대하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드는 데 참여하시고 80년대 내내 권력에 저항하고 조롱하는 글들을 써오셨죠. 그러면서도 건실한 생활인, 성실한 남편과 아버지로 사셨다는 게 경이롭습니다. 그런 분 흔치 않은 것 같은데요.

“아뇨, 많이 있어요.”

―그런가요?

“그럼요. 제겐 가정이 제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절반쯤 돼요. 그리고 술 별로 안 좋아하다 보니, 바깥 모임 같은 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 편이고요. 내가 가진 신앙이 내 행동을 삼가게 하고 반성하게 만들기도 해요. 남들이 볼 때는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죠, 뭐(웃음) 근데 문단에서 민주화운동 했던 사람 중에 정말로 건실한 분들이 많아요. 기벽이 있는 몇 사람 얘기가 두드러지니까 그쪽으로 얘기가 많이 돼서 그렇지….”

―요즘 문화예술계에서 존경을 받아오던 분들의 성추문이 잇따라 터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이 도덕군자이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불의에 대한 저항과 인간의 존엄을 화두로 하셨던 분들이라면 뭔가 그에 상응하는 인생을 사셨기를 기대하게 되니까요. 이런 기대가 잘못된 걸까요?

“잘못된 게 아니죠. 너무 정당한 요구고. 그 요구대로 실행이 되어야 될 사안이죠. 입으로는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실제 행동으로는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아, 특정인의 특정 사항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는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개인적으로 잘 아는 분들 이야기고.”

―이해합니다.

“일반론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데. 우리 속담에 ‘고름이 살 되랴’ 그런 말이 있어요. 고름은 아무리 아껴둬도 살이 되지 않으니까 빨리 없애야 한다. 빨리 짜내야 새살이 돋는다는 얘기죠.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미투운동은 우리 사회 환부를 도려내기 위한 외과수술 과정이라고 생각이 돼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도 이 문제는 오랫동안 방치되어왔어요.

“조선조 유교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부터 여성은 항상 부차적인 존재였고 이등 시민이었고 억압의 대상이었죠. 오래된 그 전통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어야 하는데, 시대가 변해도 잘못된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 어름에서 심각한 고름이 생긴 거예요. 좋은 사회를 소망하는 사람 입장이라면, 자기 몸에 자기가 칼을 대는 그런 노력을 해야 된다고 봐요. 언행일치하는 자세로 삶을 바꾸지 않으면 개인도 불행해지지만 사회 전체가 불행해지죠. 나는 미투운동에 굉장히 희망을 걸고 있어요.”

―그간 예술가나 작가들의 폭력적인 행위가 일종의 낭만이나 기벽, 예술혼으로 너그럽게 용인되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양반 계층이나 선비들이 과거에 ‘풍류’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잘못된 여성관이 온존해왔고, 거기에 더해 우리가 일본을 통해 현대문학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문인들의 전통과 관행, 일본에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들의 기행이나 사생활을 굉장히 너그럽게 봐주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런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작가는 이래도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진 게 사실이에요.”

―선생님의 <완장>처럼 문학이 부당한 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고 풍자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렇게 얻어진 문학적 명성이나 사회적 신뢰를 이용해서 또 다른 권력과 우상을 만들었다는 게 아이러니 같습니다.

“스스로도 권력자가 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고,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도 저건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이다 여기고 방관하는 경우가 있었겠죠. 그 상황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람은 속수무책이었을 테고요. 사회 전체, 남성 전체, 문단 전체가 성폭력집단인 것처럼 매도되는 데 대해서 자괴감이 들고 화도 나지만, 이 외과수술을 받고 나면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발전된 사회로 한발 나아갈 거란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완장’을 함부로 인용하지 말라

―권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선생님의 <완장>을 못 읽어본 사람들에게도 ‘완장’이 권력의 메타포라는 게 이젠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특히 정치인들이 완장을 자주 인용하죠. 지난해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위원회를 겨냥해서 “윤흥길의 소설 <완장>을 보면 동네 건달에게 노란 완장을 채워주자 완장에 취해 거들먹거리면서 군림하는 모습이 나온다”면서 맹비난을 했는데요. 그 발언, 혹시 보셨나요?

“그게… 참, 내가 완장을 쓴 게 80년도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나온 후입니다. 그때 합수부가 서대문 전매청 자리에 있었는데 거기 가서 3박4일 동안 곤욕을 치렀죠. 거기서 자서전을 세 권을 썼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태어났을 때부터 그때까지 살아온 행적을 다 쓰라는 거예요. 하룻밤 새도록 다 쓰고 아침에 제출해야 하는데, 첫날은 ‘다 썼어?’ 하고는 읽지도 않고 서랍 안에 탁 넣고 열쇠로 잠가버려요. 그러곤 ‘다시 써!’”

―뭐라고 지적도 안 하고요?

“암말 않고. 그래서 두 번째 걸 다시 쓰니 첫 번째 글이랑 비교를 하면서 뭐가 빠졌거나 새로 나온 대목이 나오면 ‘왜 감췄냐? 왜 거짓말 하냐?’면서 집중적으로 욕하고 발로 걷어차고… 어휴, 그 모멸감이란….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루해지고 참담해지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상대를 가지고 놀아야겠는데 그 방법이 소설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고전문학이 가지고 있는 풍자와 해학의 전통을 대입해서 권력의 코를 조금은 납작하게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읽혔습니다.(웃음)

“근데 내가 야유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사람들이 자기 임의대로 그걸 해석해서 이용하는 거 보니까, 참 가관이에요.”

―선생님의 문단 인생 50년과 함께 대한민국 반세기의 역사가 흘렀습니다. 노년이 돼서 바라보는 세상은 젊은 시절에 본 그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여기 이사 온 뒤로, 내 인생에 대한 충족감 같은 게 많이 생겼어요. 내 앞으로 남은 욕심이라는 게,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죠. 전에는 좋은 작품 써야지 하는 스트레스가 컸고 재능이 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을 때엔 내 자신이 굉장히 원망스럽곤 했는데. 이젠 작게 이뤄지는 것도 감사하고 크게 이뤄지면 더 크게 감사하면서, 자연하고 생명하고 친근하게 지내는 거. 그게 제일 큰 소망이 됐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려는 우리 일행에게, 부근에 식당이 없다면서 부인 유계영씨가 밥상을 차려주었다. 우거짓국의 따뜻하고 담백한 국물 맛이 깊고도 달았다. 뭘 먹어도 깔깔하던 속내가 뭉근하게 풀려오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밥상이 되는 삶이라면 참 행복하겠다.

녹취 이수현

“내겐 가정이 제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절반쯤 됩니다.” 윤흥길 소설가가 집 거실에서 부인 유계영씨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웃고 있다. 그는 “아내가 나를 천재로 안다”며 아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내겐 가정이 제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절반쯤 됩니다.” 윤흥길 소설가가 집 거실에서 부인 유계영씨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웃고 있다. 그는 “아내가 나를 천재로 안다”며 아내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윤흥길의 서재엔 초기 작품을 쓸 때 사용하던 구식 타자기부터 워드프로세서, 구형 노트북 컴퓨터 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윤흥길의 서재엔 초기 작품을 쓸 때 사용하던 구식 타자기부터 워드프로세서, 구형 노트북 컴퓨터 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습작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받은 상장.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습작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돼 받은 상장. 완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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