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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국에선 왜 탐정물이 나오기 어려운가

등록 2018-09-08 10:42수정 2018-09-08 11:34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드라마 <오늘의 탐정>
드라마 <오늘의 탐정>은 귀신 잡는 탐정 이다일(최다니엘)이 의문의 여인 선우혜(이지아)와 마주치며 기괴한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 이를 해결해나가는 내용이다. 한국방송 제공
드라마 <오늘의 탐정>은 귀신 잡는 탐정 이다일(최다니엘)이 의문의 여인 선우혜(이지아)와 마주치며 기괴한 사건 속으로 빠져들어 이를 해결해나가는 내용이다. 한국방송 제공

반응이 심상치 않다. 탐정물과 호러 스릴러가 결합한 복합 장르물인 한국방송 수목드라마 <오늘의 탐정>은 첫 방영 직후부터 소셜미디어를 타고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청률이 눈에 띄게 높은 것도 아니고 만듦새가 엄청난 작품인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입을 모아 기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탐정이란 직업 자체가 불법인 한국에서 형사물이 아닌 탐정물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오늘의 탐정>은 ‘탐정사무소가 되고 싶은 흥신소’라는 설정으로 그 한계를 능청스럽게 피해간 것이다. 민간인과 형사가 함께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설정의 한국방송 <추리의 여왕> 시리즈(2017~)나 영화 <탐정> 시리즈(2015~)라는 선례가 있긴 하지만 <오늘의 탐정>만큼 공권력이 2선으로 물러난 채 흥신소 사람들의 추리만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설정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작품은 찾아보기 드물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 덕분에 한국은 탐정처럼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은 탁월한 개인이 활약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설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회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야 보는 사람들도 몰입을 할 텐데, 그렇지 않으니 아무리 설정을 잘 만들어 제공해도 좀처럼 설득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에서 형사나 검사, 국립과학수사원 검시관 등 사법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앉히지 않고 추리 기반의 스릴러를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에서 본격 추리물이나 탐정물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이식 과정에서 번번이 형사물이나 수사물 장르로 전환되며 끝났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추리 스릴러 장르물 중 가장 빛나는 성취를 거둔 티브이엔(tvN) <시그널>(2016)은 형사들이 주인공이었고, 가장 성공적인 시리즈물로 자리 잡은 추리물인 오씨엔(OCN) <신의 퀴즈>(2010~) 또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지역 법의관사무소 소속 촉탁의와 형사들의 협력을 그리고 있다.

슈퍼 히어로물의 실패

“한국에서 왜 탐정물이 만들어지기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에서 왜 슈퍼 히어로물이 나오기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슈퍼 히어로물의 고향인 미국은 연방정부가 성장하는 속도가 영토의 팽창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빠르게 성장한 국가다. 민병대의 존재와 무기를 소지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한 미국 수정헌법 2조는, 연방정부의 행정력 공백으로 생기는 치안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조항이다. 애초에 불의와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일어난 강력한 개인을 그린 서사가 나오기 좋은 토양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오랜 중앙집권의 역사는 개인이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이야기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그나마 성공한 축에 끼는 슈퍼 히어로가 연산군 치하 극도의 혼란 속에 등장한 홍길동과, 민중을 대신해 정의를 실현해줄 국가 자체가 부재했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각시탈 정도밖에 없다는 건 많은 걸 시사한다. 우리는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은 개인이 그렇게 유능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경찰 없이 흥신소가 사건 푸는
탐정물과 호러 스릴러의 결합
방영 직후부터 입소문 퍼져

한국서 탐정물 안 나오는 이유는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개인의
유능함 상상해본 적 없기 때문

빼어난 추리로 진실 밝히는 개인
한국서 살아가면 어떤 모습일지
설득력 있게 그린 것이 인기 요인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개인의 유능함을 상상해본 적이 없는 나라이니, 상상력의 범위도 딱 국력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술력으로 미국의 <스타트렉>(1966~)이나 영국의 <닥터 후>(1963~) 같은 에스에프(SF) 시리즈를 제작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본격적인 에스에프를 표방한 작품들이 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자체 과학기술로 세계를 선도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수적인 관료제가 오랫동안 힘을 발휘해온 나라인 탓에 엄청난 혁신을 이끌어낸 천재가 등장한 적도 거의 없다. 한국 사람들이 화면 속에서 최첨단 과학기술을 설명하고 우주로 진출해 활약한다는 상상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낯간지러운 노릇이다. 최근 문화방송 <보그맘>(2017)이나 <로봇이 아니야>(2017), 한국방송 <너도 인간이니?>(2018) 등 안드로이드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이 작품들은 본격 에스에프 드라마로 분류되기보단 에스에프적 설정을 가미한 코미디나 멜로, 휴먼드라마로 분류됐다. 한국을 배경으로 본격 에스에프 드라마를 만드는 일은 이렇게 요원하다.

