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집 1층 정면 벽에 걸린 민정기 작가의 <북한산>. 두 정상의 판문점 공동선언 서명과 포옹 장면 등 중요 순간들의 배경이 됐다.
역사적 순간에 함께한 작품들
회담장 분위기 운치 있게 살려
남북 두 정상 소통 ‘가교’ 역할
서명 등 중요 순간 배경 되기도
청·현대미술관, 수차례 선정 논의
훈민정음 작품은 김정숙 여사가 제안
‘백두산 그림’은 철도연결 논의 실마리
“제 그림 앞에서 남북 정상이 사진 찍고, 화풍을 말하더군요. 너무 벅차 한참 영상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화해의 새 역사를 쓴 4·27 남북정상회담이 결실을 맺기까지 숨은 공신 중 하나는 이 땅의 산하와 자연을 담은 미술품들이었다. 특히 회담 장소인 판문점 평화의집 1층에 내걸린 <북한산>(2007년)은 두 정상의 판문점 공동선언 서명과 포옹 같은 역사적 순간들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북한산>을 그린 민정기 작가는 30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벅찬 소회를 털어놓았다. 깔깔한 골기를 지닌 북한산 암봉들을 표현한 <북한산>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처럼 다양한 산세 곳곳을 한눈에 조망하도록 아우른 원형의 구도를 이뤄 화합·평화를 추구한 회담 취지에 맞춤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민 작가는 “봉우리들이 삐죽삐죽 솟아 산세가 강한 느낌을 주는 북한산을 산성이 동그랗게 감싸면서 자연과 인문이 조화된 상상의 진경을 구상했다”며 “회담장 조명과 배치 등이 그림의 질감 구도를 잘 뒷받침해 효과적으로 이미지가 연출됐다”고 했다.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을 김중만 작가가 재해석해 찍은 사진작업 <천년의 동행, 그 시작>. 평화의집 1층 접견실에 걸렸다.
평화의집 2층 회담장에 걸린 신장식 작가의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
민 작가의 <북한산>은 그야말로 남북을 잇는 노둣돌이었다. 두 정상은 이날 평화의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민 작가의 <북한산>을 보며 담소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어떤 기법으로 그렸냐”고 물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서양화인데 우리 동양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다른 공간에서도 문 대통령은 충실한 미술 해설사로 나섰다. 1층 접견실 안벽에 서예대가 여초 김응현의 ‘훈민정음’ 글씨를 김중만 작가가 찍은 사진작업 <천년의 동행, 그 시작>(2018년)이 걸린 것을 보고 문 대통령은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 글씨를 작업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청와대는 애초 접견실에 맞춤한 병풍 소장품이 없어 조선시대 궁중진연도를 배치하려다 김정숙 여사가 훈민정음 글씨를 쓰자고 제안해, 고심 끝에 김 작가의 사진 병풍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장식 작가가 풍성하고 짙은 색감으로 그려낸 2층 회담장의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2001년)도 생중계된 회담장 분위기를 돋우었고, 같은 층에 걸린 박대성 작가의 백두산 그림 <장백폭포>(1990년)는 두 정상이 백두산 탐방과 남북한 철도 연결 논의를 꺼내는 실마리가 됐다.
청와대와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진이 10여차례 논의해 엄선한 작품들은 처음 만나는 두 정상 사이의 긴장감을 녹였다. 시각적으로 한반도의 동질성을 자연스럽게 일깨우며 대화의 윤활유 구실을 해냈다. ‘미술관 회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정상은 그림풍이나 기법, 소재 등에 대해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 남북회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미술계에선 작품 선정이 절묘했다는 의견이 많다. 이념이 투영될 수 있는 인물화·정물화 등을 피하고 조선시대 진경산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산수풍경화 위주로 배치한 것이 회담장의 분위기를 편안하고 운치 있게 살렸다. 회담 마지막의 백미는 ‘하나의 봄’ 주제로 마련된 환송행사의 미디어아트 영상쇼. 정상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의집 외벽에 프로젝션 매핑 기법으로 투사된 영상물은 백두대간의 산하에 눈발이 날리고 철조망에 꽃이 피는 등의 서정적 풍경을 담았고, 바람소리 등을 담은 정재일 작곡가의 감각적인 음향, 음악까지 어우러져 외교무대에서 보기 드문 예술적 감동을 자아냈다. 3층 연회장에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움직이는 영상물로 재구성한 이이남 작가는 “회담장 작품들은 물론 환송행사의 영상쇼까지 모두 예술품 그 자체였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원로 작가인 김정헌씨는 촌평했다. “그림들은 두 정상 사이에 평화의 감성으로 스며들어 통 큰 결단을 내리는 데 소중한 구실을 했다. 세간에 오래도록 기억될 역사적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 정말 팔자가 좋은 그림들이다.”
노형석 성연철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