이렇게만 말하면 한국 사회가 굉장히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이라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는 게 어렵다는 결론처럼 들리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한때 한국관광공사의 표어였던 ‘다이내믹 코리아’는 다른 표어가 등장한 뒤에도 한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긍정적인 의미로나 부정적인 의미로나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급변해온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그만큼 잘 담아낸 표어도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식민 지배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 불과 70년 만에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그 70년 동안 국민의 힘으로 국가수반을 퇴출하는 데 성공한 것만 세번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국가 중 이 정도로 성숙한 민주주의와 초고도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은 엄청나게 변화가 빠르고 역동적인 나라다.

한국에 해외 장르를 이식하려는 이들이 겪는 난관이 여기에 있다. 얼핏 엄청난 정보통신기술과 인프라를 갖춘 선진국이고 사회 전체의 역동성도 상당한 나라여서 한국형 장르물을 만들기 어렵지 않을 것도 같은데, 막상 뛰어들어보면 그게 안 된다. 개인의 역량만으로 사건을 추리해 진실을 밝혀내고 정의를 수호하는 뛰어난 한국인, 혹은 과학기술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미래로 거침없이 전진하는 한국인을 상상하기 어려운 사회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영미권 대중문화 콘텐츠의 수혜를 본 한국의 대중문화 소비자들의 눈높이를 좇아 추리물이나 슈퍼 히어로물, 에스에프물을 만들어보려 해도, 한국 사회가 축적해온 경험과 역사가 장르의 고향인 영미권과는 너무나 판이한 탓에 설득이 어려운 셈이다. 한국형 슈퍼 히어로물을 표방했던 드라마나 영화들이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거둔 건 대체로 이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 탓이었다.

한국적 장르물이 주는 쾌감

결국 선택은 두가지다. 장르의 한국 이식을 포기한 채 한국 사회의 경험과 역사에 기반한 장르를 개척하는 데에만 집중하거나, 장르를 한국 풍토에 맞게 재해석하는 방법을 고민하거나. <오늘의 탐정>은 이 지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빼어난 추리로 난관을 헤쳐나가고 진실을 밝히는 개인’이라는 존재가 한국 사회 안에 섞여서 살아간다면 어떤 모습일지 자연스레 구현하기 위해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장르물 팬들에게는 준수한 출발점이 된다. 물론 박은빈이나 이주영처럼 연기력으로 주목받는 젊은 여성 배우들이 든든하게 전면과 허리를 지탱해주고 최다니엘, 김원해, 이지아 같은 베테랑들이 탄탄하게 뒤를 받쳐주는 작품이라는 점 또한 기대를 모으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테다. 그러나 장르물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첫 화만으로 입소문을 타긴 어려웠으리라.

다른 장르물에 대한 전망 또한 이 자리에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사회에서 본 적 없던 새로운 존재가 등장할 만한 가능성을 과감하게 상상하되, 그 근거는 철저하게 한국 사회의 역사적 전통에 기반하는 것 말이다. 찾아보면 <오늘의 탐정>과 비슷한 모범적인 전례도 없지 않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교감을 그려낸 에스에프 영화 <로봇, 소리>(2016)는 주인공이 추락한 인공위성을 고치기 위해 가든파이브에서 장사하는 전기기술자 친구를 찾아간다는 설정으로 관객들을 설득했다. “청계천에서는 마징가제트도 만들 수 있다더라”라는 한국 사회의 유서 깊은 농담이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처럼 잘 만들어진 한국 장르물들이 주는 가장 큰 쾌감은, 한국 사회가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잠재력을 품고 있는 곳이라는 낙관인지도 모른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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